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119화 (11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19화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러게.”

LA음대 바이올린과 학생들은 카페테리아에 모여 자신의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이틀 전, 바이올린 소년이 서준 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웨일 스튜디오는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에 대한 정보를 꺼내기 시작했다.

서준 리 이외에 학생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이름들이 있었다. 감수자로 참여한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였다.

“벤자민 교수님도 참가하셨다며?”

“몰랐어. 그래서 서프라이즈 강의를 안 하셨구나.”

벤자민 모튼은 LA 음대에서 이 주에 한 번씩 특강 형식으로 가르쳤는데, 가끔 시간이 있을 때는 예정된 강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학교에 들러 특별 강의를 하고는 했다. 일명 서프라이즈 강의로 그 덕분에 학생들은 강의가 없는 날에도 학교에 나오고는 했다.

“여름방학이라서 여행 가신 줄.”

“나도. 아니면 제이슨 무어의 독주회를 도와주나 생각했어.”

“아. 독주회 티켓 구했어?”

“아니. 장소도 LA에서 제일 큰 홀인데 초저녁에 매진됐나 봐.”

“역시, 제이슨 무어. 벤자민 교수님의 애제자에, 유명한 오케스트라에서 러브콜이 날아든다던데. 영상으로는 많이 봤는데 직접 듣고 싶다.”

“이번에도 역시 바이올린은 그거겠지?”

최유성의 말에 다들 눈을 빛냈다.

“벤자민 교수님이 현역 때 쓰시던 스트라디바리우스!”

“스승의 바이올린을 제자가 물려 쓴다니, 진짜 낭만적이지 않아?”

“난 과르네리보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좋더라.”

최유성과 학생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멀리서 나탈리가 뛰어왔다. 테이블 바로 앞에서 멈춘 나탈리는 숨이 찬 모양인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다들 의아한 얼굴로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브레드홀에서, 촬영한대…….”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나탈리는 짧게 본론을 말했다. 브레드홀이라면, LA 음대에서 가장 큰 홀이었다.

학부생들이 연주회를 열기도 했고 유명 오케스트라가 초대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촬영? 무슨 촬영?”

“……오버 더 레인보우!”

사람이 가득한 카페테리아를 경계하며 나탈리는 낮게 읊조렸다. 그 말에 벼락을 맞은 듯 최유성과 친구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나탈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 촬영한대. 브레드홀에서 촬영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서준 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것도 연주 장면이 나올 확률이 높겠지.”

“근데 촬영이랑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촬영 끝나고 가는 거 보자고?”

숨을 고른 나탈리가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구도서관 쪽이었다. 어쩐지, 그쪽으로 향하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탈리가 입을 열었다.

“구도서관 앞에서 관객 역 맡을 엑스트라를 모집하고 있어.”

“……?”

“난 하고 왔어. 선착순이래!”

나탈리의 말이 귀를 통해 뇌에 박히는 듯했다. 선착순! 최유성과 친구들이 벌떡 일어나 나탈리가 가리킨 곳으로 달려갔다.

* * *

“최대한 다양한 계층을 모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벌써 끝났다네요.”

“벌써요?”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서 오더랍니다.”

웨일 스튜디오 홍보팀 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LA 음대의 브레드홀 대기실. 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서준이 물었다.

“신청하신 분 전부 오실까요? 일이 바쁘거나 해서 못 오시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관객석이 화면에 비치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들었습니다. 티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안 되면 지나가던 학생을 구하면 되죠. 여긴 대학교니까요. 그럼, 준. 공연까지 푹 쉬세요.”

홍보팀 직원이 나가고 안다호가 서준에게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촬영이 아니라 연주회 같아요. 다호 형.”

“그러네. 긴장돼?”

“아뇨. 재미있을 것 같아요. 분야가 좀 다르지만, 저 관객석을 꽉 채울 정도의 많은 사람이 날 보러 온다는 거잖아요. 엄청 기대돼요.”

