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120화 (12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20화

문제집을 풀던 서준이 기지개를 활짝 켰다.

이틀 전, 오버 더 레인보우의 촬영이 끝났다. 어제는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었다. 며칠은 푹 쉬라고 했지만, 유난히 건강한 서준은 좀이 쑤셔서 이것저것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치 문제집을 다 풀고 나라 이모가 선물로 사 준 책을 읽고 있으려니.

“서준아.”

“네?”

다호 형이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음. 촬영이 끝난 건 맞지만, 대본을 보여주는 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며칠만 쉬면 안 될까요? 형?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준의 손은 자연스럽게 내밀어 진 대본을 받고 있었다. 헤헤. 어떤 대본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근데 생각보다 종이가 얇았다. 아주 많이. 시놉시스인가?

“뭐예요, 다호 형?”

“라이언 감독님이 보내신 거야.”

“쉐도우맨 3예요?”

쉐도우맨 2를 찍었던 날이 까마득했다. 벌써, 1년, 2년…… 4년이나 지났다.

드디어 찍나? 신이 난 서준이 팔랑, 종이 한 장을 넘겼다.

“쉐도우맨 3는 맞는데…….”

“쿠키네요.”

“어셈블 2에 넣으실 거래. 미국에 온 김에 찍으면 어떨까, 하시더라. 날짜는 아무 때나 상관없으시대.”

“후시 녹음하고 제이슨 독주회 갔다가 촬영가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할래?”

“네!”

“알았어.”

안다호는 라이언 감독과 킹즈에이전시에 연락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서준은 소파에 앉았다. 촬영도 안 하고 버스킹도 하지 않으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지루하다. 멍하니 앉아있던 서준이 휴대폰을 들었다.

[비밀서약서 써서 말은 못 하겠지만, 감동.]

#오버더레인보우#영화촬영#엑스트라출연후기

[근데, 버스킹이랑 똑같은데 완전히 다름.]

#오버더레인보우#첫곡도앨범으로#엑스트라출연후기

[그래서 개봉은 언제?]

#오버더레인보우#나도LA산다#선착순너무해#엑스트라출연후기적고싶다

[음악에 필요한 건, 재능, 노력, 아니, 돈.]

#오버더레인보우#광고대사#싸늘하다

일반인을 모아 촬영했던 연주회는 참석했던 사람들의 후기로 다른 사람들의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었다.

역시, 마린사의 자회사. 홍보스케일이 다르다니까. 서준이 SNS를 둘러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할로윈 축제 때 만난, 꼬마마녀 그레이스 월튼이었다.

>그레이스 : 노라 언니 책, 어제부터 팔기 시작했어! 거의 2년이나 걸리다니, 상상도 못 했어.

<잘됐네! 아참, 나 LA야!

>찰리 : 지금 준이 어딨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어?ㅋㅋ

>그레이스 : 그러게ㅋ 너 촬영 중이라고 인터넷이 시끌시끌한걸ㅋ

>찰리 : 책 제목이 뭐야? 프랑스에서도 살 수 있어?

>그레이스 : 그건 모르겠어. 미국부터 판대.

>찰리 : 재미있어?

>그레이스 : 엄청!

>그레이스 : 언니가 감상 부탁한대.

<알았어!

서준이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수육이 먹고 싶다는 나라의 말에 서은혜와 이민준이 손발을 걷어붙였다. 킹즈마켓에서 사온 배추와 양념 재료로 겉절이도 하고 된장을 잔뜩 넣어 수육도 삶고 있었다.

“맛있겠다.”

“그 말만 벌써 10번째야. 아직 10분은 더 삶아야 해.”

서은혜의 말에 나라는 겉절이를 집어 먹으며 수육 고기가 풍덩 빠진 냄비만 바라보았다. 서준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 서점 가도 돼?”

“서점? 사고 싶은 책이 있어?”

“응! 그레이스의 언니가 책을 썼대.”

서은혜는 재작년 할로윈 축제 때 만났던 여자아이와 가족들을 떠올리고는 활짝 웃었다.

“그래? 그럼 사서 읽어야지. 근데 아직 학생 아니야? 책을 쓰다니 대단하네.”

“내년에 대학생이 된대.”

“대단하네.”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나라도 부부도 감탄했다. 이민준이 고슬고슬한 쌀밥을 밥그릇에 푸며 입을 열었다.

“서준아. 서점에는 밥 먹고 가자.”

“응! 다호 형도 불러올까?”

“아직 수육 더 삶아야 하니까, 좀 이따가 불러. 일하느라 바쁜 것 같던데.”

“응. 알았어.”

서준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나라 이모가 겉절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말했다.

“맛있겠다.”

“11번째.”

