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16화
매주 일요일, 같은 시간.
공원 근처 가게에서 만난 웨일 스튜디오의 홍보팀 직원이 웃으면서 옷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네. 오늘은 잘 연주하면 되죠?”
“네. 멋지게 연주해 주세요.”
지금까지 서준은 차근차근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원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늘었고, 엄청난 성장을 보이는 아이가 있다는 말에 음대 교수들도 관심을 표했다. 다들 영상으로 보고 난 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아쉬워요. 엄청 재미있었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서준의 말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할리우드 스타인 서준 리에게는 몇 푼도 안 될 돈이었지만, 지금은 저금통까지 들고 다니면서 소중히 챙기는 모습이 예뻤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많이 벌어올게요!”
서준이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다.
* * *
최유성과 나탈리는 웃으면서 공원으로 향했다. 바이올린 전공자인 두 사람 모두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최유성이 소년에게 줄 과자를 사는 사이, 나탈리는 자신의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매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
“저번 주 연주도 좋았지?”
“응. 나쁜 버릇도 사라지는 것 같고.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이 그렇게 잘하는 사람은 아닌가 봐.”
“그래도…… 잘하더라.”
어색한 자세, 미스가 나는 연주. 그 안에서도 느껴지는 절절한 감정. 최유성과 나탈리는 소년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더 좋아졌겠지.”
기대 가득한 얼굴로 소년의 자리에 찾아간 최유성과 나탈리는 평소보다 조금 많은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소년이 이제 막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 주는 얼마나 좋아졌을까!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소년을 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끼이익-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첫 음을 내던 서준은 아차, 싶었다. 파란 고래 경호원들도, 촬영하고 있던 직원도, 많아진 사람들 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안다호도 놀라 서준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처럼 그레이를 연기하면서 연주를 했더니, 지금 촬영 중인 장면들, 그러니까 사기꾼 스왈로우에게서 배운 그레이의 엉망진창인 연주가 나와버리고 말았다.
서준은 고민했다. 여기서 바로 고칠까, 아니면 이 곡만 끝내고 고칠까.
‘어느 쪽도 이상할 텐데…… ’
서준이 고민하는 사이, 서준의 무의식은 계속해서 그레이의 연기를 이어나갔다.
엉망진창의 연주가 계속되었고 구경꾼들의 표정은 더 사나워졌다.
첫 만남 때보다 더 나빠진 자세, 손가락의 위치, 활을 든 팔의 높이. 서 있는 발의 위치까지.
“젠장. 저게 뭐야?”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무슨 사정이 있겠지. 우리가 상관할 게 아니야.”
나탈리의 말에 최유성이 숨을 몰아쉬었다. 맞는 말이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끼이익-끽-
소리가 울었다. 바이올린이 울고 있었다. 불협화음이 가득한, 도저히 연주라고 말할 수 없는 그 소리 안에 소년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바이올린이 좋아. 음악이 좋아. 더. 더. 연주하고 싶어. 잘하고 싶어. 더 배우고 싶어!
고민하는 순간에도 서준이 이어나갔던 그레이의 연기가 최유성의 마음을 강하게 때렸다.
“젠장.”
끼익 울리는 소리에 소년의 주위에 서 있던 관객들이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일요일마다 아이를 보면서 뿌듯함을 느끼던 구경꾼들도 아이의 영상을 보면서 응원하다가 오늘 처음 보러온 사람들도 모두 안타까워했다.
마른세수를 하던 최유성의 눈이 빛났다. 무슨 사정이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꼬마야!”
최유성의 목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참담한 표정으로 소년의 연주를 듣고 있던 학생들도 나탈리도 놀란 얼굴로 최유성을 바라보았다.
“……네?”
이어지던 바이올린 연주가 멈추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이 곡이 끝나면 바로 똑바로 연주해야지, 하고 막 결심했던 서준이 그레이의 연기를 계속하며 물었다.
“자세가 왜 그 모양이야?”
“어…… 틀렸어요?”
“그래. 팔꿈치를 그렇게 낮게 내리면 활이 제대로 못 움직이잖아.”
