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112화 (112/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12화

그사이 재촬영 준비가 끝났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이번엔 제대로 하자!”

“응!”

대사를 달달 외운 캐서린과 폴이 주먹을 불끈 쥐고 각오를 다지는 사이 서준은 풀숲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능력이 잘 들었나 보다. 서준이 다시금 풀숲 사이에 앉아 시작을 기다렸다.

“레디, 액션!”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가 발동됩니다.]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중하급]

흑백카멜레온은 몸의 색이 검은색과 흰색으로 바뀝니다.

주변의 색을 흑백으로 바꿉니다.

제한 : 시야가 흑백으로 변합니다.

흑백카멜레온이 살던 세상은 흑백만화 속 세상과 똑같았다.

모든 게 흑과 백, 경계선은 겨우 명암의 유무.

그 세상은 세상 자체로도 무겁고 우울했다.

가끔가다 총천연색의 존재가 나타나면 신으로 떠받들거나 악마로 죽임을 당했다.

흑백카멜레온의 삶의 책 옆에 다음 삶의 책이 있었는데, 그때는 골렘으로 태어나 멍하니 알록달록한 세상을 바라보기만 했다. 골렘이라서 다행이었지 슬라임이나 오크 같은 생물이었다면 아마 굶어 죽었을 터였다.

서준이 눈을 깜박였다.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의 영향으로 세상이 흑백으로 보였다.

그레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 환경에 살았다. 한국인 이민자인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미국인 아빠는 그레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엄마가 일하러 간 사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레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공원에 들르고는 했다. 이 공원은 옆에 있는 사립학교와 가까워 그곳 학생들이 자주 오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러 오는 학생, 노래를 부르는 학생, 무언가를 찍고 있는 학생. 많은 아이 중에 그레이가 찾는 아이는 악기를 들고 있는 아이였다.

아름다운 연주가 흘러나왔다. 곡의 이름도, 작곡가도, 의미도 몰랐다. 그저 이어지는 소리가 아주 아름다웠다.

오늘도 그레이는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서 악기를 연주할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풀숲 뒤에 숨어 있으려니, 또래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이 나타났다.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말없이 연주를 시작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이 아이들은 제목을 말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아. 이 곡이 사계의 봄이구나.

꽤 들었던 곡이었다. 화창한 봄이면 누군가 연주하고는 했다. 그건 바이올린일 때도 있었고, 전자피아노일 때도 있었다.

작은 풀숲은 몸을 웅크려야만 그레이의 몸이 가려졌다. 웅크린 모습으로 연주를 듣던 그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폈다. 흘러가는 음악에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거기! 너 누구야?”

그래서 사나운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자신의 머리가 풀숲 밖으로 나온 걸 몰랐다. 아이의 커다란 목소리에 그레이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웅크린 어깨. 꼼지락대는 손.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바닥에 꽂힌 시선.

그레이의 귀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타필 사람들하고 마주치면 안 돼. 언제 어떤 일로 시비가 걸릴지 몰랐다.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는 달리 반짝이는 아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몰래 들어서 미안해.”

화를 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순순한 사과였다. 그 사과에, 레베카와 조지는 민망해졌다. 여긴 공원이었고 누구든지 레베카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여긴 내 연습실도 아니니까, 괜찮아. 공원인데, 들릴 수도 있지.”

“소리 질러서 미안해.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

아이들의 사과에 그레이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서먹서먹한 기운이 공원에 잠시 흘렀다.

“컷, OK!”

오케이 소리에 두 아역 배우가 털썩 주저앉았다. 기운이 쭉 빠지긴 했지만, 오케이를 받아서 기쁜 표정이었다.

“또 대사 못 할 뻔했어.”

“준이 너무 달라서 놀랐어.”

“아하하. 그건 그레이니까.”

아이들이 투닥투닥하는 소리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 * *

첫날의 촬영이 모두 끝나고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서준에게 사라 로트 감독이 말을 걸었다.

“요 앞에 공원 있는 거 아니?”

“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2주 동안, 산책 겸 소풍 겸 엄마랑 몇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연주해 보면 어떨까?”