서준과 이민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서준의 후시 녹음을 마지막으로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의 모든 촬영이 끝났다.

사라 로트 감독은 편집실에 틀어박혔고, 웨일 스튜디오는 촬영 완료 소식을 알렸다.

이서준의 영화 촬영이 끝났다는 소식에 한국이 들끓었다. 귀국할 서준을 반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서준이 귀국하기엔 아직 미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제이슨 연주를 듣는 건 거의 처음 아니야?”

서준의 말에 캐서린과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슨 때, 시험으로 보여주긴 했지만 그건 엄청 짧았으니까.”

“게다가 준이 너무 잘해서 제이슨이 보여줄 틈도 없었지.”

폴의 말에 서준과 캐서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제이슨 무어의 생애 첫 독주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LA의 가장 커다란 홀에 열리는 바이올린 독주회에 서준 일행은 가장 좋은 자리에 초대받았다. 며칠 만에 만나는 캐서린과 폴이 서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모자를 쓰지 않은 서준과 캐서린, 폴을 본 사람들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개봉하지도 않았는데 알아보는 걸 보니, 화제는 화제인가 보다.

하긴 일찍 매진됐다는 티켓을 용케 구해서, 여기까지 연주를 들으러 올 만큼 바이올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바이올린 영화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공연 시작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슈퍼 스타급인 벤자민 모튼의 제자. 제이슨 무어의 생애 첫 독주회였다.

유명 오케스트라들과 협연도 가슴 저릴 듯 멋졌지만 홀로 연주하는 바이올린도 무척 기대되었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제이슨 무어의 등장을 기다렸다.

“옷차림은 다른데, 꼭 그레이의 연주회 같다.”

“그러게. 사람도 많고 다들 기대하고 있어.”

폴과 캐서린의 말에 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격식과 예의를 차려 단정한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촬영 때처럼 시끄럽지도 않고 조용했다. 다른가 싶으면서도 앞으로의 연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빛은 똑같았다.

커튼이 열리고 새까만 연미복을 입은 제이슨 무어가 나타났다. 머리카락을 전부 넘기고 진지한 모습이 평소의 뚱한 얼굴과는 달라 보여 아이들은 소리를 죽여 킥킥 웃었다.

넓은 무대 위에 홀로선 제이슨 무어는 바이올린을 어깨 위에 올렸다. 서준에게 잠시 빌려주었던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저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알고 있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기대 서린 얼굴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관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의 기대 어린 눈빛에 제이슨 무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한때는 이 모든 게 부담감으로 느껴졌지만, 이제 기대가 되었다. 자신의 연주를 듣고 박수를 보내올 사람들의 찬사가, 환호성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심장 소리마저 들릴 침묵 속, 제이슨 무어의 팔이 움직였다.

[벤자민 모튼 작곡, 바이올린 연주곡, NO.1]

이번 제이슨 무어의 바이올린 독주회는 마지막 곡만 빼면 모두 벤자민 모튼의 곡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직 대가의 실력을 쌓기 전, 젊었던 벤자민 모튼 교수가 작곡했던 순수하면서도 강렬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서준의 손가락에 박힌 바이올린 무늬가 반짝였다. 바이올린 꿈 요정의 능력이 스며든 문양이었다.

제이슨 무어를 처음 봤을 때, 서준은 희미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건 꿈 요정이었다. 이 세상에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서준은 무대 위에서 빛나는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꿈 요정의 희미한 흔적이 제이슨 무어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었다.

꿈요정이 인정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의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그레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온몸을 울리는 선율과 감정. 그리고 그것을 매끄럽게 다듬은 벤자민 모튼의 가르침.

스승과 제자의 멋진 협주가 여기, 독주회에서 드러났다.

놀라울 정도로 멋진 연주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주회 내내 박수 갈채가 떠나질 않았다.

관객석에 자리한 마에스트로들과 음악가들이 눈을 빛냈고, 학생들은 선망의 눈으로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곡이네.”

“응. 제목도 안 적혀 있어.”

다들 그래서 더 기대 서린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땀을 닦고 올라온 제이슨 무어가 후우 한숨을 내쉬고는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턱을 괬다. 오른팔을 크게 움직였다.

* * *

“어땠어?”

“엄청 좋았어요!”

“진짜 멋졌어요!”

대기실에 들른 아이들이 제이슨 무어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제이슨 무어는 그동안의 부담감을 모두 이겨내고 멋지게 독주회를 마쳤다. 사람들의 기립박수 속 뿌듯한 얼굴의 제이슨 무어를 서준은 분명히 보았다.

“잘했어.”

“네. 감사합니다.”

