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122화 (122/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22화

삐삐-

알람 소리가 들린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여자아이가 얼른 알람을 껐다.

“레베카! 얼른 일어나렴!”

“일어났어요!”

[음악을 하는 데 필요한 건 뭘까?]

아침을 먹으며 레베카는 생각했다. 평화로운 보통과 같은 나날. 신문을 보면서도 휴대폰으로 일하고 있는 아빠, 누군가와 전화 통화하는 엄마.

[재능? 노력?]

“오늘 새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이 오시니까 빠지지 말고. 유명한 분의 제자니까 잘 배워야 해. 레슨 한 번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아니?”

“네에-.”

[아니, 돈이다.]

지루한 투의 내레이션이 흘렀다.

여자아이 레베카와 친구 조지는 공원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우울함이 물씬 풍기는, 알록달록한 공원에서 홀로 흑백인 아이.

저게 이서준이라고? 알고 있어도 눈치채는 데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우울해 보이는 아이는 전혀 이서준 같지 않았다. 성녕대군의 모습도, 진 나트라의 모습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그레이, 그 자체였다.

레베카, 조지와 함께 놀면서 점점 밝아지는 그레이의 모습이 비쳤다.

꽃처럼 밝아지는 그레이의 얼굴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이던 아이의 표정이 색색으로 물드는 모습에 보는 사람마저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힐링물인가 봐. 꺄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며 관객들은 찝찝했던 내레이션을 금세 잊었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실력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에 뿌듯해졌다. 벌써 돈에 대해 걱정하는 그레이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엄마가 찾아준 스왈로우 선생님과 함께 지내는 그레이의 모습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같이 책을 읽고 바이올리니스트의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고 감상을 나누었다.

레슨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복습하며 레슨 날을 기다리는 그레이의 모습이, 레슨이 있는 날이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다리 옆 아파트로 달려가는 그레이의 모습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주 예뻤다.

그 이상적인 스승과 제자의 모습에, 다들 ‘좋은 선생님이구나, 그레이가 좋은 선생님을 얻었어’라고 생각하며 버스킹 8주차의 모습처럼 더 날아오를 그레이의 모습을 기대했다.

“나, 선생님이 생겼어.”

쑥스러운 듯 말하는 그레이의 말에 레베카와 조지가 반색했다. 열심히 선생님을 칭찬하는 그레이의 모습에 다들 엄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레이가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레베카의 환한 웃음이 굳어지는 것이 비쳤다. 그 모습에 관객들은 의아할 뿐이었다. 왜? 괜찮은 자세가 아닌가?

곧 원인이 밝혀졌다. 엉망진창의 연주가 스피커를 울렸다. 너무 놀라서 입으로 가던 팝콘을 떨군 관객과 자리에서 일어설 뻔한 관객들도 있었다. 아니, 왜 저래!?

레베카에게 배웠던 사계의 봄이, 어설펐지만 나아지던 봄이…… 엉망이 되었다.

레베카가 소리쳤다. 그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회상 장면이 나타났다.

행복한 레슨 속 숨겨진 스왈로우의 이면. 바이올린의 ‘ㅂ’도 모르는 사기꾼이 거기에 있었다.

그 소름 끼치는 반전에 관객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 선생님, 진짜 바이올리니스트 맞아!?”

그레이의 절망한 얼굴과 함께, 관객들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좋은 사람 아니었어!?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먹는 것도 잊은 관객들은 영화에 빠져들었다.

레베카와 조지는 그레이와 함께 스왈로우를 찾아가기로 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가느다란 희망을 잡은 세 아이가 다음 날, 다운록으로 향했다. 다운록에 아이들끼리 보낼 수 없다는 부모의 말에 조지의 형이 함께 가기로 했다. 다운록은 그런 동네였다.

비가 내리고 진실이 밝혀졌다. 명치가 쓰라려, 관객들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어두운 길로 걸어가는 그레이의 뒷모습에 눈물이 나왔다. 그레이와 엄마가 펑펑 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레베카와 조지가 자신의 방에서 우는 모습이 비쳤다. 이불을 뒤집어쓴 레베카가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음악을 하는 데 필요한 게 뭐냐고?]

처음, 별생각 없이 가벼운 말투였던 것과는 달리 진심과 처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 대사에 관객들은 몇 주 내내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내레이션을 떠올렸다.

[재능? 노력?]

꽃처럼 환하게 웃는 그레이가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레베카가 눈물을 흘렸다.

[아니, 돈이야!]

[돈이 있었다면 그레이에게 맞는 바이올린도 살 수 있었고! 그 사기꾼 말고 다른 좋은 선생님을 구할 수 있었어! 돈, 돈이 있었다면!]

