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25화
[제목 :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영화객입니다. LA에서 출발해서 몇 시간 전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거의 보름 동안 빡세게 여행했네요. 역시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집이 제일 편하네요.”
초췌한 영화객의 얼굴에 다들 댓글을 남겼다.
-그래도 다 모았네. 용볼ㅋ
-웨일은 이렇게 모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뭐, 가까운 나라 한두 개는 예상하지 않았을까?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이 투어를 시작하셨더라고요. 게다가 이거 모으는 버전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방송 거리를 찾음?
-대. 단.
“LA에서 한국까지 비행시간이 길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할 게 없었어요.”
영화객이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티켓들의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이 올라와 있었다.
[프랑스, 1월부터 12월까지 다 모았어.]
[이탈리아입니다! 각 달 14일 날짜로 다 모았어요! 14일이 생일이거든요.]
[러시아 열두 나라 열두 달. 다 모았습니다.]
[미국. 50개 주 워싱턴 특별구 다 모음.]
-엄청 많네.
-마지막 미국인은 무슨 짓을 한 거야? 미국 51개 주를 다 돌았다고? 알래스카랑 하와이도 갔어?!
-괌이나 사이판 같은 곳은 안 간 게 어디냐.
-갈 예정이라더라.
-헐. 덕중덕은 양덕이라더니.
“진짜 대단하네요. 이제 겨우 개봉한 지 3주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저게 가능하죠?”
마지막 SNS에는 결국 영화객도 고개를 저었다.
-우리나라는 전국 영화관 도는 사람도 있더라.
-그것도 좋네.
“그럼, 다 모은 티켓을 액자에 넣어 볼까요?”
영화객이 캐리어에 소중히 넣어 가져온 상자를 꺼냈다. 이동 중 티켓과 봉투가 구겨지지 않게 딱딱한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
-두근두근!
-오오오!!
영화객은 마치 보물 상자처럼 네모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영화객도 시청자들도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
“제일 먼저 1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영화객이 미리 준비해 놓은 액자의 가장 앞에 티켓을 고정했다.
“2월, 체코 프라하.”
두번째 티켓이 그 옆에 올라갔다.
“3월, 독일 베를린입니다.”
영화객은 계속해서, 티켓을 고정했다. 그렇게 10월까지의 티켓을 모두 고정했다.
“모두 각 나라의 수도의 영화관에서 봤지만, 이 두 개는 다릅니다.”
-오오오르체시!
-에에에엘에이!
“11월 프랑스 오르체 시.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입니다. LA음대 근처에 있는 영화관 티켓입니다!”
-LA음대 공원 대단했음.
-사람 엄청 많더라. 다들 바이올린 들고 사진 찍고 있었음
-바이올린 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사진 찍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영화객도 찍었지. 돈 주고ㅎㅎ
“거기까지 갔는데 안 찍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라도 찍음…… 가고 싶음…….
-바이올린 배우는 애들이랑 부모님도 있더라. 뭔가 기 받는 건가?
-외국에도 그런 게 있어요?
-주술 같은 건 있지 않나?
“그럼 벽에 겁니다.”
영화객은 액자를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두었다. 3개씩 4열로 나란히 놓여,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티켓들이 너무 눈부셔 영화객이 헤죽 웃었다.
[너튜버 영화객, 12개국 12달, 수집 완료!]
[너튜버 엽옆방, 전국 투어 완료! 총 17개의 티켓!]
라는 기사가 바로 업로드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흐뭇한 얼굴로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던 영화객이 입을 열었다.
“근데 12번 넘게 오버 더 레인보우를 보면서 느낀 건데 말입니다.”
-뭔데?
-이번엔 무슨 폭탄 발언?
-투어의 시작도 영화객이었음ㅋ
-ㅇㅇ 이러다가 바로 야방(야외방송이라는 뜻ㅋ)시작ㅋㅋ
“다른 곡이긴 한데,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의 바이올린 연주와 8주차의 바이올린 연주의 분위기가 다르지 않나요?”