그 이후 최유성은 하나하나 틀린 자세를 짚어나갔다.
“발은 이쪽에 놓아야지. 허리는 펴고, 팔은 이쪽으로. 손가락은 저번 주가 더 좋았어.”
소년이 어, 어 하는 사이 최유성의 말에 따라 자세를 바꾸었다. 최유성의 모습에 같은 바이올린 학과의 학생들이 참견했다.
“아직 어리니까, 기초를 잘 배워야 해.”
“좀 더 어깨를 내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소년의 자세가 완성되었다. 최유성과 학생들이 뿌듯한 얼굴로 조금 멀어졌다.
“그 상태 그대로 연주해.”
“저번에 켰던 곡이 사계의 가을이었지?”
“좋아. 연주 틀린 건 나중에 봐줄게. 일단 연주해 봐.”
레퍼토리까지 기억하고 있는 팬들의 말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소년이 활을 들었다.
“잠깐만.”
낡고 작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려는 소년의 모습에 나탈리는 어깨에 메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건넸다.
엉거주춤 바이올린 케이스를 받은 소년의 모습에 나탈리가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 쓰던 거야. 아직 쓸 수 있어. 크기도 맞을 거야.”
“이런 게 있었어?”
최유성이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나탈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추억이나 떠올릴까 하고 들고 왔는데…… 지금은 나보다 애가 쓰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선물이야, 꼬마야.”
깜짝 놀란 소년이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려고 하자 최유성도 나탈리도 거절을 거절했다.
“연주해 봐. 우린 그거 들으러 왔어.”
“맞아.”
“……감사합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 소년도 바이올린을 받아 들었다. 나탈리의 말대로 소중하게 간직한 모양인지 케이스도 깔끔했고 안에 있는 바이올린도 금방이라도 켤 수 있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던 경호원들도 직원도 안다호도, 그리고 서준도 마음씨 좋은 학생들의 모습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서준은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서준은 그레이의 모습을 집어 던지고 진심을 담아 연주하기로 했다.
[(선)바이올린 꿈 요정의 기초 연습이 발동됩니다.]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이 발동됩니다.]
[(선)엘프의 기초호흡이 발동됩니다.]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은 평상시에 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다들 음악이랑 관련된 것 같으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이올린에 턱을 괸 서준이 온 힘을 다해 연주를 시작했다.
[꿈 요정, 고블린,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
소년이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바뀐 바이올린의 크기 때문에 자세를 봐주려던 최유성은 손을 멈칫했다.
“어라?”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자세였다. 마치, 무대 위에 올라간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아주 멋진. 눈부신.
어쩐지 소년이 서 있는 곳만 스포트라이트가 켜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
그것을 느낀 건 최유성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서 있던 학생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천재지만 수줍음 가득하던 그레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자신감 만땅인, 사방팔방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이서준이 거기에 서 있었다.
빛나는 것 같은 기다란 활이 아름답게 내려왔다. 소년의 연주가 귀를 통과해 심장에 꽂혔다.
감사함과 고마움, 그리고 즐거움을 가득 담은 소리가 울림통이라도 된 듯, 사람들의 몸을 울렸다.
누군가 어렸을 때 썼다던 평범한 바이올린인데 마치 명인이 만들었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울림처럼 무겁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조그마한 바이올린에서 나는 소리가 공원을 울렸다. 그 아름다운 연주에 사람들이 모였다. 모여 있던 사람도 뒤늦게 온 사람도 조용히 연주를 들었다.
조그마한 몸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뿜어나왔다. 소름이 끼쳤다.
호흡 하나에 누군가 영감을 얻고, 음 하나에 누군가 깨달음을 얻었다. 차원이 다른 음악을 듣는 것보다 좋은 공부는 없었다.
어디에서 찍어도 영화의 명장면이 될 것 같은 소년의 모습이었다. 다들 넋을 놓고 힘차게 연주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계속 이어질 것 같았던 곡의 마지막 음이 커다랗고 길게 울렸다. 연주가 끝나도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음악과 연이 없는 안다호와 직원, 경호원들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려 짐을 정리하는 서준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검은 모자를 꾹 눌러쓴 서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요일마다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렇게 존재감 넘치는 스타로서의 모습은 그들도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서준 리.