똑- 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안다호가 일어나 문을 조금 열어 방문객을 확인했다. 경호원도 있는데 일일이 확인하는 걸 보면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다호 형의 신경이 곤두선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넓던데.”

“제이슨!”

“멋진 공연이겠구나.”

“벤자민 교수님!”

방문객은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였다. 서준은 벌떡 일어나, 영화 촬영이 아니라 음악회를 관람하러 온 관객처럼 멀쑥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을 반겼다.

벤자민과 제이슨은 서준의 옷차림에 놀랐다. 머리카락 한 올도 남김없이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별로 입어보지도 않았을 새까만 턱시도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렇게 입으니 정말로 바이올리니스트 같구나.”

“잘 어울려요?”

“그래. 생각보다 훨씬.”

벤자민과 제이슨의 칭찬에 서준이 에헤헤 웃었다.

“바이올린은 이걸 연주할 거야?”

“네. 소리가 참 좋아요.”

제이슨 무어는 말없이 바이올린을 살폈다. 많은 돈을 주고, 좋은 바이올린을 구할 수 있어도, 그걸 연주하는 게 열한 살짜리 꼬마라면 빌려주는 사람도 주저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이게 사라 로트 감독과 웨일 스튜디오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바이올린이겠지.

“이건 어때?”

제이슨 무어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준과 안다호는 뭔가 싶어서 제이슨 무어가 가방을 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해서 평범한 가방인 줄 알았더니, 바이올린 케이스였다.

벤자민 모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가방에 들고 다니는 거니?”

“스승님이 너무 소중하게 들고 다녔던 겁니다. 그게 더 노려질 가능성이 큽니다.”

“네가 너무 심한 건 아니고?”

“경험자의 말입니다.”

언젠가 벤자민 모튼의 바이올린을 훔쳤던 꼬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들고 있어서 돈이라도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겨우 바이올린이었다. 그때 꼬마가 느꼈던 그 허탈함이란.

‘겨우라는 단어를 쓸 바이올린이 아니었지만.’

제이슨 무어가 가방을 열었다. 너무 쉽게 열리는 케이스에 벤자민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스승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이슨은 뚜껑을 활짝 열었다. 그 안에는 바이올린 하나와 활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서준과 안다호는 그 안에 얌전히 자리를 잡은 고동색의 바이올린을 바라보았다.

일반인인 두 사람의 눈에는 그저 비싸 보이는 바이올린일 뿐이었지만, 서준의 능력들은 요동쳤다.

바이올린 속에 담긴 무언가를 느낀 것이었다. 그에 서준도 이게 평범한 바이올린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제이슨 무어가 자랑하듯 입을 열었다. 뭣 모르던 좀도둑 꼬마는 상상도 못 할 금액의 바이올린이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다.”

“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삼대 명기 중 하나로 못해도 수십억은 할 것이다.

못해도 수십억……. 안다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안다호는 제이슨 무어가 들고 다니는 가방,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았다. 저렇게 달랑달랑 들고 다니는 모습에 소유자도 아닌 안다호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서준도 정이슬 선생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연주해 보고 싶은 바이올린. 무시무시한 가격 때문에 상상도 못 하겠다던 스트라디바리우스.

“엄청 비싸다던데!”

“나도 스승님한테서 받은 거야. 가격은 뭐, 대충 예상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래? 이걸로 연주해 볼래?”

“그래도 돼요?”

“그래.”

서준의 질문에 제이슨과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생 배우인 서준이 연주회를 열지는 않을 터. 하지만 두 사람은 서준과 그레이가 연주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선율이 궁금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내려다보는 서준의 눈이 반짝였다.

* * *

“근데…….”

배정된 자리에 앉은 최유성은 문득, 자신의 옷차림이 괜찮은가, 의문이 들었다.

“음악회는 보통 드레스코드가 정해져 있잖아. 게다가 의상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두는 영화 촬영인데, 이런 옷으로도 괜찮나?”

