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27화
[오버 더 레인보우, 아카데미 시상식 캠페인, 남우주연상 포스터 공개!]
<웨일 스튜디오가 아카데미 시상식 캠페인에 쓰일 포스터를 공개했다. 낡은 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켜는 그레이의 뒤로 턱시도를 입은 그레이의 뒷모습이 살짝 보인다.>
-그러니까 웨일 스튜디오가 이서준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리려고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고?
=그런 듯?
-웨일 스튜디오 정도면, 어, 그거 아니냐?
=왜 말을 못해! 말해!
=아니, 그러다 안 되면 미안하잖아.
-골든글로브에 아카데미에, 이서준 바쁘겠네.
안다호는 대본과 함께 킹즈 에이전시에서 전해준 서류를 서준에게 건네주었다.
웨일 스튜디오에 있는 오스카 전담팀에서 보낸, 오스카 시즌과 오스카 레이스라고 불리는 ‘오스카상을 타기 위한 보통의 일정’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서류였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작 결정과 수상작 결정은 모두 감독, 작가, 배우 등 수천 명의 영화 관계자들의 투표권으로 결정된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개봉된 영화 중에서 선택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인상 깊지 않으면 1월과 2월에 개봉한 영화는 투표자들의 선택을 받기 힘들었다.
그렇게 영화계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이 바로, 예술성과 작품성이 있는 작품이라면 9월부터 개봉하는 일련의 법칙.
“오스카 시즌이라고 하는구나.”
오스카 시즌이었다.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하나를 개봉하는 데도 엄청난 마케팅이 들어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을 받기 위해서도 이런 공공연한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오스카를 받겠다 싶은 영화는 대개 하반기에 개봉하네요. 음. 오버 더 레인보우도 그래서 10월에 개봉했나?”
배우들이 바이올린을 배우는 데 오래 걸려서 그렇지, 오버 더 레인보우는 촬영부터 편집까지 정말 쉴 새 없이 달려왔다.
보통 촬영과 편집이 끝나고 개봉을 기다리는 보통의 영화와는 달리 편집이 끝나고 바로 개봉했다. 짧으면 몇 개월, 길면 1, 2년은 걸리는 개봉을 생각하면 정말 빠른 속도였다.
서준의 말에 안다호도 동의했다. 마린사의 자회사인 웨일 스튜디오인 만큼 개봉 날 하나도 허술하게 잡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것도 있겠지. 올해는 그다지 뛰어난 영화가 없었으니까.”
웨일 스튜디오에서 보내준 서류도 그랬다. 웨일 스튜디오와 마린사 내부에서 예측한 후보작 중 오버 더 레인보우보다 흥행한 영화는 없었다.
‘뭐, 흥행으로 수상작이 정해지진 않겠지만.’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감독이나 작가, 배우들이 투표하는 만큼, 원래는 9월부터 여러 영화제에 참석하면서 홍보하는데 오버 더 레인보우는 그때 촬영 중이어서 못했대. 시상식만큼 흥행도 중요해서 개봉 중에도 못했고 이제 좀 잠잠해져서 시작하려는 모양이야.”
미리 코코아엔터에서 서류를 읽은 안다호가 설명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킹즈 에이전시에 따로 묻기도 했다.
“이건 저도 의아하긴 했어요.”
서류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채널 [RAINBOW]는 영화가 개봉한 후, 두 가지 영상을 업로드했다.
하나는 LA음대 학생들이 찍힌 영상이었고 하나는 촬영 전 무대 위에서 ‘그레이 연주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이었다.
“그래. 그때 무대 위에서 다른 곡들도 연주했으니까.”
한 곡을 연주하는 시간은 짧았고, 관객들은 그 짧은 연주회를 아쉬워했다. 서준도 두말할 것 없었다.
촬영이 끝난 다음에도 서준은 무대 위에서 몇 곡의 클래식을 더 연주했다. 그렇게 촬영된 몇 개의 연주 영상 중 웨일 스튜디오는 오직 ‘그레이 연주곡’ 영상만을 업로드했다.
“같은 곡이라서 그런지 비교하기 쉽긴 해요.”
1-7주차와 8주차 버스킹의 차이, 그리고 무대의 영상.
분위기만 바뀌었는데도 확연히 달라지는 존재감과 바이올린 연주!
우리 영화의 주연배우, 서준 리의 연기력을 봐라!
