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55화
연기를 마친 서준이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공을 너무 노려봤더니 눈이 뻑뻑해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 목소리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3학년 선생님이, 이틀째 반복하고 있는 말을 내뱉었다.
“어, 어. 그래. 수고했어요. 나가도 됩니다.”
서준이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나머지 두 선생님들의 정신도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와…… 저거 그거 아니에요? 단종 나왔던 영화…… 윽.”
입을 열었던 2학년 선생님이 뻐근한 어깨를 매만졌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댄 정시운이 입을 열었다.
“10년 전 영화 말씀하시는 거죠?”
“네. 영화, 세조.”
세조.
10년 전 개봉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이었는데,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인 데다가 주로 사육신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짧게 나온 단종을 유약한 어린 왕으로 표현했다.
“그때 아역 배우도 연기를 잘했던 걸로 기억해요. 수익분기점도 넘었던 것 같은데…….”
“네. 세조 역이 인상 깊었어요. 그만큼 단종이 가려졌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유약한 단종의 대사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시운의 말에 두 선생님도 동의했다.
다시 떠올려도 불꽃 튀는 신경전에 목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유약한 단종과 거친 수양대군이 아니라.
날 때부터 정당한 왕인 이홍위와 웅크리고 있다가 발톱을 세운 이유.
13세의 왕과 37세의 대군.
어린 몸에서 뿜어나오는 단종의 위엄과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드는 수양대군의 싸움.
아마도 서준의 머릿속에서는 수양대군과 단종의 어마어마한 신경전이 그려졌을 터였다.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런 영화는 안 나올까요?”
상상만 해도 대단한 영화가 될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 서준의 자유 연기의 여운을 음미하고 있을 때, 면접실의 문이 열렸다. 빼꼼 고개를 내민 교직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네?”
“노크 소리를 못 들으신 것 같아서요. 다음 수험생 들여보낼까요?”
그 말에 선생님들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 정도로 넋 놓고 있었나!
“네, 네!”
“다음 차례가 275번이죠?”
선생님들은 분주하게 원서를 넘겼고, 잠시 멈추었던 여울 예중의 실기 시험은 다시 진행되었다.
이서준의 뒤에 실기 시험을 치르게 된 275번 수험생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면접실로 들어갔다.
* * *
며칠 후, 합격 발표날.
기자들이 여울 예술중학교로 몰려들었다.
“왔다!”
“저기요! 이서준 합격했습니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질문과 함께 커다란 카메라 렌즈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합격자 명단을 게시판에 붙이러 나왔던 직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침착하게 게시판에 합격자 명단을 붙이고 얼른 게시판 앞에서 물러섰다.
“이서준. 이서준.”
“274번, 274번.”
번호순으로 적힌 합격자 명단에서 [274번 이서준]이라는 글씨를 찾아낸 기자들이 얼른 기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중, 앞번호에서 예상외의 이름을 발견한 기자가 눈을 반짝였다.
[배우 이서준, 여울 예중 합격!]
[이서준, 여울 예술중학교 합격!]
[(단독)배우 이서준, 배우 김주경 여울 예중 합격!]
-합격 축하!
-서준이야 당연히 합격하겠지!
-내년이면 서준이가 중학생! 역시 남의 애는 금방 크는구나!
-오. 이거! 김주경 아님?
=‘한 걸음’에 나왔던? 서준이랑 같은 학교구나!
일찌감치 합격 문자를 받은 서준은 팬카페에서 팬들의 합격 축하 글을 읽다가, 팬이 올려놓은 김주경의 합격기사를 발견했다.
“주경이도 여울 예중에 지원했었네.”
서준이 얼른 휴대폰을 꺼내 김주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경아, 합격 축하해! 같은 학교네!
>서준이 너도 합격 축하해! 서준이랑 같은 학교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나도ㅎ 근데 왜 못 봤지?
>난 첫째 날 시험 쳤어.
<난 둘째 날. 그래서 못 봤나 보다!
<같은 학교라서 너무 좋다ㅎ
>나도!
김주경에게 메시지를 보낸 서준은 지인들에게서 쏟아지는 합격 축하 메시지에 열심히 답장을 보냈다. 서준이 답장하는 사이, 인터넷에 한 게시글이 떴다.
