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18화
“그레이. 이제 왔니? 아 참, 오늘 바이올린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
그레이는 엄마의 말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레이의 모습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조금 젖은 그레이를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창백한 아들의 얼굴에 엄마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니?”
“엄마…….”
“응?”
그레이는 엄마의 품에 안겼다. 충격적인 일들이 많았지만,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았던 그레이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속이 상했다. 마음이 아팠다. 처음으로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본받고 싶은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게 돼서 정말로, 정말로 좋았는데!
“스왈로우 선생님이 선생님이 아니었어…….”
엄마의 품속에서 그레이는 울먹였다. 말하다가도 저절로 나오는 울음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끅끅거리면서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엄마가 열심히 찾아줬는데…… 선생님이 아니었어…… 내 자세가 엉망이 됐대. 연주도…….
그걸 설명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그레이의 차갑던 몸이 따뜻해졌다.
엄마는 눈을 질끈 감고, 펑펑 우는 아들을 더욱 꼬옥 안았다.
“엄마가 미안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좀 비싸더라도 좋은 선생님을 알아봐 줘야 했는데…… .”
“아니야! 아니야…… 내가,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어차피…….
그레이는 생각했다.
어차피 바이올린으로는 돈을 벌 수도 없는걸.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였는걸. 그게, 그게 처음이라 조금 신이 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다운록의 아이인 그레이에게는 무리인 일이었다.
“미안해. 엄마.”
엄마 품에서 빠져나온 그레이가 눈물을 닦았다. 거칠고 낡은 소매에 눈가가 벌게졌다.
그레이가 씩씩하게, 그러나 무언가를 포기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바이올린을 만나 꽃같이 피었던 그레이가 결국 비바람에 져버렸다.
“경찰서 가면 돈 돌려받을 수 있대. 그걸로 이번 달 집세 내자.”
“……흑.”
그 말에 결국, 엄마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엄마 탓이라고 했으면, 차라리 다른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다고 했으면. 일찍 철이 들어 돈 걱정을 먼저 하게 된 아들의 모습에 엄마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엄마의 우는 모습에 그레이도 울지 않으려고 인상을 쓰다 참지 못하고 다시 엉엉 울었다.
“컷! OK!”
조용하던 촬영장이 컷 소리에 시끄러워졌다. 입을 막고 촬영을 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촬영이 끝나자 소리를 내며 흐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 *
슬픔에 빠진 그레이는 엄마가 일하러 나가고 홀로 빈집에 남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무늬가 꼭, 음표, 같았다. 그레이는 다섯 개의 까만 선을 그렸다.
이건 도, 이건 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레이의 머릿속으로 무언가의 선율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슬프고 절망적인 선율이었다. 마치, 지금의 그레이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의 왼손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치 바이올린의 현을 짚는 것 같은 손짓이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선율이 지나갔다. 폭발할 듯한 악상에, 그레이의 손가락이 빨라졌다.
그렇게 손만 움직이던 그레이가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이걸 전부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될까. 또 상처받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굳게 닫힌 것 같은 방문 앞에서 주저하며 서 있던 그레이의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이 아주 힘겹게, 간신히 방문에 닿았다. 아주 살짝 밀린 방문은 닫힌 적이 없다는 듯,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열렸다.
그리고 그레이는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쓰레기장에 버리고 온, 비에 젖은 오선지 더미와 담요로 가려두었던 레베카의 바이올린이 방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에 젖어 꾸깃꾸깃해진 오선지들을 펴고 말려서, 바이올린과 함께 방문 앞에 가지런히 놓아뒀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포기하지 말라는 엄마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레이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오선지와 펜으로 손을 옮겼다.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슬픔, 좌절, 절망.
그리고 그 순간순간들 사이, 새하얀 희망을 그려 넣었다.
그레이는 절망과 슬픔을 떠올리고 되새겼다. 그리고 손으로 옮겼다. 그렇게 오선지를 채워나가는 그레이의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오선지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괴로운데 작곡하는 건 너무 즐거웠다. 좀 더, 좀 더 쓰고 싶었다. 악보를 써 내려가는 그레이의 손이 빨라졌다.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눈이 촬영장 안에서 연기하고 있는 서준에게로 향했다. 서준은 거실 한복판에 엎드려 있었다. 그 자세로 미친 듯이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진짜…….”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진짜 천재 같네요.”
서준의 얼굴은 바닥을 향하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이는 손과 팔, 꿈틀대는 어깨와 옆에 쌓이는 오선지들만으로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곡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연기일 뿐인데도, 저곳에서 엄청난 명곡이 탄생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런 느낌으로 만들어진 곡은 어떤 느낌일까. 클래식에 관심도 없던 스태프들까지도 궁금하게 만들 정도의 박력이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감정을 양분으로 삼는다는데, 다들 이런 느낌일까요?”
“그럼 예술가들은 다…….”
미친 건가?
스태프들의 시선이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에게로 향했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는 연신 고개를 빼 들어 서준을 바라보았다. 벤자민 모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이니? 뭐라고 적고 있는지?”
“아뇨. 준의 등에 가려져서 안 보입니다.”
“저것도 자작곡이려나?”
