0살부터 슈퍼스타 159화
우정한 감독은 ‘단종’을 가장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손발이 맞았던 감독들을 일일이 불러모았다.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조감독과 자신의 눈이 되어줄 촬영감독, 조명감독, 미술감독 등 익숙한 얼굴들에 우정한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영화제작사 다홍의 회의실에 모인 감독들도 간만에 흥행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작업하겠다며 화색인 얼굴이었다.
우정한 감독이 입을 열었다.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시기는 단종 때야. 그래서 임시 제목도 ‘단종’으로 부르고 있어. 주연인 단종은 이서준 배우가 할 거고, 다른 배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제작사는 다홍. 그쪽하고 일하기가 편하지?”
막힘없는 우정한 감독의 말을 듣던 촬영감독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다른 감독들도 멍하니 우정한 감독을 바라보았다.
준비되어 있던 과자를 주워 먹던 조감독이 켈룩- 과자를 뱉어냈다. 네? 누구요?
“이서준?”
“그래.”
“진짜 그 이서준이라고?”
“어.”
식은땀도 흘리지 않고, 빨갛게 변하지도 않은 멀쩡한 얼굴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조감독과 감독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우정한 감독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주조연 배우는 리스트 뽑아놨어. 리스트에 없는 배역은 오디션을 볼 생각이야.”
“오디션요?”
조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서준 배우가 출연하잖아. 이 영화가 한국에서 끝나겠어? 내의원만 보더라도 세계적으로 인기였잖아.”
감독들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나타났다.
“내의원에 출연한 배우들한테 해외팬이 생기고, 누구지? 내의원에 출연했던 아이돌 배우. 걔가 있던 그룹도 해외팬들이 많이 생겼지.”
이런 연출이니, 저런 연출이니, 이런 의미니 저런 의미니 하는 말과 함께, 감독과 작가, 제작진들도 언급되었다. 이서준이 출연하는 한국 작품은 한국 내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적은 투자로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야. 배우 지망생들도 배우 활동을 하는 아이돌들도 아이돌의 소속사들도 어떻게 해서라도 출연하고 싶을 거고, 그게 우리에게 독이 될 건 뻔해.”
우정한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엑스트라까지 다 내가 정하고 싶지만, 그건 시간상 불가능하니까.”
다들 우정한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감독이 입을 열었다.
“오디션이라니, 난리 나겠구만.”
* * *
우정한 감독은 오디션을 열기 전, 단종의 주조연 배우들부터 섭외하기 시작했다.
“단종은 이서준 배우로 확정됐습니다.”
“크.”
우정한 감독의 말에 기획팀장이 감탄하며 화이트 보드에 이서준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단종 이서준]
“김종서 역은 박운열 배우가 1순위입니다.”
“박운열 선생님이라면 든든하죠.”
“날이 쌀쌀하니 건강 체크해야겠네요.”
[김종서 박운열]
“다음은 수양대군인데…….”
우정한 감독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기획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한 배우 없습니까? 우 감독님”
“있긴 한데…….”
“말씀만 하시죠. 저희가 우 감독님 앞에 딱 모셔오겠습니다.”
기획팀장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우물쭈물 대던 우정한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이지석 배우를…….”
……이지석?
직원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다들 머릿속에 이서준과 이지석의 투 샷을 떠올렸다. 어렵지는 않았다. 이미 그 이미지가 박혀 있었으니까.
상상도 못 한 배우의 출연에, 기획팀장이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지석 배우 단독이라면 수양대군. 괜찮습니다. 삼십 대 배우 중에서 이 정도로 연기하는 남자 배우는 손에 꼽으니까요. 어쩌면 10년 전 수양대군보다 더 인상 깊은 수양대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정한 감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단종’은 무의식중에 우정한 감독의 시선이 그 배역을 맡을 배우에게 향하도록 만들고는 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이지석.
싸늘하게 궁을 바라보는 허의관의 눈빛이 화살처럼 우정한 감독의 마음에 꽂혔다.
“근데, 상대 역이 이서준 배우입니다. 우 감독님.”
그게 문제였다.