벤자민 모튼의 칭찬에 제이슨 무어가 작게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스승, 벤자민 모튼을 닮았다. 처음 보는 그 표정에 아이들이 에헤헤 웃었다.

캐서린과 폴이 서준을 툭툭 쳤다. 제법 친해졌지만 역시 제이슨을 가장 편하게 대하는 건 서준이었다.

아이들의 신호를 받은 서준이 물었다.

“특히 마지막 곡이 좋았어요. 제이슨이 작곡한 거죠?”

“그래.”

마지막 곡의 이야기에 벤자민 모튼이 헛기침을 했다. 서준과 아이들이 알 정도로, 스승에 대한 감사와 찬사가 그대로 묻어나는 곡이었다.

제이슨 무어가 연주하는 내내 벤자민 모튼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역시 내 제자가 최고야.

벤자민 모튼이 다시 찔끔 나올 것 같은 눈물을 닦는 사이, 꽃다발을 잔뜩 품은 제이슨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네?”

“다음에 바이올린 배우고 싶으면 연락해라.”

“네! 그럴게요!”

엄청난 재능과 실력을 갖춘, 바이올린 선생님이 생겨버렸다.

제이슨과 벤자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서준과 아이들은 두 사람의 지인들이 대기실로 찾아오자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지막으로 대기실을 나서던 서준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말했다.

“별일 없어도 연락할게요! 괜찮죠?”

두 눈을 끔뻑거리던 제이슨 무어와 벤자민 모튼이 똑 닮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언제든지 괜찮단다.”

두 사람의 흔쾌한 대답에 서준이 씨익 웃었다.

* * *

어셈블 2의 쿠키영상, 그러니까 쉐도우맨 3의 예고영상을 찍으러 마린 스튜디오에 들른 서준과 안다호가 입을 쩌억 벌렸다.

라이언 윌 감독과 함께 걸어오고 있던, 할리우드의 명배우, 스왈린 애넘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저번 영화제 파티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잘 지냈니?”

“네! 안녕하세요. 스왈린!”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신나게 인사했다. 스왈린 애넘을 정말 좋아하는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어 라이언 윌과 스왈린 애넘이 미소를 지었다.

서준은 쉐도우맨에서 스왈린 애넘이 할 만한 역을 떠올리다가 한 캐릭터를 떠올렸다.

지구를 침공했던, 무시무시한 나트라의 왕.

“스왈린 애넘이 진의 아버지예요?”

“그래.”

“와!”

라이언 윌 감독의 대답에 서준의 눈이 반짝였다. 스왈린 애넘과 같은 작품에 나오게 되다니! 어렸을 때, 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공부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기뻐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기사 나갈 때까지 비밀인 건 알고 있지?”

“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라이언 감독의 말에 서준과 안다호가 입을 딱 다물었다.

스왈린 애넘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서준도 손을 뻗어 스왈린 애넘의 손을 꼭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잘 부탁한다. 아들.”

“네! 저도 잘 부탁해요!”

스왈린 애넘이 분장실로 향하는 걸 반짝이는 눈으로 끝까지 보던 서준이 라이언 윌 감독에게 물었다.

“진짜 스왈린 애넘이 쉐도우맨에 나와요?”

“그래. 계약서까지 다 썼다.”

“와. 저 진짜, 스왈린이랑 같은 작품 찍고 싶었는데! 아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가 스왈린이 나온 다큐멘터리예요.”

신나게 이야기하던 서준이 문득, 빈자리를 느꼈다. 아무리 둘러봐도 라이언 감독님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감독님. 조나단은 어디 갔어요? 안 보이네요?”

“걘 독립했어.”

“독립이요?”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내가 20년 동안 꿈꿔왔던 쉐도우맨을 영화로 만들고, 그게 시리즈화되니까, 자기도 뭔가 하고 싶어졌나 보더군. 일 년 전에 독립해서 독립영화를 만들고 있지.”

“그동안 연락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안했는데…… 영화 제목이 뭔데요?”

“아직 촬영 중이더군. 조나단이 날 따라다니기 시작한 게 쉐도우맨을 촬영하면서부터였으니 돈, 시간, 사람이 부족한 환경은 처음 겪는 걸 거야.”

“그렇구나.”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중학생, 조나단 윌. 아역 배우들의 울음에 지쳐 보이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런 조나단 윌이 자신의 삼촌처럼 영화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시는군. 준. 네 차례다.”

“네.”

분장을 마친 스왈린 애넘이 나타났다. 스왈린 애넘과 교대로 이번에는 서준이 분장실로 향했다.

세트장에서 진행되는 쿠키영상 촬영이었기 때문에 스태프도 배우도 많지 않았다.

서준이 분장을 끝내고 나타나자 라이언 윌 감독은 ‘액션’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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