“연주요?”

“응. 홍보팀에서 내려온 기획이야. 들어보니 괜찮아서 말이야.”

사라 로트가 말을 이었다. 홍보라는 말에 안다호의 귀가 쫑긋 섰다.

서준이 영화 출연을 결정한 게 몇 달이 넘었는데도 기사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웨일 스튜디오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신경이 쓰였다.

“물론 준이 허락한다면 말이야.”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어떤 기획인데요?”

“우리 영화가 바이올린을 처음 연주하는 아이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영화잖아.”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준은 초보의 자세부터 전문가 같은 자세까지 변하는 자세를 연습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녹화에 따라 하기도 했고 너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며 따라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네.”

“그것처럼 공원에서 준이 초보일 때의 모습, 점점 나아지면서 결국 누구보다 멋지고 완벽한 모습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그게 홍보가 될까요?”

“영상으로 찍어서 홍보 영상을 만들 생각인가 봐. 매주 실력이 눈에 띌 정도로 늘어가는 신기한 아이. 구경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겠지?”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듣고 있던 서은혜와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라면 화제가 될 게 분명했다.

“재밌을 것 같아요. 해볼래요!”

그렇게 서준은 이번 주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에 공원에서 연주하게 되었다.

* * *

촬영은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네 번째 촬영은 환한 얼굴로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그레이를 찍는 장면이었다.

집에서 간식거리를 잔뜩 가져온 레베카와 조지가 그레이를 반겼다.

처음 먹는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서도 그레이의 시선은 레베카의 바이올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레베카는 웃으면서 바이올린을 그레이에게 주었다.

“연주해 볼래? 가르쳐 줄게.”

“……그래도 돼?”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가 취소됩니다.]

레베카의 바이올린과 손가락이 맞닿은 그레이의 세상이 잔디색으로 물들었다. 새하얗던 하늘이 파랗게 변하고 창백하던 그레이의 볼이 붉은빛이 돌았다.

흑백의 세상에 천천히 색이 입혀졌다.

그 놀라운 변화에 캐서린과 폴은 또다시 잡아먹히고 말았다.

“컷, NG!”

사라 로트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고 캐서린과 폴이 머리를 쥐어 싸맸다.

“또 못했어.”

“이번엔 한 번에 통과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의 말에 서준과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은 미리 준비해 놓은 대본을 읽는 아이들과 합을 맞추었다.

“좋아! 이번엔 통과하자!”

“그래! 힘내자!”

재촬영 전, 기합을 넣는 캐서린과 폴의 모습에 서준도 주먹을 꽉 쥐었다. 친구들이 열심히 한다니 나도 열심히 해야지!

“나도 열심히 할게!”

서준의 말에 캐서린과 폴, 스태프들이 멈칫했다. 여기서 더 열심히? 오늘 오케이 컷이 나올까? 문득 두려워진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준은 좀 힘 빼고 해도 될 것 같아.”

그 말에 동의하듯 폴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촬영이 없는 일요일이 되었다. 할리우드 촬영은 계획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아역 배우들을 위해서 쉬는 날도 충분했다.

안다호와 함께 공원으로 떠나는 서준을 배웅하러 나온 서은혜가 말했다.

“서준아. 오늘 아빠 온다니까 늦으면 안 돼.”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온 후, 처음으로 아빠가 휴가를 내고 미국에 오게 되었다.

매일 저녁 영상통화를 하지만 직접 보는 건 더 기뻤다. 서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세 곡만 연주할 거라서 일찍 올 거야.”

“세 곡만 연주해도 홍보가 돼?”

“나도 잘 모르겠는걸. 근데 그 정도면 충분하대.”

바이올린 케이스를 맨 서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은혜가 웃으며 서준의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바이올린을 매고 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배우가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로 보였다.

“알았어. 잘 다녀와. 다호 씨 잘 부탁해요.”

“네. 걱정 마십시오.”

“엄마! 갔다 올게!”

서준과 안다호는 차를 타고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 가족들이 많은 보통 공원과는 달리,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근처에 음악대학교가 있어서 거기 학생들이 많이 오나 보더라.”

