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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113화 (11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13화

음대에 재학 중인 최유성과 나탈리는 산책 겸 가까운 공원으로 나왔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연주에 최유성과 나탈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버스킹이 많네.”

“음대 바로 옆이니까, 우리과 학생도 있고 다른 학과 학생도 있겠지.”

“음. 나탈리. 저거 봐.”

나탈리는 최유성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최유성이 가리키는 곳에는 어린 소년이 체구에 맞지 않은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다.

최유성과 나탈리는 조금 앞으로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소년이 입고 있는 옷도, 들고 있는 바이올린도 낡아 보였다.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평화로운 공원의 구석, 홀로 흑백의 색깔을 가진 소년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몇 곡 연주했는지 활짝 열린 바이올린 케이스에 벌써 몇 개의 동전과 지폐가 보였다.

“선불도 나쁘지 않지.”

최유성과 나탈리도 돈을 넣고 기다렸다. 소년이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소년의 활을 쥔 팔이 움직이자, 바이올린과인 최유성과 나탈리는 동시에 침음성을 삼켰다.

“자세가…….”

아주 어렸을 때, 두 사람의 모습처럼 어색한 손동작과 활을 잡은 모습이 어설펐다.

소년이 시작한 바이올린 연주도 그랬다. 활 질 한 번에 여러 음이 섞였다. 잘못된 자세가 소리를 소름 끼치게 바꾸었다.

‘그래도…….’

최유성과 나탈리는 그런 실수에도 끝까지 연주를 이어가는 소년의 모습에 조그마한 감동을 하였다. 초보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이 소린?”

시끄러운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욕설을 뱉으려다가 소년의 모습을 보고 혀만 차며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 그거야 그렇겠지. 물론 멀쩡한 정신으로 듣기 힘든 연주라는 건 동감이었다.

참기 힘든 연주를 들으면서도 최유성과 나탈리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처참한 연주였지만 끝까지 듣는 사람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린 소년은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박수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웃은 소년이 돈과 바이올린 케이스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낡은 옷과 창백하던 이미지가 최유성과 나탈리의 머릿속에 콕 박혔다. 소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최유성이 입을 열었다.

“저녁이나 잘 챙겨 먹으면 좋겠네.”

“그러게.”

“근데 저런 연주도 촬영하는 사람이 있구나.”

“뭐, 그것도 추억이지 않을까?”

“……웃음거리만 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최유성의 말에 나탈리가 한숨을 쉬었다.

* * *

서준은 경호원들과 안다호의 경호 속에 대기실로 쓰고 있는 가게로 향했다. 낡은 옷을 갈아입고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직원은 옷은 받았지만, 바이올린은 서준에게 다시 주었다.

“옷은 다음 주에 다른 옷으로 들고 올게요. 바이올린은 가져가서 연습해도 됩니다. 촬영 때 쓸 바이올린이랑 달라서 연주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요.”

“네! 아, 돈은 어쩌죠?”

서준이 제 두 손 위에 올려놓은 지폐와 동전을 바라보았다.

홍보 영상 촬영이라서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누군가 벤치 위에 올려놓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고 돈을 넣어두었다. 그 뒤로 몇몇이 동전과 지폐를 넣었다. 연주 중이라서 말릴 수도 없었다.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준이 번 돈이니까 준의 것이죠. 사고 싶은 걸 사세요. 준.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서준이 직원, 경호원과 인사하는 사이 안다호가 차를 끌고 가게 앞에 도착했다.

바이올린 케이스 두 개를 뒷좌석에 두고 동전과 지폐를 손에 꼭 쥔 서준이 보조석에 앉았다.

안전띠를 매고 손바닥을 벌려 하나둘, 동전과 지폐를 셌다.

“7달러! 7달러에요. 다호 형.”

“그래? 잘됐네.”

서준의 말에 안다호가 웃었다.

“이거 중에 다호 형이 준 것도 있죠?”

“……어떻게 알았어?”

“몰래 넣는 거 봤어요.”