-다른 곡이니까, 다른 거 아님?
-그러게.
“아뇨. 뭐랄까, 곡이 바뀌어서 분위기가 바뀐 게 아니라, 연주자가 바뀌어서 완전히 바뀐 느낌이랄까…….”
-무슨 개똥 같은 소리?
-그러게. 해외여행 갔다 와서 많이 피곤한 듯
-영화객 님 푹 쉬어요.
시청자들의 댓글에 영화객이 볼을 긁적였다. 영화라면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음악의 ‘ㅇ’도 모르는 탓인지, 더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그런가? 그럼 이만 방송 끝내겠습니다. 아마 큰일이 없는 이상 이틀 뒤에 방송 켤 예정입니다.”
-ㅇㅇ 영바(영화객 바이라는 뜻)
-네. 기다릴게요.
-꼭 이렇게 플래그 세우면 큰일 나던데(불길)
“뭐, 티켓 모으는 거 말고 큰일이 생기겠습니까?”
영화객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큰일이 터졌다.
채널 [RAINBOW]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무대에 오른 서준이 촬영하기 전,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을 연주하는 모습이었다.
-다시 들어도 좋네.
-개봉한 지 삼 주 지나니까, 마케팅하려고 메이킹필름 푸네……. 더 풀어주세요! 더! 더!
-근데? 8주차랑 분위기가 좀 다른데?
=??? 그러네? 옷 때문에 그런가?
=눈감고 들어도 다른데? 많이.
-영화객 님이 그랬는데…… 다르다고…… 진짜였어?!
=영화객? 너튜버?
=ㅇㅇ뭔가 다르다고 했는데, 뭐가 다른지 설명은 못함. 그래도 영화객님이라면 금방 알아낼 듯.
=그럼 방송 봐야지. 몇 시에 방송함?
=내일까지 쉰다고 하셨는데ㅎㅎ큰일이 생겼으니 좀 이따 할걸?
[제목 : 진짜 큰일이 터져 버려서…….]
“……합니다. 방송.”
피곤에 찌든 영화객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자, 안타까움 반, 장난 반 댓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하!(영화객 하이라는 뜻)
-플래그는 그렇게 꽂는 게 아니야.
-평소에 잘만 끝내다가 어쩌다…….
-ㅋㅋ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그러게요. 앞으로는 입조심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원인 알아냄?
-ㅇㅇㅇ 뭐 땜시 다른 거임?
“어제오늘 생각해 보고 제 동생한테도 물어봤는데……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와중에도…… 대. 단.
-음악 한다던 여동생이요?
-피아노 선생님!
-그래서 원인이?!
“일단 이걸 먼저 보시죠.”
영화객이 버스킹 영상을 틀었다. 영화객이 예전에 편집해 놓은 1주차부터 7주차까지의 합본이었다. 모든 영상이 끝나고 오늘 올라온 영상을 틀었다.
-……어라?
-……???
“이제 아시겠죠? 오늘 업로드된 영상이, 아마 원래 8주차 버스킹 때, 이서준 배우가 하려고 했던 연주였을 겁니다. 영상을 보면 아시겠지만, 무대 위에 서 있는 소년이 ‘그레이’로 보이는 반면에 8주차는 ‘이서준’으로 보이죠?”
-그러네?
-와. 연기 온오프 차이가 엄청나네.
-신기함. 별로 바뀐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마 8주차는 이서준이 연주했다는 설정이고, 오늘 업로드된 영상은 ‘그레이’가 연주했다는 설정일 겁니다. 연주자가 다르니, 연주도 다를 수밖에 없죠.”
-……그걸 알아챈 영화객이 무섭다.
-그런 연기를 한 이서준도 대단.
-근데 이서준은 왜 갑자기 8주차 연기를 바꾼 거예요?