“그렇구나. 어쩐지 노래가 많이 나온다고 했어요.”

서준과 안다호는 차를 타고 웨일 스튜디오에서 알려준 가게로 이동했다. 일요일 오후 2시간 동안 잠깐 빌린 자그마한 가게였다.

문이 닫혀 있는 가게 앞에 웨일 스튜디오의 홍보팀 직원이 서 있었다. 차를 발견한 직원이 주차할 곳으로 안내하고 차에서 내리는 서준과 안다호를 반겼다.

“반갑습니다. 서준 리.”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눈 세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의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듬직한 경호원들이 세 사람을 반겼다.

새까만 정장을 입고 일하던 평소와는 달리 일반인처럼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눈에 잘 띄는 곳에 브랜드 로고처럼 파란색 고래 무늬가 있었다.

경호원들과도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직원은 안다호에게 바이올린 케이스와 종이가방을 건네주었다. 자신의 바이올린을 등에 메고 있던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바이올린 있어요.”

“홍보 촬영 컨셉이, ‘그레이’니까요. 그건 그레이가 쓰기엔 너무 좋은 바이올린입니다. 준.”

눈을 몇 번 끔벅이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돼서 버스킹을 하는 거군요.”

“네. 촬영 때 엄청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종이 가방 안에 옷도 있으니까, 갈아입어 주세요.”

“네!”

서준은 미리 준비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왔던 옷을 가지런히 놔두고 종이 가방 안의 옷을 꺼냈다. 색이 바랜 파란색 티셔츠는 정말로 그레이가 입을 것 같은 옷이었다.

서준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직원과 경호원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조금 떨어져서 모르는 척, 미리 준비해 둔 공원의 버스킹 장소로 향했다.

조금 구석이었지만 조용한 분위기가 서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쪽에서 연주하면 됩니다. 촬영은 이분하고 경호원분들이 하실 거에요. 다른 버스킹들도 관객들이 촬영하니까,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겁니다.”

웨일 스튜디오의 홍보팀 직원의 말에, 고래 무늬가 그려진 파란 모자를 쓴 남자가 웃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상 화질이 나쁘지 않을까요?”

“그게 버스킹의 매력이죠. 게다가 화질이 좋으면 준이란 게 금방 들켜버리잖아요.”

“들키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밝혀지면 모르겠지만, 최대한 숨길 계획입니다. 서준. 비가 오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조금 전 가게로 와 주세요. 물론 경호원들과 제가 항상 같이 있겠지만, 미리 대비는 해놔야죠.”

“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홍보팀 직원이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이제 시작할 시간이네요. 여기 서서 연주하면 됩니다. 준.”

“네. 알겠어요!”

마지막으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직원이 건네준 까만 야구 모자를 꾹 눌러 쓴 서준이 직원이 가리키는 자리에 섰다.

경호원들도, 촬영할 직원도 그저 버스킹을 보러온 듯 자연스럽게 서준을 둘러싸며 섰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충분한 여유 공간을 두었다.

“그럼 언제든지 시작해 주세요.”

직원도 안다호도 서준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저 구경하는 사람인 양 서 있었다.

서준은 버스킹이 처음이었지만,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두고 바이올린을 꺼냈다. 낡았지만 관리가 잘된 바이올린이었다.

“내 거보다 작네.”

그래도 연주할 정도는 됐다. 바이올린과 활을 손에 쥐고 돈을 받기 위해 바이올린 케이스를 사람들 쪽으로 활짝 펼쳐두었다.

그사이 휴대폰으로 촬영을 시작한 경호원들과 직원들의 모습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조금 구석인 곳이었지만 사람들이 있으니, 무언가 하나? 싶었던 ‘진짜’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였다.

서준은 후우, 숨을 내쉬고 바이올린에 턱을 올렸다. 오른손으로 활을 잡고, 왼손으로 현을 짚었다.

[(선)흑백카멜레온의 흑백화가 발동됩니다.]

세상이 까맣고 하얗게 물들었다. 이제 서준은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레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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