연주하는 중간 서준은 몰래 동전을 넣는 안다호를 보았다.

아마도 ‘그레이의 첫 연주’가 얼마만큼 엉망인지 아는 만큼, 누군가 열어 놓은 바이올린 케이스 속 별로 없는 돈에 자신이 실망할까 싶어서 넣었겠지. 큰돈을 넣으면 오히려 눈에 띌 테니, 적당히 동전을 넣었을 터였다.

안다호 말고도 가까이서 연주를 듣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 마음만큼 손에 든 동전과 지폐가 무거워졌다.

‘이건 안 쓰고 모아야지.’

서준은 이히히 웃으며 동전과 지폐를 소중히 챙겼다.

* * *

다음 촬영은 그레이가 레베카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는 장면이었다.

여전히 무채색의 그레이는 바이올린을 들고 있을 때만 색색의 꽃처럼 환하게 웃고는 했다.

그레이와 레베카, 조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매일같이 촬영장에 들르던 제이슨 무어는 레베카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저건…….”

“모튼 교수님이 가르치는 것 같지 않아요?”

제이슨 무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에밀리 조감독이 말을 이었다.

“연습 때, 교수님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았나 봐요. 다정하게 가르치는.”

에밀리의 말 그대로, 캐서린은 벤자민 교수의 모습과 비슷했다.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연구해 연기하는 것도 자주 쓰는 방법이라 사라 로트 감독도 별말 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레베카의 가르침에 그레이는 처음으로 활로 현을 그었다. 섬세한 힘 조절이 익숙하지 않아 바이올린의 두 현을 활로 동시에 눌러버렸다.

두 가지 소리가 나자 레베카가 고개를 저었다. 조지는 낄낄 웃으며 두 사람을 구경했다.

“힘을 빼. 강아지 만지듯이 살살.”

“강아지 만져본 적 없는데…….”

다운록에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커다란 유기견밖에 없었다. 투견이라는 소문에 엄마는 가까이도 가지 못하게 했다. 그레이는 축 시들었다. 찬란했던 색이 까맣게 물들자 레베카가 안절부절못했다.

“우리 집에 강아지 있어! 데려올까? 엄청 귀여워.”

“……정말?”

귀여운 강아지를 상상한 그레이가 활짝 웃었다.

“컷! OK!”

오전 촬영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7달러나 벌었다고?”

“그 연주로?”

조금 있으면 촬영할 연주를 이미 연습실에서 들어본 캐서린과 폴이 놀란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밥을 먹으면서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호 형이 2달러쯤 주긴 했는데, 5달러는 모르는 사람이 줬어.”

“그 연주가 5달러나 벌 수 있다니…….”

폴은 귀를 찢던 그 연주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캐서린이 고기를 찍어 먹으며 말했다.

“이번 주도 가?”

“응.”

“어떤 홍보 영상일지 되게 궁금하다.”

조지의 말에 캐서린도, 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촬영은 그레이가 생애 처음으로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레디, 액션!”

레베카가 말했다.

“실수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가르쳐 준 데까지만 연주해 봐.”

“나 잘 못 하는데…….”

“진짜로 연습해야 고칠 점을 알지. 쉬운 곡이니까 해봐.”

곡은 동요로 모두에게 익숙한 ‘반짝반짝 작은 별’.

잔뜩 긴장한 그레이가 레베카의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조지의 카메라가 그레이를 향했다.

그레이는 레베카가 가르쳐 준 것을 떠올렸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똑같은 높이로. 현을 짚은 왼쪽 손가락은 아치형으로, 활을 잡은 오른손은 달걀을 쥔 듯 둥글게. 바이올린이 내려가지 않게 주의하면서.

활을 내려그었다.

끼이이익-

조용한 공원, 깽깽이 소리가 들렸다. 레베카와 조지, 아니, 캐서린과 폴은 어느새 연기를 잊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는 레베카와 조지의 말을 철석같이 들었기 때문에 웃지도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를 이어나갔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반짝반짝 작은 별.

스태프들,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사라 감독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서준의 연주가 끝나길 기다렸다.