“완전한 곡은 아니어도 바탕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저런 엄청난 연기를 하면서 뽑아내는 자작곡이라니, 어떤 곡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두 사람은 초조하게 촬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갸웃하는 에밀리 조감독에게서 오선지 더미를 받아 들었다.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가 말없이 오선지 더미를 훑어보았다.
“이건…… 스승님 곡이네요.”
“……그러게.”
“하긴, 아무리 준이라도 곡을 막 뽑아낼 수는 없겠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서준이 오선지에 그린 건, 벤자민 모튼이 작곡한 ‘오버 더 레인보우’였다.
오선지 더미를 보며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오버 더 레인보우의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장면은 두 개. 자잘한 신을 따지면 더 있지만 커다란 장면은 두 개가 남았다.
오늘은 서준이 ‘오버 더 레인보우’를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레디, 액션!”
오늘은 특별히 공원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빌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레이와 아이들을 알아보았다.
“오늘 공연하니?”
“네. 그레이가 작곡한 곡으로 공연해요!”
“작곡도 하는구나! 멋진걸.”
하나둘, 공원 잔디에 앉아 그레이의 공연을 기다렸다.
조지가 카메라 준비를 끝냈고 레베카가 화이팅을 외쳤다.
행복하다. 무난하고 평범했던 나날이 바이올린을 만나 기뻤고 절망이 가득했지만, 친구들이 있어 즐거웠다.
모여든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레이가 바이올린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졌다.
내 바이올린.
울컥, 가슴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조지가 말했다.
“그레이. 카메라 켤게. 다들 기다리고 있어.”
“응!”
그레이가 환하게 웃었다. 고인 눈물에 그레이의 까만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이 발동됩니다.]
[(선)엘프의 기초호흡이 발동됩니다.]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감독도,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도 반짝이는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바이올린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느 바이올린보다 빛났다.
활을 쥔 그레이의 오른팔이 천천히 내려왔다. 두 개의 현을 한꺼번에 누르던 처음과는 달리, 단 하나의 현을 누르며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그레이의 평범한 하루 같은 편안한 선율이 흐르고, 처음 친구들과 바이올린을 만났던 날 느낀 기쁨 같은 반짝이는 선율이 흘렀다.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벅찬 마음이 흘러나왔고 선생님을 만나면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오…….”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는 거칠지만 순수한, 그리고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그레이의 연주에 침음성을 흘렀다.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인 레베카인 만큼 ‘그레이’만의 연주를 하게 해달라는 감독의 주문에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는 그렇게 가르쳤다. 좀 더 날것 같은, 생동감 있는 연주.
강약조절도, 박자감도 오로지 그레이의 마음에 달린 연주. 연습실에서도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연주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준이라는 사람은 사라지고 그레이라는 아이만 남았다. 바이올린 속 어디에도 ‘서준 리’가 없었다.
‘7주차까지는 그레이의 연주였고, 8주차가 준의 연주였군.’
비교군이 있으니,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은 알 수 있었다. 레슨 때의 연주는 반은 서준이었고 반은 그레이였다.
‘아마 반쯤 연기에 몰입해서 연주했겠지. 그리고 100% 몰입한 연주가 이거고.’
소름이 돋았다.
연기를 모르는 만큼, 바이올린에 대해, 음악에 대해 잘 아는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는, 그들 앞에는 ‘서준 리’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레이 바이니’가 있음을 느꼈다.
바이올린 선율 속에 뚜렷한 그레이를 느끼면서, 이런 연기를 해내는 서준 리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주는 계속됐고, 바이올린을 듣던 모두의 마음이 처절할 정도로 무너져내렸다.
작곡가인 벤자민 모튼마저, 어떻게 이렇게 표현하나 싶을 정도로, 처참하고 참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선생님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레이의 새까맣게 탄 마음이 그대로 바이올린의 선율을 타고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런데 그 속에 가느다란,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한 친구들과 방문 앞에 오선지와 바이올린을 놔둔 엄마.
그레이는 그 가느다란 희망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빛으로 나아갔다. 느린 속도였지만 그레이는 걸어갔다. 친구들과 엄마의 손을 붙잡고.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마침내, 그레이는 행복을 만났다. 친구들과 다시 만난 날, 완성한 이 곡의 끝.
그레이는 마지막까지 힘차게 연주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이었다.
거친 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뜬다. 그리고 무지개 건너에 행복이 있었다.
Over The Rainbow.
바이올린의 활이 현을 스치고, 마지막 음이 공원을 울렸다. 누구도,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자연의 소리마저 바이올린 소리에 잡아먹힌 듯, 공원에 적막이 흘렀다. 스태프들, 엑스트라들 할 것 없이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OK! 컷!”
사라 로트 감독이 크게 외쳤다.
그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그레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이 곡의 모든 감정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울면서 웃으면서 그레이의 성장을 축하했다. 비록 영화 속 인물이었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크흥. 영화 대박 날 거예요.”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대박이에요.”
“이거 음원, 어디서 살 수 있어요?”
오늘만 엑스트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스태프들을 붙잡고 물었다.
그사이 서준은 안다호가 건네준 젖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 정도로 온 힘을 다한 연주였다. 그레이라면 있는 힘을 다해서 연주했을 테니, 서준도 그렇게 했다.
안다호가 주는 시원한 주스를 마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아직 바스트샷과 클로즈업샷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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