웨일 스튜디오는 8주차 영상과 무대 위 영상을 업로드함으로써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는 서준의 온오프의 차이를 더 알아보기 쉽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웨일 스튜디오는 채널 [RAINBOW]는 영상의 편집도 합성도 모두 용인했다.
너튜버들과 너튜브를 보는 사람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 서준 리라는 배우의 천재적인 연기력을 알려지길 바랐다. 그리고 그 유명세가 투표자들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웨일 스튜디오의 오스카 캠페인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안다호가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캠페인이라는 게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영화가 훌륭하다, 우리 배우가 최고다, 하고 선거 홍보를 하는 건데, 웨일 스튜디오도, 킹즈 에이전시도 1차 투표는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2차 투표가 관건이겠네요.”
“그래. 올해 대진운이 좀 괜찮더라고.”
수많은 영화가 쏟아져 나왔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보다 큰 흥행을 한 영화도 없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영화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흥행으로 따지자면 우리 작품이 제일인데 말이야. 문제라면 작품성과 예술성이지. 작품성과 예술성이란 게 개인마다 가치를 두는 쪽이 다르거든.”
“호불호가 갈린다는 거겠죠.”
“그래. 그래도 오버 더 레인보우는 평론가들의 평도 좋으니, 웨일 스튜디오도 욕심이 나는 모양이야.”
“그럼 전 뭐 하면 돼요?”
서준의 물음에 안다호가 킹즈 에이전시로부터 받은 자료를 서준에게 주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참가하기 전에 인터뷰랑 토크쇼 출연만 해주면 된다더라. 너랑 캐서린과 폴이 여기저기 행사 다니기에는 어리고,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대. 이건 인터뷰 질문지고 이건 토크쇼 목록. 이 중에 괜찮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말해달래. 물론 토크쇼는 꼭 안 나가도 돼.”
서준은 먼저 토크쇼 목록을 보았다. 제일 처음 적힌 토크쇼는 서준이 미국에서 살 때 엄마 아빠와 보았던 토크쇼였다.
이 프로그램이 아직도 하는구나.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토크쇼에 나가게 되다니.
천천히 목록을 읽어 내려가던 서준이 말했다.
“미국에도 제 팬들이 있으니까, 토크쇼에 나가면 좋아하겠죠?”
“미국팬뿐이겠어? 자막만 나오면 전 세계 팬들이 좋아하지.”
안다호의 말에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나갈게요.”
“그래? 알았어.”
토크쇼 목록을 내려놓은 서준이 이번엔 인터뷰 질문지를 들었다.
“생각보다 질문이 많네요.”
서준은 삼십 개정도 되는 질문 중, 첫 질문을 읽었다. 먼저 읽어본 안다호가 웃었다.
“읽어보면 재미있어. 좋아하는 숫자나 싫어하는 음식 같은 소소한 질문들이 많아.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1월이니까, 그때까지 편하게 적으면 돼.”
“네. 다호 형.”
연필을 든 서준이 첫 질문의 답을 써 내려가다 고개를 들었다.
“근데 다호 형.”
“응?”
“웨일 스튜디오에서는 배우들도 없는데 어떻게 홍보를 할까요?”
“글쎄? 나중에 물어볼까?”
“네. 어떻게 홍보할지 궁금해요.”
하지만 안다호가 묻지도 않았는데 답이 도착했다.
서준에게만 아니라,
전 세계로.
“……우리 컴백도 이런 식으로 해주면 안 돼요, 은찬이 형?”
“……돈 없다.”
황예준의 물음에 서은찬이 답했다. 서준과 형들의 눈은 여전히 텔레비전으로 향해 있었다. 오랜만에 브라운블랙 형들과 함께 밥을 먹는데, 가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뉴스가 모두의 손을 멈추었다.
텔레비전에 뉴욕 타임스퀘어가 보였다. 커다란 빌딩에 설치된 여러 개의 화면이 일제히 까맣게 변했다가, 누군가를 비추었다. 서준 리였다.
버스킹 영상이 나오고, 뉴스 화면이 바뀌었다. 런던 피카델리 서커스 광장이었다. 누군가 비쳤다. 서준 리였다. 뉴스 화면이 파리로, 하노이로, 서울로 바뀌었다.
커다란 빌딩의 옥외 광고는 물론이고 각 나라의 지하철마다 보이는 포스터까지.
모든 곳에 서준 리가, 그레이 바이니가 있었다.