배운 부분까지의 연주가 끝나고 그레이가 우물쭈물 꼼지락댔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바이올린을 직접 연주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쑥스러운 얼굴로 친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

“아하하하하!”

“푸하하하!”

대본에도 웃으라고 쓰여 있긴 했지만, 캐서린과 폴은 정말로 실컷 웃었다.

그레이가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것까지 촬영한 사라 감독이 오케이를 외치자,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준, 진짜 잘한다!”

“나 같으면 연주하던 중간에 웃음이 터졌을 거야.”

캐서린과 폴의 말에 서준도 웃고 말았다.

* * *

촬영은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오늘, 조지와 레베카는 바이올린 대신 가방 한가득, 오선지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왔다.

“작곡?”

“응. 방학 숙제거든. 그레이도 악보 보는 방법 아니까, 같이 하자.”

조지의 말에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린 연주가 더 하고 싶긴 했지만, 친구들과 하는 건 다 즐거워서 기쁘게 펜을 들었다.

“근데 작곡은 어떻게 하는 거야?”

“그냥 생각나는 음악을 적으면 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 곡을 연주하고 싶은지 생각해.”

“큼직한 밑바탕만 떠올려도 괜찮아.”

하고 싶은 연주. 그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신기할 정도로 깨끗한 바이올린 소리였다.

숙제를 검사할 선생님이 있는 레베카와 조지가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두 사람보다 편안하게, 자기 마음껏 작곡할 수 있는 그레이는 펜을 오선지에 가져다 댔다.

음.

그레이가 된 서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곡은 벤자민 모튼 교수님의 곡, ‘오버 더 레인보우’가 아니었다.

꿈 요정과 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그레이가 만나 단순하지만 그레이만의 감정이 들어간 곡이 완성되었다.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다음에 그려서 연주해 보자.’

서준은 이게 영화 촬영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레이의 손이 움직였다. 어색하게 새까만 펜으로 동글동글 원을 칠하며 음표를 만들어나갔다. 어설픈 모습이 정말로 생전 처음 악보를 그리는 아이 같았다.

그 모습에 벤자민 모튼 교수는 제이슨 무어의 어린 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찬란하게 웃으며 작곡하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독주회 준비로 오늘은 오지 못한 제이슨의 그때를 떠올렸다.

* * *

일요일, 최유성은 혼자서 공원에 들렀다. 학교 때문에 일요일밖에 시간이 나지 않았다. 가끔 스치듯 바이올린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있으려나?”

나탈리와 왔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그때 그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 자리에 바이올린 소년이 있었다. 아직 한 곡도 연주하지 않았는지 바이올린 케이스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최유성은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매일 오는 거야?”

“아뇨. 일요일마다 와요.”

작은 목소리로 말한 소년이 바이올린을 들었다. 최유성은 소년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는 구경꾼들을 둘러보았다.

구경꾼의 수는 저번 주와 비슷한 것 같았다. 최유성처럼 소년이 걱정되어 나온 학생도 있는 것 같았고, 직업이 궁금한 험상궂은 얼굴도 있었다.

그때, 최유성의 눈에 유난히 새파란 고래 그림이 들어왔다.

‘새로 생긴 브랜든가? 많이 보이는 걸 보면 유명한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 공원 밖에서는 본 적이 없단 말이지…… 뭔가, 다른 게…….’

이어나가려던 생각이 끼익거리는 바이올린 소리에 끊겼다.

최유성의 시선이 소년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색바랜 옷에 작고 낡은 바이올린이었다. 그런데도 소년은 연주를 이어나갔다.

최유성은 바이올린 소년의 자세를 보며 틀린 곳을 여러 곳 발견했다. 가르쳐 주고 싶긴 한데, 오지랖이 아닐까. 속으로 한숨을 쉰 최유성이 오늘도 깽깽거리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다.

서준은 에헤헤 웃으며 귀갓길에 산 투명한 저금통에 지폐와 동전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다호 형의 돈 없이 10달러나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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