청바지에 티셔츠. 못 올 자리에 온 듯, 갑자기 불안해졌다. 나탈리가 최유성의 어깨를 쳤다.

“괜찮아. 정장 입은 사람은 별로 없는걸.”

나탈리의 말대로, 넓고 넓은 관객석에 정장을 입은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학생들만 모은 게 아닌 듯, 다양한 연령층이 눈에 띄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자주 가는 피자가게 주인 부부,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부부, 환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옷차림도 단정하긴 했지만, 색색으로 알록달록했다.

“바이올린 연주회보다는, 그냥 가볍게 볼 수 있는 공연 같은데.”

“웨일 스튜디오에서 알아서 하겠지. 우린 그냥 바이올린 연주만 감상하면 돼.”

“근데 영화보다 연주회를 먼저 보는 게 좀 그렇긴 하다. 비밀서약서도 적긴 했는데 술 먹고 불어버릴지도 몰라.”

“너라면 그럴 듯. 난 괜찮. 이 연주회 장면이 어떻게 쓰일지 더 궁금해.”

사람들이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져 있을 때, 촬영진도 바빠졌다. 사라 로트 감독이 카메라 속 배경을 확인하고, 여기저기 설치된 마이크 상태를 확인했다.

후시 녹음도 하겠지만 생생함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별일 하지도 않았는데 촬영 시간이 가까워졌다.

에밀리 조감독이 대기실에서 서준을 불러왔다.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는 초대석으로 향했고 안다호는 가방을 들고, 서준을 뒤따르며 서준의 손에 들린 고동색의 바이올린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껏 신이 난 서준이 사라 로트 감독의 앞으로 향했다.

“준. 준비됐어?”

“네!”

서준의 대답에 사라 로트 감독은 웃었다.

“저쪽이 초대석인데 캐서린과 폴도 왔어. 준의 부모님도 계시는데 보여?”

“아빠도 왔네?”

못 올 것 같다고 했는데, 다행히 올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 아빠는 꼭 데이트하는 것처럼 보였다.

벤자민 교수님도, 제이슨도. 어라? 그 뒷자리에는 버스킹 때, 바이올린을 빌려주었던 누나와 형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앞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힐긋힐긋 보고 있었다.

“좋아. 그럼 촬영 시작하자.”

“네!”

왜 저러나? 고민하다가,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서준은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커튼으로 가려진 무대 위에 홀로 선 서준은 후우, 숨을 내쉬었다.

이번 촬영으로 그레이의 삶은 끝난다. 2편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레이의 앞날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독주회에 서게 된 그레이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벅찰 것이고 행복할 것이었다.

서준은 ‘그레이’로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선)바이올린 꿈 요정의 기초수업이 발동됩니다.]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이 발동됩니다.]

[(선)엘프의 기초호흡이 발동됩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턱을 괴었다.

관객석이 조금 어두워지고, 커튼이 천천히 열렸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위를 비추고 새까만 정장을 입은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진 나트라! 서준 리!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독 아이들 쪽에서는 청룡님을 찾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거 괜찮은 건가?”

“그러게. 소리 다 들어가는 거 아니야?”

“어쩌려나.”

걱정 많은 관객들과는 달리 서준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활을 움직여 첫 음을 냈다.

이번엔 그레이를 연기하면서,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로 등록될 [꿈 요정, 고블린,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을 연주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연주하고 있는 그레이의 마음을 그대로 선율로 옮겨주었다.

부드러운 듯 생생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자, 관객석은 점점 조용해졌다.

그레이의 존재감은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가장 빛난다.

스포트라이트의 효과인지, 그레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인지 무대 위에 서 있는 그레이 바이니가 반짝반짝 빛났다.

가볍게 감은 눈, 유려한 연주, 몸을 울리는 선율.

어쩐지 그레이의 버스킹을 지켜봤던 사람들에게는 그레이가 훌쩍 커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짧게만 느껴졌던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레이는 다시 활을 들었다.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