-그러게. 이서준이 허술하게 연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
-ㅇㅇ 어리긴 해도 연기 천재니까 의도가 있을 듯.
“그것도 어제 찾아봤습니다.”
-도대체 뭐하러? 쉰다고 하지 않았음?
-영화객 님ㅋㅋ 이런 거 궁금해서 못 참으심ㅋㅋ 꼭 답을 찾아야 함ㅋㅋ
-내가 이래서 영화객 님 라이브를 본다! 물어보면 뭐든지 대답해 줌!
-제 애인은 언제 생길까요?
-영화객 : 그건 신만 아실 것 같습니다.
-ㅋㅋㅋ
“일단 제가 주목한 건, 8주차 영상의 편집입니다. 7주차까지는 이서준 배우가 인사하는 것부터 바이올린을 챙겨 자리를 떠나는 모습까지 다 찍혀 있지만, 8주차만 연주하는 모습만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오. 오. 추리 모드!
-난 명탐정! 할머니의 이름을 걸고!
“그래서 SNS를 뒤졌죠. #악마적재능이라는 게시글을 읽다가 발견했습니다.”
영화객이 두 개의 SNS 글을 화면에 띄었다.
채널 [RAINBOW]에 8주차 영상이 올라오고 바이올린 소년이 서준 리였다는 사실에 묻혀버린 SNS 글이었다.
[첫 연주는 나쁜 쪽으로 충격적이었어. 저번 주까지 잘하다가 오늘은 왜 그랬던 걸까? 그래도 마지막 연주가 좋은 쪽으로 충격적이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 아이 선생님의 멱살을 잡을 뻔했어. ;)]
#악마적재능 #바이올린소년 #선생님이누구야? #다행인줄알아!
[오늘 정말 감동적이었어. 음대 학생들도 착했지만, 바이올린 소년의 연주가 진짜 대단했어. 단순하면서도 듣기만 해도 행복한 음악이었는데. 아무도 곡의 제목을 모르더라. 난 지금 너튜브 업로드만 기다리고 있어. 레인보우 님은 꼭 찍었길 바라.]
#악마적재능 #바이올린소년 #버스킹8주차 #레인보우님만믿어요!
-첫번째 연주? 나쁜 쪽? 선생님?
-이 싸한 느낌…… 스왈로우??
“네. 아마 첫 번째 연주에서 ‘그레이’를 연기하던 이서준 배우가 ‘스왈로우에게 배운 그레이의 연주’를 연기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 ‘착한 학생들’이라는 표현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이 도왔다는 걸 알 수 있고…….”
영화객의 말은 빨라졌고 댓글은 느려졌다. 하지만 시청자 수는 계속 늘어났다.
시청자 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객은 화면에 사진을 띄었다. 1주차부터 8주차까지 이서준이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시면 1주차부터 7주차까지 이서준 배우보다 작던 바이올린이 8주차에서 갑자기 커진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착한 음대 학생들’이 도움을 준 거겠죠.”
-……!
-오!
“그게 아마도 이서준 배우가 그레이의 연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연주로 고마움을 연주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진짜야, 서준아?”
오랜만에 서준의 집에 모인 아이들이 영화객 채널을 켜놓은 텔레비전을 바라보다 옆에 앉은 서준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친구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안다호에게서 온 문자에 영화객의 라이브를 켜게 된 것이었다.
“응. 좀 이따가 영상이 뜬다고 했는데 벌써 알아낸 사람이 있었네.”
“어떤 영상인지 궁금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한국 시간으로 6시에 올린다고 했으니까. 아 참, 저녁 먹고 갈래? 엄마가 피자 시켜준대.”
“응! 응! 먹고 갈래!”
“나도!”
맛있는 피자를 먹을 생각에 서준과 아이들이 재잘대는 사이 영화객의 방송은 이어졌다.
“물론 제 추측입니다만…….”
-영화객 님. 레인보우에 영상 떴어요!