우정한 감독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이지석과 이서준의 조합은 이미 내의원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몽실몽실하고 따뜻하고 애틋한. 현대물에서 둘이 만나면 ‘후생에서 만났구나’ 하고 흐뭇한 눈으로 바라볼 정도로 아주 깊게 녹아 있었다.
기획팀장이 말을 이었다.
“단종을 죽이는 수양대군입니다. 성녕대군과 허의관이 할 수는 없습니다.”
“흠…….”
이서준이라는 패를 버릴 수는 없으니, 이지석이라는 패를 꺾어야 했다. 하지만 우정한 감독은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그 싸늘한 눈빛을 궁이 아니라 성녕대군에게 향하게 한다면 그보다 어울리는 배우도 없을 터였다.
막무가내로 나갈 수는 없어 우정한 감독은 한 가지를 제안했다.
“오디션만이라도 보면 안 됩니까?”
“오디션이요?”
“이서준 배우와 이지석 배우를 불러서 오디션을 봅시다. 분장도 제대로 한 상태로, 실기 영상의 연기를 하는 겁니다. 그걸 보고도 여전히 성녕대군과 허의관의 이미지가 남아 있으면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우정한 감독의 말에 기획팀 팀원들은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고개를 끄덕인 건 여기서 갑은 우정한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기획팀장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지석 배우에게 연락해 보겠습니다.”
“이서준 배우에게는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이지석 배우가 안 될 때를 대비해서 2순위 배우를 정해두시죠. 우 감독님.”
우정한 감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날, 오후.
이지석은 영화제작사, 다홍의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끊고 손가락을 탁자로 두드리던 이지석이 벌떡 일어나 거실을 맴돌았다. 입술을 깨물고, 이마를 매만지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고민하던 이지석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지석이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계속되던 연결음이 끊기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석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서준아. 나 좀 도와주라.”
* * *
공사가 끝난 코코아엔터 내의 ‘배우 이서준 연습실’.
서준과 이지석이 천장에 설치된 카메라를 이리저리 조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엄청 좋네. 연습실.”
“그렇죠? 집에도 이것보다 크기는 작은데 똑같은 연습실이 있어요.”
“정말? 나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아빠한테 회사 물어볼까요?”
“그럼 고맙지!”
하고 연기광들이 눈을 빛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서준과 이지석의 모습에 이지석의 매니저, 윤성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석이 형이 수양대군 한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이미지 변신도 되고 좋을 것 같아. 요새 너무 주인공만 맡는 것 같아서 수양대군처럼 악당 캐릭터도 해보고 싶었거든.”
다홍의 연락을 받고 이지석은 고민했다. 이지석도 서준과 자신의 이미지를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도전해 보고 싶었다. 서준과의 격렬한 연기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럼 우리 열심히 연습해요!”
“도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서준과 이지석이 아하하하 웃었다.
그사이 연습실 한편, 휴식 공간에 자리를 잡은 윤성오가 배우들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안다호가 고개를 들었다.
“걱정되세요?”
“네. 서준이랑 지석이 형의 투 샷은 완벽한 게 있으니까요. 어지간해서는 대중들이 잊기 힘들 겁니다. 괜히 출연했다가 이질감만 느낄 수도 있어요.”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배우라면 당연한 걱정이었다.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가 이미지가 박혀버리면 다른 영화에 출연할 때 서로를 피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전작에서는 연인으로 나왔다가 차기작에서는 범인과 피해자가 될 때,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기분은 미묘하게 마련이었다.
‘그런 면에선 서준이는 완벽하게 바뀌지.’
성녕은 성녕이었고 그레이는 그레이였고 진은 진이었다.
아무리 흥행하고 몇 번을 돌려보면서 뇌 속에 이미지가 깊게 박혀도, 관객들은 아무런 영향도 없이 서준의 새로운 캐릭터를 반겼다. 서준처럼 배역에 따라 모든 것이 휙휙 바뀌는 배우는 없었다.
천의 얼굴.
배우 이서준은 정말로 천 개의 얼굴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어떨까?”
서준은 완벽하게 단종이 될 터였다. 단종과 함께 연기하는 이지석은 허의관으로 보일까, 아니면 수양대군으로 보일까?