외로이, 홀로 빗속으로 사라지는 그레이의 모습이 떠올라, 레베카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레이가 울 일이 없었어…….]

흑, 흑. 관객석에서도 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누군가는 그레이의 처지가 불쌍해서 울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돈 때문에 자신의 꿈을 잊고 살아야 했던 기억이 떠올라 울었을 터였다.

이곳에도 많은 그레이가 있겠지. 이미연도 박성아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관객들이 그레이의 감정에 빠진 상황에서도 영화 속 시간은 계속 흘렀다.

관객들은 방문 앞에 놓인 오선지와 바이올린에 한 번 더 울었고, 그런 절망 속에서도 음악을 놓지 못하며 천재성을 발휘하는 그레이의 모습에 말을 잃었다.

미친 듯이 작곡하던 그레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이 가득한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틀 후에! 공원에서!’

이틀! 그레이가 문을 나섰다. 달렸다. 공원을 향해서 달렸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어.’

그날로부터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이틀 뒤에 만나자던 친구들이 없을까 봐, 자신이 나오지 않아 실망했을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그레이는 달렸다. 착한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끝나기는 싫었다.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매일 만나던 곳으로 향했다.

빠르게 달리던 그레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천천히 멈춰 섰다.

오버 더 레인보우.

무지개 끝에 뭐가 있을까?

“그레이!”

“너 늦었어!”

활짝 웃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너무 행복해서 그레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며칠 내내 울었는데도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그레이의 울음에 레베카와 조지도 울기 시작했다.

“이제 안 나올 줄 알았어.”

“네가 오지 않아서 엄청 무서웠어…….”

“……늦어서 미안해.”

한바탕 울고 나니 세 아이의 눈이 퉁퉁 부었다. 그 모습이 웃겨 아이들은 울었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하고 씩씩하게. 그동안의 슬픔을 모조리 날려버리듯 웃었다.

울고 웃고. 기운이 빠진 아이들은 조지가 가져온 과자를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아, 행복하다. 그레이가 웃었다. 행복해져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다시 실패하고 좌절할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모두가 응원해 주고 있었다.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

“응?”

“나 다시 바이올린 가르쳐 주지 않을래?”

그레이의 말에 레베카와 조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정말?”

“응. 다시 배우고 싶어. 엉망이 됐지만…… 다시 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넌 천재라서 금방 제대로 배울 거야!”

레베카는 환하게 웃었지만 조지는 냉정하게 말했다.

“레베카가 가르칠 만한 것도 금방 떨어질 거야.”

그 목소리와 빨간 눈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진지함에 레베카도 그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겪었던 일이었다.

“역시 선생님이 필요해.”

“……응.”

선생님이라는 소리에 그레이가 몸을 움찔 떨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해.”

돈. 아이들이 구하기 힘들고 어른들도 가지기 힘든, 그리고 모든 일의 원인. 세 아이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래서 찾아봤는데 버스킹, 어떻게 생각해?”

“버스킹? 버스킹으로는 그렇게 많이 못 벌 텐데?”

“버스킹만 하는 게 아니라, 버스킹하는 장면을 너튜브에 올리는 거야.”

너튜브.

레베카와 그레이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너튜브에 다른 영상도 많은데 그레이의 연주를 보려고 할까? 엄청 빨리 배우긴 하지만 지금은 다른 영상의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엄청 잘하는 건 아니잖아.”

“너튜브 영상은 다른 일을 위한 거야.”

“다른 일?”

조지의 눈이 반짝였다. 가족 여행을 가서도 공부했고, 그레이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열심히 알아보았다.

“크라우드 펀딩.”

“……그게 뭐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과 단체에 후원과 기부, 투자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레이의 이야기를 올리고 후원을 받는 거지.”

조지의 말에 레베카와 그레이가 눈을 반짝였다. 후원.

“그뿐만이 아니라, 너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이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하고 알리는 거야. 막연하게 후원을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영상으로 보여주면 믿음이 가서 더 많은 사람이 후원할 수도 있어.”

아이들이 귀를 기울이는 듯하자 신이 난 조지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후원이 그렇게 잘되지는 않을 거야. 그레이보다 힘든 사연은 많으니까. 너튜브 영상은 플랜 B야. 수익창출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불확실하다. 어쩌면 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레베카와 조지가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어때? 그레이. 크라우드 펀딩이면 후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네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질 수도 있어.”

조지가 조곤조곤 인터넷으로 알아본 장단점을 알려주었다. 그레이가 어떤 결정을 하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강하게 빛나는 친구들의 눈에 그레이가 환하게 웃었다.

