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56화
11월.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갈 날이 다가왔다.
몇 주간의 리모델링 공사 후, 새집을 확인하고 온 이민준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서준과 서은혜는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내 연습실은?”
“엄청 멋있게 됐지!”
“진짜 궁금해.”
서은혜는 공사 중, 가끔 가 봤지만 서준은 위험할까 봐 가 보지도 못했다. 아빠의 말에 서준의 기대감만 커졌다.
“이번 주에 가구랑 전자제품도 전부 오기로 했어. 그거 다 설치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이삿짐 옮길 거야.”
“서준이도 짐 하나둘 정리해야 해. 서준이가 학교 가 있는 동안 옮길 거니까 물건 안 잃어버리게 꼼꼼하게 싸야 해.”
“응!”
가구도 전자제품도 쓸 만한 건 기부하고 나머지는 버리기로 했다.
서준이 쓰는 책상이나 침대 같은 가구는 서준이 자랄 때마다 바꿔주었지만, 부부의 가구는 부부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자식에게 쓰는 돈이 아깝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쓰는 데는 주저하고는 했다.
가구를 들고 이사갈까 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에 뾰로통해진 서준이 말했다.
“내가 살게! 엄마 아빠 거!”
코코아엔터와 몬스터사의 투자자, 할리우드의 슈퍼스타가 말했다. 자신의 통장을 내보이는 서준의 모습에 부부는 이사 가는 김에 모두 새로 사기로 했다.
새로운 가구와 전자제품. 이민준도 서은혜도 신나게 골랐다.
“여기가 고장 잘 안 난대.”
“이거 꽤 튼튼해 보이는데? 이걸로 할까?”
부부의 선택 기준은 여전했다.
서준과 부부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준의 짐은 서준이 직접 챙겼다. 서준은 준비된 상자에 옷을 차곡차곡 개서 넣었다.
작아진 옷은 전부 기부하거나 나눠줘서 버릴 옷은 없었는데 지인들이 선물로 준 옷은 여전히 많았다.
“나라 이모가 준 옷이 제일 많아.”
서준은 미묘한 눈으로 깔끔한 남색 셔츠를 가지런히 개서 상자에 넣었다. 겨울옷이라서 그런지 부피도 꽤 됐다. 이 옷들을 다시 상자에서 빼서 옷장에 정리하는 것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다음은 몬스터사의 인형.
“이게 제일 낡았네.”
서준은 색이 바랜 파란색 슬라임 인형을 들어 올렸다. 희상이 삼촌이 제일 처음 들고 왔던 인형 상자에 들어 있던 슬라임 인형이었다.
폭신폭신해서 기어 다니기 시작할 때 배로 깔아뭉개기도 했다. 배 위에 올려두고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도 좋았다. 지금은 솜이 죽어서 납작해졌지만 남아 있는 추억은 그대로였다.
“이건 리치왕.”
아이들을 겁먹게 하였던 리치왕의 초록색 눈동자는 여전히 번쩍이고 있었다.
“드래곤도 많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등. 무시무시한 드래곤 인형들이 색색깔로 모여 있었다.
그 이외에도 많은 몬스터 인형들이 가득했다. 도플갱어 곰인형, 트윈헤드 오우거, 트롤, 오크, 늑대인간, 그리핀 등.
“요새는 별로 갖고 놀 일이 없었지.”
기껏 해봐야 수빈이랑 은수와 함께 놀 때뿐이었다. 수빈이도 은수도 모두 몬스터 인형을 좋아해서 놀아주는 재미가 있었다. 꺄아아아! 환호성을 지르는 두 동생이 떠올라 서준은 미소를 지었다.
이젠 인형이 없어도 ‘나’를 잊어버릴 일은 없었다. 서준이 여전히 몬스터 인형을 좋아하고 몬스터 모양의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건, 취향일 뿐이었다.
“그래도 없으면 아쉬워.”
잠시 인형들과 상자를 가늠하던 서준이 심혈을 기울여 마치 블록을 맞추듯 인형을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추억이 깃든 인형이라서 하나도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인형을 챙기고 다음은 모자나 벨트, 배지 같은 액세서리. 이쪽은 부피가 작아서 금방 챙길 수 있었다.
“이건 또 큰일이네…….”