[제목: 여울 예중은 실기 영상 찍어서 올려줌.]
여울 예중 졸업생임.
여울 예중은 자유 연기로 시험 보는데, 그거 카메라로 찍거든.
합격자 발표 나면 그다음 날, 자유 연기 찍은 영상 올려줌. 물론, 합격자들이 허락하면ㅎ
근데 대부분 허락함. 그거 보고 캐스팅하는 감독들도 있거든. 나도 그랬음.
그리고 탈락한 수험생들한테도 보내주기도 함. 조언은 없지만, 그 영상보고 연기 학원에서 연기 수정한 다음에 고등학교 붙는 애들도 있음.
-근데 갑자기 실기 영상은 왜?
=ㄱㅆ : 서준이 영상 보고 싶엏ㅎㅎ
=그러네! 이서준도 실기 시험 쳤겠구나!
=당근 합격이겠지만, 이서준의 연기라니! 보고 싶다!
-근데 어디에 뜸?
=ㄱㅆ : 여울 예중 너튜브 채널! 실기 영상 말고 매년 하는 공연 영상도 올라옴.
-글쓴이 영상은 뭐야? 보고 싶넹
=ㄱㅆ : ……밝히지 않겠다ㅎㅎ
다음 날, 너튜브 채널 [여울 예술중학교]에 합격생들의 실기 영상이 떴다. 그중 가장 관심이 쏠린 영상은 당연하게도 서준의 영상이었다.
[274번, 이서준 실기 영상]
“숙부.”
단종의 눈동자가 빛났다.
“모든 옳음은 저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숙부가 이 자리에 올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백성들도 후손들도 모두 알게 될 겁니다.”
그 날카로운 진실이 일개 반역도인 수양대군을 꿰뚫었다.
“하늘이 숙부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어린 용의 우렁찬 외침에 수양대군 또한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내 눈에만 저 옷이 곤룡포로 보이나?
=ㄴㄴ 나도 저기가 궁인 줄ㅎ
-화면에 서준이밖에 안 보이기는 하는데, 화면 밖에 수양대군 서 있을 것 같다ㄷㄷ
=나도 모르게 서준이 시선 따라감.
-불꽃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은데?
-이 대사…… 세조 같은데.
=세조? 영화임?
=ㅇㅇ 나 이거 영화관에서 봤는데ㅎㅎ 처음에 몸을 움찔 떠는 것도 수양대군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임.
=오.
-나도 봤는데, 이런 느낌의 대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22 ‘세조’에서는 단종이 유약한 성격이었음. 이렇게 신경전 벌이는 대사가 아니었음. 아마 이서준이 캐릭터 해석을 다르게 한 듯.
=서준이 똑똑하다ㅎ
[배우 이서준, 여울 예중 실기 영상 공개!]
[평범한 셔츠도 곤룡포로 보이게 만드는 연기력!]
[겨우 2분의 자유 연기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배우 이서준!]
[다시 뜨는 영화, 세조!]
-ㅋㅋ 실기 영상 영어 자막 떴음ㅋㅋ
-중학교 실기 시험까지 관심을 가지다니, 서준이 해외 팬들도 대단하다ㅎ
-세조 재밌긴 한데, 뭔가 생각과 달랐음. 내가 생각한 건 단종 대 수양대군의 신경전이었는데…….
=우리가 상상하는 단종 VS 수양대군 대결 같은 영화를 보려면, 아역 배우가 연기를 잘해야 함. 지금이야 이서준 연기가 넘사벽이니까 ‘이서준이라면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는 거지, 10년 전에는 단종역 아역 배우, 연기 잘한다고 했는데도 그 이상은 상상도 못 했음.
=ㅇㅇ 지금 이서준 이외의 아역 배우 중에 성인 배우랑 신경전 벌여도 지지 않을 아역 배우 생각남? 안 나지? 그런 거임. 지금도 이서준 없었으면 저런 배역 할 수 있는 아역 배우가 없음.
-서준이는 어떻게 10년 전 영화를 아는 거지? 10년 전이면 서준이 쪽쪽이 하고 있었을 땐데ㅎ
=쪽쪽이ㅋㅋ
어느새 ‘이서준이 단종으로 나오면 좋을 것 같은’ 영화는 ‘단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서준이 ‘단종’ 찍으면 재미있겠다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올 때, 다른 의견을 가진 댓글이 하나 올라왔다
-난 이서준이 단종 찍어도 N차는 못할 것 같음.