어째서 어린 나이에 할리우드 스타가 됐는지 알 것 같은 아우라였다.
바이올린을 조심히 케이스 안에 넣은 서준이 나탈리의 품에 케이스를 안겨주자, 그 옆에 있던 최유성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 잠깐 사이 파란 고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등을 보이는 소년이 보였다.
“너…… 누구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세 능력의 사용으로 감각이 곤두선 서준의 귀에 닿았다.
검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얼굴을 보인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발음이 좋아서 그런지, 목소리가 깨끗해서 그런지, 공원이 조용해서 그런지 유난히 서준의 대답이 또렷하게 들렸다.
“준이에요. 바이올린 감사했습니다.”
“아니, 잠깐만!”
잡을 새도 없이 준과 파란 고래들이 사라졌다. 허탈한 듯 최유성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최유성이 그렇게 말하자 다들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외쳤다.
“그 꼬마, 어디 갔어?!”
“잠깐만, 나 떠오르는 게 있어서!”
누군가는 가방 속 노트를 펼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누군가는 녹음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악기를 잡았다. 그렇게 자신만의 메모를 하고 있을 때, 나탈리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 곡 아는 사람?”
그 말에 떠들썩하던 공원이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해졌다. 다들 알고 있는 모든 곡을 떠올렸지만, 정답은 없었다.
“그럼…… 촬영한 사람?”
첫 연주가 너무 충격적(나쁜 쪽으로)이라 제대로 촬영하지도 못했다. 촬영하던 사람들은 최유성과 사람들이 아이의 자세를 고치는 동안 잠시 촬영을 멈추었다.
다들 입을 꾸욱 다물고 좌절했다. 나탈리와 최유성도 절망했다. 그 멋진 연주, 아름다운 곡을 촬영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아니, 진짜 한 명도 없어!?”
* * *
“찍었습니다!”
웨일 스튜디오의 홍보팀 직원이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직원의 모습에 옷을 갈아입은 서준이 나와 고개를 갸웃했다.
“뭘 찍어요?”
“준이 마지막에 연주한 멋진 곡이요! 다 찍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촬영용 카메라를 들고 간 게 신의 한 수였어요!”
“그런 카메라가 있었어요?”
“마지막이니까요. 어쩌면 TV 홍보용이나 메이킹 필름으로 쓰일지도 모르는데 잘하는 모습은 화질 좋은 카메라로 찍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어떤 카메라로 찍던지 상관없었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마지막 곡의 제목이 뭔가요?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직원의 물음에 경호원들도 안다호도 귀를 쫑긋 세웠다.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는 것 같은 곡이었다.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곡. 동화 같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곡이었다.
“제가 작곡한 곡이에요.”
“……네?”
“작년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대본에 작곡도 있길래 궁금해서 배웠어요. 며칠 전에 완성했는데, 괜찮죠?”
그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서준은 쑥스러운 듯 에헤헤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촬영 때, 작곡하는 장면을 찍을 때 생각났던 곡을 좀 더 손을 봐서 며칠 전에 완성했다.
‘그렇다고 한 달 걸렸다고 말하긴 그렇지?’
1년 정도 매달렸다고 해도 믿기 어려울 판에, 한 달이라니. 서준은 속으로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바이올린을 직원에게 건넸다.
집으로 가던 길, 머릿속으로 [꿈 요정, 고블린, 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곡 NO.1]을 떠올리며 손과 발을 까딱거리던 서준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쉬운 탄성을 뱉었다.
“아…….”
“왜? 무슨 일 있어?”
운전하던 안다호가 서준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오늘 한 푼도 못 벌었어요.”
“아. 다들 돈 줄 정신이 없었잖아.”
서준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안다호가 공원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했지만,
“오늘이 마지막 버스킹이었는데…….”
너무 아쉬운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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