윤성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안다호는 궁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연습을 시작한 두 배우를 바라보았다.
* * *
주연, 조연 배우들이 하나둘씩 섭외되기 시작했다. 영화 ‘단종’에 투자하는 기업도 늘어갔다. 영화 관계자가 늘어날수록 하나둘 열리는 입이 많아졌다.
마침내, 기사가 터졌다. 12월이 되기 며칠 전이었다.
[배우 이서준, 영화 단종(가제) 출연 확정!]
[배우 이서준의 차기작, 단종(가제)!]
[비운의 어린 왕, 단종!]
[왕이 된 성녕대군, 그러나 쓸쓸한 끝!]
[사극 영화 전문, 우정한 감독과 함께하는 배우 이서준의 차기작!]
[배경은 단종. 이서준이 연기할 단종이 기대된다!]
-서준이가 왕이라고? 단종이라고?
-진짜 나오네?? 열심히 떠든 보람이 있구나!
-감독이 우정한이야. 기본은 하겠다.
-실기 영상 뜬 다음에 단종 시놉시스 엄청 만들어졌다며?
=ㅇㅇ 내 친구 영화감독 지망생인데 이서준 소속사에 시놉시스 넣음. 옆에서 봤는데 진짜 3일 만에 써냈더라.
=나 아는 작가도 5일 만에 썼다더라. 읽어 봤는데 구림ㅎ
=그렇게 대충대충 만들 바에야 안 하는 게 나음
-근데 우정한 감독이면 괜찮. 기본은 함.
=ㅇㅇ 우정한 사극 좋음
-이서준이 단종이면 김종서는 누구임? 수양대군은?
=수양대군ㅎ 김종호가 딱인뎈ㅋㅋ
=10년 전이었으면 딱이지ㅋㅋ
=그럼 김종서?
=김종서는 일흔임. 김종호가 더 젊음.
=그럼 내시……하기엔 얼굴이 너무 험악함ㅎ
-근데 이서준은 하는 사극마다 끝이……ㅠ
=22 울음바다겠네ㅠㅠ
* * *
-서준이 단종 찍는구나.
휴대폰 너머로 김종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준도 따라 웃었다.
“네. 우정한 감독님이랑 같이 찍어요.”
-우 감독님이라면 괜찮지. 장용영 찍을 때도 편하게 찍었어.
김종호는 서준에게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보통 더 멋진 장면이 있다면 수정하기도 하는데, 우 감독님은 대본 그대로 찍는 타입이야. 그래서 일하기도 편했지.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지석이, 그놈은 요새 뭐 한다니? 이놈이 통 연락이 없어.
김종호의 말에 서준이 웃었다. 지금 바로 옆에 지석이 형이 열심히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지석이 형이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창피하니, 다른 사람들, 특히 종호 삼촌에게는 될 수 있으면 숨겨달라고 했다. 거짓말을 하긴 그래서, 서준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서준의 대답은 신경 쓰지 않고 김종호가 투덜댔다.
-뭔 꿍꿍이야, 그놈은.
며칠 후, 수많은 댓글과 기사들을 만들어낸 단독 기사 덕분에 김종호는 이지석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단독)배우 이지석, 단종(가제) 캐스팅!]
<배우 이지석이 배우 이서준이 출연하는 단종(가제)에 캐스팅되었다. 알려진 바로는 이지석의 배역은 수양대군으로, 3년 전, 대군과 의관으로 만났던 두 배우가 단종과 세조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세조와 단종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이보다 충격적인 캐스팅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네?? 여기서 수양요?
-이지석이 수양대군???
-아니…… 아니…… 네???
-말잇못…….
-수양대군이 단종을 어떻게 하는데…… 허의관이 성녕대군을요?
-허의관이 수양…… 허의관이 수양!
충격받은 네티즌들의 댓글이 쉴 새 없이 늘어갔다. 기사를 보고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불신이 가득한 네티즌들이 열심히 인터넷을 뒤졌지만, 기사들은 바뀌지 않았다. 이지석의 소속사에서도 오보라는 기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1. 이지석 수양대군
2. 이서준 단종
3. 수양대군 단종
…….
NEW! 단종 오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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