“하고 싶어. 해보자, 우리.”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 그레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후, 아이들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와 너튜브에 올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몹쓸 버릇을 전부 버리고 레베카에게 다시 처음부터 배운 그레이는 눈부신 재능으로 전보다 빨리 몸에 익혔다.

레베카는 자신의 바이올린 선생님께 연신 질문을 던졌고 대충대충 들었던 수업도 열심히 참가했다. 조지도 좀 더 그레이를 알릴 수단을 조사했다.

“오늘이 첫 공연이지?”

그렇게 버스킹 첫 공연이 결정되었다. 공원 관리인에게 물어 버스킹이 가능한 자리를 찾았다.

사람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것은 처음인 그레이가 긴장한 얼굴로 악보를 되뇌었다.

버스킹에는 엄마와 조지의 가족, 레베카의 가족이 모두 모였다.

첫 공연의 곡은 비발디 사계의 봄이었다.

따뜻하고 활기찬, 그런 봄을 맞이하기 바라며. 어설프지만 아름다운 그레이의 바이올린에 그동안의 사연을 아는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 후, 세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편집한 영상이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업로드되었고, 댓글이 달렸다.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도움이 되길 바랄게!

-일단 바이올린부터 사야 할 것 같다.

-적긴 하지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

휴대폰으로 보고 있던 고등학생, 엄마와 함께 보던 어린아이, 병원 컴퓨터로 영상을 본 환자, 그리고 그레이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윗집 아저씨, 아랫집 형. 모두 자신의 돈을 후원해 주었다.

점점 쌓여가는 후원금과 댓글에, 그레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지. 후원한 사람들 기록 볼 수 있어?”

“응. 제품 펀딩 같은 경우에는 금액을 채우면 만들어진 제품을 고객들에게 보내기도 하니까.”

“그럼…….”

그레이가 바이올린을 켤 때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분들을 초대하면 어떨까?”

“……초대?”

조지와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바이올린을 계속하다 보면, 나도 연주회를 열지도 모르잖아.”

하루하루를 살던 그레이가 어느새 먼 미래를 꿈꾸게 됐다. 연주회. 그 말에 레베카와 조지가 활짝 웃었다.

“후원해 준 분들을 초대하고 싶어. 전부 초대해서 내 연주를 들려주고 싶어.”

“멋지다! 좋아. 우리 하자!”

“전부라면 언제가 될지 모르겠는데?”

조지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들어가 후원자들의 기록을 살폈다. 상세한 주소는 뜨지 않았지만 대충 나라와 사는 도시의 이름이 떴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 호주, 한국…… 전부 초대하려면 월드 투어가 될 텐데?”

잠시 훑어본 나라만 해도 열 개. 너무 큰 꿈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와 조지, 레베카는 상기된 얼굴로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이렇게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그레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고 싶어. 꼭.”

그레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커다란 목표가 세워졌다. 아이들은 전보다 더 열심히 영상을 찍었다.

학교도 자신의 생활도 포기하지 않고 그레이와 함께 걸어갔다. 그렇게 계속된 크라우딩 펀딩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좋은 선생님의 레슨을 듣기에는 모자랐지만 적당한 바이올린을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다음 버스킹 때는 이거 해봐도 돼?”

“뭔데?”

“내가 작곡한 곡.”

그레이의 말에 레베카도 조지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좋지! 다들 깜짝 놀랄 거야!”

“에헤헤헤.”

조지는 재빨리 움직였다. 친구의 첫 자작곡 공연! 여기보다 더 넓고 좋은 곳, 많은 관객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연주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레베카는 그레이와 함께 악보를 수정해 나갔다. 그레이의 질문에 레베카가 몇 개의 제안을 하면 그 중 그레이가 답을 고르는 방법이었다.

그레이보다 들었던 곡이 많은 레베카인 만큼 좀 더 정돈된 느낌으로 곡이 수정되었다.

조지가 준비한 공연장은 공원에서 가장 넓은 곳이었다. 사람도 많았고 장소도 넓었다.

긴장한 그레이가 연주할 장소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번 만난 공원 관리인과 친구들, 버스킹을 자주 보러 왔던 사람들.

그리고 그레이의 공연 소식에, 공원에는 잘 가지 않는 다운록의 사람들도 공원에 나타났다.

허름한 옷이지만 깨끗하고 단정했다. 그레이는 알고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 다운록의 사람 중에도 자신에게 후원해 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두근, 두근. 기분 좋은 심장 박동이 들렸다.

너무 행복했다.

그레이는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활을 들었다.