뉴스에서 연신 떠들어대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영화가 개봉하기 전과 같은, 그 압도적인 물량에 서준도 코코아엔터도 넋이 나갔다.
“근데 다호 형. 미국에서만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시상식이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던데…….”
1월에 열릴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시상식을 씹어먹겠다는 웨일 스튜디오의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 * *
새해가 지나 1월이 되었다.
1월, 서준과 부부, 안다호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위해 출국했다. 많은 카메라와 사람들이 공항에서 이서준 배우를 배웅했다.
-조금 전, 이서준 배우가 출국장으로 향했습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MBS에서 1월 7일 생중계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보통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중계하지 않지만, 이서준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가 이번 시상식에 다수 노미네이트 되었기 때문에, 생중계될 예정이었다.
[배우 이서준, 오늘 출국!]
[배우 이서준, 공항 패션! 여전한 몬스터 사랑!]
[오는 1월 7일, 골든글로브 시상식 MBS에서 생중계!]
[MBS,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위한 준비 완벽하게 끝마쳐!]
-한국 영화도 아닌데 한국 영화 같은 이 기분ㅎ
=ㅋㅋ이서준이 한국 배우니까ㅋㅋ
-MBS 난리라더라ㅋㅋ 간만에 큰 건수 잡았다고 아주 골든글로브 시상식 역사에 대해서 파헤치던데ㅋㅋ
-얼마 차이로 MBS에 중계권 뺏긴 타 방송국도 난리라던 루머가…….
=상 받아도 안 받아도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방송이잖아ㅎ
* * *
아늑한 무대 위, 폭신한 소파 두 개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무대 옆쪽에서 발레리아가 나타나자,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오. 오늘은 보통 때보다 환영인사가 뜨겁네요. 네. 알고 있어요.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불렀는지! 박수를 받을 만하죠. 안 그래요?”
-맞아요!
-얼른 불러줘요!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저도 얼른 부르고 싶어요. 제작진에서 이 배우를 설명할 많은 수식어를 줬지만, 단 한 가지 말로 표현 가능하죠. 우리의 슈퍼스타를 모셔봅시다!”
발레리아가 대본을 옆으로 던지고 외쳤다.
“한국의 ‘대군마마’,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서준 리입니다!”
이미 발레리아의 진행에 해탈한 제작진이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준에게 손짓했다. 발레리아의 토크쇼를 봤던 서준은 킥킥 웃으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준!!
-팬이에요!!
서준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방청객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처음 만나는 팬들을 위해, 아우라를 듬뿍 뿜어내는 서준의 모습에 다들 슈퍼스타의 아우라를 잔뜩 느꼈다.
“어서 와요. 리.”
“반가워요. 발레리아. 준이라고 부르세요.”
“그래요. 준. 정말 반가워요. 여기 앉아요.”
발레리아와 서준이 자리에 앉았다.
“첫 토크쇼에 나온 기분은 어떤가요?”
“설마 여기서 ‘대군마마’라는 호칭을 들을 줄은 몰랐어요.”
“오. 준의 팬이라면 당연히 봐야 할 드라마죠. 다른 말은 몰라도 ‘내의원’과 ‘성녕대군마마’는 확실하게 외우고 있답니다. 그렇죠?”
-네!
-대군마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군마마의 호칭에 서준이 빵 터졌다. 오. 내 스타가 웃고 있어! 다들 감격한 얼굴로 연신 서준을 불러댔다.
“자자. 진정하세요. 이러다가 준이 웃는 모습만 방송에 나가겠어요. 물론 그것도 시청률이 엄청 나오겠지만 우린 좀 더 다양한 모습을 봐야죠.”
발레리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유쾌하게 웃고 있던 서준도 너무 웃어서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먼저 할 일을 해치우고 사심을 채우자구요.”
발레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서준이 몇 마디도 하기 전에 순식간에 ‘오버 더 레인보우’의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용케도 웨일 스튜디오에서 꼭 해달라고 했던 말은 다 넣어서 말이다.
서준과 안다호와 함께 방송국에 왔던 웨일 스튜디오 홍보팀 직원이 머리를 싸맸다. 안다호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토크쇼 모니터링을 했지만 이런 진행은 아니었다.
“이 방송 원래 이럽니까?”
“가끔. 아주 가끔. 발레리아가 정말로 좋아하는 스타가 오면 이렇습니다.”
제작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홍보팀 직원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거기에 준이 안 들어가길 바란 게 잘못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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