인형만큼 하나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물건. 책꽂이에 잔뜩 꽂힌 대본과 DVD였다. 서준이 출연했던 작품의 대본과 DVD는 적어서 금세 챙겼지만,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책장에 잔뜩 꽂힌 대본을 보며 서준은 각오를 다졌다.
“앗. 이거 재밌었는데.”
스무 개째 대본을 상자에 집어넣은 서준은 손에 잡힌 대본의 제목을 보며 반색했다. 줄거리를 다 기억하고 있어도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달랐다.
대본은 김종호가 나왔던 사극 영화의 대본이었다. 조선 시대 정조의 이야기였는데, 이때도 종호 삼촌은 악당 역을 맡았다.
“헤에…….”
서준이 바닥에 앉아 대본의 첫 장을 펼쳤다. 슈퍼스타라도 해야 할 일보다 딴짓이 더 재미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대본을 읽고 있을 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아. 짐 다 챙겼어?”
“아앗, 반쯤 챙겼어!”
정신을 차린 서준이 얼른 읽던 대본을 상자에 넣었다. 나 지금 짐 싸는 중이었지.
“가져가야 할 거 다 챙겨야 해. 옷도 상자에 넣고 대본도 잘 챙기고.”
“응.”
서준이 다시 일어나 대본을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번에는 라이언 윌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의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조용한 서준의 방에 의아해하던 서은혜는 대본에 집중하고 있는 서준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서준과 부부는 정이 들었던 집을 정리했다.
“뽁뽁이 사 왔어.”
“그럼 이제 트로피랑 액자 정리하자.”
서준과 부부는 거실 한편에 장식되어 있던 WTV 영화제, KBC 신인상,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트로피를 뽁뽁이로 잘 감싸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찍은 사진, 배우들과 찍은 사진, 친구들, 지인들과 찍은 사진이 든 액자를 뽁뽁이로 잘 감싸서 상자에 넣었다.
이건 이사 트럭이 아니라 직접 옮길 생각이었다.
“트로피 넣은 장식장도 새로 샀는데, 올려놓으면 멋지겠다. 그지?”
“응!”
“모레, 다들 불러서 저녁 먹자.”
“그러자.”
서은혜의 의견에 서준과 이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나나톡으로 메시지를 보내니 다들 기쁘게 시간을 내어주었다.
이사 전날, 일요일 저녁.
하나둘 서준의 집에 도착했다.
몬스터 인형이 있고, 반짝이는 트로피가 장식되어 있던 서준의 집을 기억하던 아이들은, 텅 빈 거실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진짜 가는구나.”
그제야 서준이 정말로 이사 간다는 것을 실감한 아이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학교는 계속 다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친구들의 모습에 서준이 얼른 말했다. 이사를 가도 전학 가기는 애매한 시기라, 졸업식까지는 매실 초등학교를 다닐 예정이었다. 도보로 학교에 다녔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차를 타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함께 등하교를 하거나, 서로의 집에서 저녁 늦게까지 놀지는 못할 터였다. 침울한 친구들을 서준이 위로했다.
그런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들은 기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더 넓은 곳으로 가다니, 잘됐어.”
“여울 예중 알아보니까 좋은 학교더라고요.”
서준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은 잔치처럼 시끌벅적했다.
지윤이 부모님, 미나 부모님, 지오 지후 부모님.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나 흘렀다.
‘미국에서도 연락을 계속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연락할 수 있겠지.’
서준이가 유명해져도, 변하지 않는 이 친구들이 서은혜와 이민준은 너무 좋았다.
“그때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우리 지윤이가 밥을 안 먹어서…….”
“서준이 먹방이 즉효였지.”
아주 오래전 이야기부터 불과 며칠 전의 이야기까지. 오래된 이웃사촌들의 추억여행은 저녁 내내 이어졌다.
시끌벅적한 저녁이 끝나고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이 빠져나가니, 서준의 집은 훨씬 넓고 쓸쓸해 보였다.
“이제 이 집에서도 마지막이네.”
“그러게.”
서준의 집은 금세 팔렸다. 초등학교가 가까워 원래도 수요층이 많았지만, 서준이 다니면서 알음알음 유명해진 매실 초등학교가 가까워 금방 살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뒷정리를 끝낸 서준과 부부가 집을 둘러보았다.