바이올린의 현을 타고 활이 내려왔다.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그레이가 겪었던 일들이 바이올린을 타고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다.

친구들을 만나 기쁘고 바이올린을 배워 즐거웠다. 선생님을 만나 행복했고 선생님의 거짓말에 절망했다. 빠져나올 수 없었던 절망 끝에 무지개가 있었고, 그 무지개 건너에 지금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의 이야기를 아는 관객들을 가시처럼 박혀오는 그레이의 감정과 선율에 몸을 떨었다.

행복이 너무 날것이라 같이 행복했고, 절망이 너무 생생해 같이 절망했다.

그리고 힘들게 절망 안의 가느다란 희망을 잡아냈다. 결국, 행복해졌다. 찬란하게 빛날 것 같았던 선율은, 관객들의 기대와 달리 터지지 않고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렇게 끝인가, 생각했을 때, 화면이 바뀌었다.

잦아드는 선율을 따라 그레이를 스쳐 나무, 나뭇잎을 비추던 화면이 점점 올라가 태양을 비추었다.

태양 빛으로 밝게 빛나던 화면이 순식간에 조명으로 바뀌었다.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꽉 찬 관객석을 비추던 카메라가 뒤로 돌아 한 사람을 비추었다.

새까만 턱시도를 입고 있는.

그레이였다.

[전부 초대해서 내 연주를 들려주고 싶어.]

그 어린 날의 다짐을 떠올리며 그레이는 활을 들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화면은 고정되어, 마치 영화관에서 독주회를 바로 앞에서 관람하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세련돼지고 차분해진, 그러나 생생한 그레이 특유의 생동감은 더 발전한 채로 오버 더 레인보우가 들려왔다.

훌륭한 연주에 영화관의 관객들은 넋을 놓고 공연을 보았다.

정말로 독주회인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오버 더 레인보우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내레이션도, 화면 변화도 없었다.

계속되던 연주가 끝내, 찬란함을 폭발시켰다.

행복.

기쁨.

찬사.

세상에 있는 온갖 행복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관객들에게 밀려들었다.

어느새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는 관객들도 있었다. 조금 전의 연주와 지금 연주의 차이만으로도 그레이가 얼마나 노력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레이를 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진정한 선생님을 만나고 더 좋은 바이올린을 사고. 노력하고, 꿈꾸고.

영상으로 보지 않아도, 이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다운록의 아이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무척이나 행복한 연주인데도, 찔끔 눈물이 났다. 이미연과 박성아가 훌쩍이며 눈가를 닦았다.

그렇게 계속 듣고 싶던 연주가 끝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음이 크게 공연장을 울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레이의 활이 멈추었다.

그레이가 꾸벅 인사를 하자 영상 속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며 박수를 보냈다.

그사이에도 영상은 배경음 하나 없이, 조용했다.

이원생중계로 어딘가에서 공연을 하는 그레이 바이니를 보는 것처럼, 영화관 관객들은 영화 속에 빠져들었다.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이 그레이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그사이에도 아무런 편집이 없었다. 그 무편집이 관객들에게 현실감을 가져다주었다.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그레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외모는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표정, 부드러운 미소가 그레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분이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레이가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벅찬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글자로만 표시되던 그레이 바이니에게 후원해 준 사람들이, 모두 실체를 가지고 그레이의 눈앞에 있었다.

엄마, 레베카, 조지, 윗집 아저씨, 아랫집 형, 스타필의 도서관 사서, 샌드위치 가게 아저씨, 엄마와 함께 후원해 준 어린아이, 입원 중 제 음악이 도움됐다고 댓글을 남긴 사람들.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레이가 조용히 관객석을 둘러보다가,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영화관 관객들이 그레이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화면 속 그레이가 웃었다.

“여러분의 후원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오랜 지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짝짝-!!

박수 소리가 들리고 무대 위로 커튼이 내려왔다. 박수 소리는 계속 울렸다. 영화관의 관객들도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얼마나 박수를 쳤을까, 상영관의 불이 켜지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곡 하나가 흘러나왔다.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

그레이의 감사와 고마움이 가득 담긴 바이올린 연주였다. 또 한 번 흘러나오는 연주에 감탄하며 관객들은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박수를 치던 이미연이 문득, 영화 시작 전 가방 속에 넣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3,000원짜리 기념품. 이미연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 속에서 티켓 봉투를 꺼냈다. 박성아가 그런 친구를 보았다.

이미연은 티켓 봉투를 열어 티켓을 꺼내 보았다. 유난히 반짝이는 황금빛 글자가 보였다.

[이미연 님. 당신의 오랜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바이올리니스트 : 그레이 바이니]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