“……이것부터 보고 오죠.”
-ㅋㅋㅋㅋ
채널 [RAINBOW]에 두번째 영상이 업로드됐다.
서준과 아이들도, 영화객과 시청자들도, 채널 [RAINBOW]를 구독한 전 세계 사람들도 영상을 보았다.
1-7주차 영상처럼 인사를 하는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그레이였다. 엉망진창의 바이올린 연주가 들리고, 남자가 아이를 불렀다.
남자가 자세를 고쳐주고, 다른 사람들도 거들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메고 있던 여자가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딱 알맞은 바이올린으로 ‘서준 리’는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서준 리 : 8주차 버스킹 바로 전날에 ‘스왈로우 선생님께 배운 연주’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촬영했거든요. 그레이의 연기를 이어서 한다는 생각에 실수를 해버렸어요.]
새까만 정장을 입은 영상 속 이서준이 웃었다. 슈퍼스타처럼 반짝이는 아우라가 너무나도 이서준다워, 그레이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서준 리 : 근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 했어요.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생각해 주는 그분들에게 너무 고마웠어요. 마지막 버스킹이기도 했고, 서준 리로서 감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정체를 밝히는 건 안 되는 일이라…… 그래서 서준 리로서 연주했어요.]
-영화객 추리 맞음 ㅎㄷㄷ
-이제 SNS도 이해가 감.
-ㅇㅇ 그 나쁜 선생님이 스왈로우였구나. 7주차까지는 레베카였고.
-이서준도 대단함. 연주 종류가 몇 가지임?
-이서준 버전, 그레이 버스킹 버전, 그레이 무대 버전…… 와…….
-게다가 연주 일부러 못하는 버전도 있음.
-역시 연기 천재…….
채널 [RAINBOW]에서 풀린 이야기 덕분에 잠시 주춤했던 오버 더 레인보우의 관객수가 다시 늘어났다. 그리고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이 차트 1위로 올라갔다.
-오버 더 레인보우도 좋긴 좋은데……. 그 절망 파트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ㅋㅋ 가볍게 듣긴 힘듬.
-ㅇㅇ 가볍게 듣기엔 그레이곡이 좋지.
-그래도 오버 더 레인보우는 카타르시스가 짱이라ㅋㅋ 넋 놓고 듣기 짱임ㅋㅋ
-카페에서 나오면 절망 부분부터 아무도 이야기 안 함ㅋㅋ 가만히 듣기만 함ㅋ
영상과 기사를 보며 뿌듯한 얼굴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던 최유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국에 있는 동생이었다. 유학 온 뒤로 부모님은 때때로 연락했지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동생이라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 같아, 최유성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이거 형이지?
“뭐?”
-이서준한테 바이올린 가르치는 사람! 버스킹 때 나온 동양인! 형이지?!
“어…… 난데…….”
-그것 봐! 형이라니까! 엄마아빠가 형 아니래! 아무리 봐도 형인데! 형, 형! 이서준 봤어?! 사인받았어!?
전화기 건너가 시끌벅적했다. 큰일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피식 웃은 최유성은 서준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모든 버스킹을 봤다는 이야기부터, 연주회 장면을 촬영했던 날, 나탈리와 함께 이서준에게 사인을 받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는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전화 건너 가족들까지 신나 하는 게 느껴졌다.
-이거 친구한테 이야기해도 돼? 영화도 개봉했고, 뭐 비밀 계약서 같은 거 썼어?
“괜찮아. 영상 올리기 전에만 말 안 하면 된댔어.”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최유성이 미소를 지었다. 이서준의 사인을 받던 날, 어쩌다 보니 벤자민 모튼 교수님과 제이슨 무어와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정말로 행복한 하루였다.
그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족에게 전해지고, 가족들이 지인에게 전했다.
[영상 속 동양인, 한국인 유학생으로 밝혀져!]
[한국인 유학생, 이서준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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