=왜?
=서준이가 단종 역이니까. 단종은 수양대군한테 계속 당하면서 상왕 되고, 노산군 되고, 끝내 죽잖아. 이렇게 써 놓기만 해도 단종이 불쌍한데, 서준이 연기로 본다고 생각해 봐. 병으로 죽었던 성녕대군 때도 그렇게 울었는데…… 이건 행복이라고는 1도 없는 단종이라고…….
=그러네. 생각해 보니 그냥 고구마밭이구나.
=ㅇㅇ 서준이는 왕 같이 아우라 뿜뿜하는데 주위상황이 안 따라줌. 뭘 해보려고 해도 수양대군이 다 죽임ㅎ 영상에 나온 것처럼 신경전 벌이면 재미있겠지. 언제 서준이가 수양대군에게 엿을 먹일지 두근두근하잖아. 근데 이거 역사 영화임. 결말은 정해져 있음. 수양대군이 이기고 단종이 죽어. 서준이가 죽는다고!
=대. 왕. 고. 구. 마. + 사이다 없음ㅎ
다시금 인터넷은 이서준으로 도배되었다. 별생각 없이 영상을 공개했던 서준과 부부가 놀랄 정도였다.
“2분도 안 되는 영상인데…….”
“그러게.”
해외반응도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짧은 영상인데, 이만한 반응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서준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건 항상 있는 일이라, 익숙해진 이민준은 고개를 돌려 지인들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던 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영화 한다면 출연할 거야?”
“음. 대본 보고 재미있을 것 같으면 할 거야.”
“그래. 서준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부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돌렸다.
“서준아. 합격 선물 뭐 받고 싶어?”
선물?
서준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선물이라. 읽을 대본이 있고 촬영을 할 수 있다면 대체로 만족하는 물욕 없는 서준이었다.
“글쎄. 갑자기 선물이라고 해도 생각나는 게 없는데…….”
“봐봐. 나라도 리첼도 엄청 메시지 보내고 있어.”
서은혜가 서준에게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쉐도우맨 팀과 나라 킴이 있는 메신저 단체 방이었다.
>나라 : 합격 선물, 초등학교 졸업 선물, 중학교 입학 선물, 3월이면 서준이 생일이니까 생일 선물까지! 4개나 있어! 서준아, 뭐 갖고 싶어?
>리첼 : 뭐? 4개밖에 안 돼?!
>나라 : 잠깐만! 크리스마스 선물도 있었어! 새해 선물도 보낼까?
>리첼 : 그럴까!
>에반 : ……난 적당히 보낼게.
신나 보이는 나라와 리첼의 메시지와 혼자 차분한 에반의 메시지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음. 매년 선물을 받아서 딱히 갖고 싶은 게 없는데…….’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더 많은 선물이 올지도 몰랐다. 나라와 리첼의 선물 지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서준은 고민에 빠졌다.
“음. 이사 갈 집에서 쓸 카메라랑 모니터 사달라고 할까?”
“그건 엄마가 사주고 싶어. 라이언 감독님한테 추천받아서 좋은 카메라랑 모니터도 골라놨거든.”
“그럼 프로젝트 빔이랑 스크린!”
“그건 아빠가 벌써 결제했지.”
아들에게 줄 선물 생각에 엄마 아빠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서준은 끄응, 머리를 싸맸다.
* * *
코코아엔터 2팀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징-징- 인쇄기는 계속 종이를 뽑아내고 있었다.
“계속 들어오네요.”
“저쪽도 엄청 바쁘겠어요.”
안다호는 프린트되고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서준의 자유 연기가 화제가 되자, 단종을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 출연 제안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화제가 된 소재와 배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급하게 만든 듯한, 질 낮은 시놉시스가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는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정성을 다한 것 같은 대본도 있었다.
“이런 소재의 대본을 생각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적당한 아역 배우가 없었던 탓에 묻어뒀겠죠.”
“그리고 해낼 만한 배우가 나타났으니까 꺼냈을 거고요.”
안다호의 손에 들린 두꺼운 대본을 보며, 2팀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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