서은혜와 이민준이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전세였다. 대출도 받았다. 그래도 둘만의 집이 생겨서 너무 좋았다. 곧 셋이 되어 더 기쁘고 행복했다.
임신 소식에 너무 기뻐 엉엉 울었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느껴진 진통으로 깜짝 놀라기도 했다. 꼬물거리며 헤실헤실 웃는 서준과 함께 웃고, 밥을 먹고 잤다.
이 집에는 행복한 기억만이 가득했다.
서은혜와 이민준의 눈이 아련해졌다.
“여기서 먹방 찍었는데…….”
별생각 없이 찍었던 아들의 먹방은 가족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대출도 갚고, 전셋집을 살 수 있었다.
서준도 그때를 떠올렸다. 최상급 능력의 영향력은 무시무시했다. 지금도 서준의 먹방은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여기서 48시간도 찍고.”
브라운블랙 형들에게 질투가 나서 울기도 하고.
‘그땐 참 어렸지.’
서준은 허허 웃었다.
“유치원도 가고, 초등학교도 가고…….”
집 안은 서준과 부부의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물을 찔끔 흘린 이민준이 입을 열었다.
“집 팔지 말걸 그랬나?”
“우리가 계속 살 것도 아닌데.”
“그거야 그렇지만 아쉬워서 그렇지.”
“괜찮아. 사진도 잔뜩 있고 동영상도 잔뜩 있으니까.”
“맞아. 아빠. 새집에서도 추억 많이 쌓으면 돼.”
서준의 말에 서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아빠보다 아들이 더 똑똑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서준과 서은혜의 눈에도 아쉬움이 가득했다.
“오늘은 다 같이 거실에서 잘까?”
“응. 나는 좋아.”
아빠의 멋진 제안에 서준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도.”
서은혜의 동의에 이민준과 서준은 아직 싸지 않았던 이불을 얼른 들고 나왔다. 거실에 이불을 깐 서준과 부부는 잘 준비를 끝내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어두워진 거실 벽, 아기 서준을 위해 붙여놓았던 야광 스티커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것 하나에도 온갖 추억이 떠올랐다. 울컥한 서은혜와 이민준이 입을 열었다.
“새집에서도 행복하게 살자.”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하기.”
“응!”
서준의 힘찬 대답에 부부가 미소를 지었다.
‘새집에서도 행복한 추억을 잔뜩 쌓아야지.’
그렇게 많은 추억이 담긴 첫 집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마지막 짐 정리를 모두 끝내고 서준은 학교가 끝나는 대로 안다호와 함께 코코아엔터에 가기로 했다.
“내가 도와줄 일 없어?”
서준의 말에 서은혜와 이민준이 웃었다. 서준이 나타나면,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놀랄 게 뻔했다. 서준에게 신경이 쏠려서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아저씨들은 짐만 옮길 거니까 청소는 우리가 해야 해. 갔다 오면 청소할 게 엄청 많을 거니까, 그때 도와주면 돼.”
입주 전 청소야 업체를 이용해서 집은 깨끗하겠지만, 이삿짐을 옮기면 아무리 깨끗한 새집이라도 다시 먼지를 풀풀 날리게 될 게 분명했다.
서은혜의 말에 서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이리저리 옮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엄마 아빠를 보며 서준도 생각에 잠겼다.
새집에 가면 할 일이 태산이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집에 이런저런 능력을 새겨넣었다. 작게는 벌레 방지부터 크게는 사고가 안 나는 능력까지.
‘이제 또 하나하나 넣어야겠지.’
슬슬 생의 도서관의 새로운 문이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하급의 문이야 계속 열리고 있었지만, 이번엔 한 단계 더 높은 단계의 문이 열릴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한 능력을 넣을 수 있을 거야. 물론,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은 아니겠지만.’
서준은 이제 떠나야 하는 집을 보며 생각했다. 집 안 여기저기 서준의 눈에만 보이는 문양들이 여전히 그려져 있었다.
‘어차피 마나 공급을 안 해주면 사라질 테니까…….’
서준은 문양을 없애지 않고 그냥 놔두기로 했다. 서준의 집으로 이사 올 사람은 몇 주는 다른 집보다 아늑하게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서준아. 그만 학교 가자.”
“응!”
서은혜의 부름에 서준은 마지막으로 집을 보며 인사했다.
“안녕.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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