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111화 (111/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11화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의 첫 촬영 날이 되었다.

보통 촬영 순서와 영화 순서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사라 로트 감독은 그 흐름을 따라가기로 했다.

성인 배우라면 몰라도 아역 배우들에게는 시간에 흐름에 따른 촬영이 훨씬 연기와 캐릭터의 감정에 몰입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도시였다.

한 도시는 중산층이 사는 곳 스타필, 한 도시는 하루 벌어 하루 먹어 살기도 힘든 곳, 다운록. 하늘에서 보면, 알록달록한 유채색으로 잘 정돈된 스타필과 어두운 시멘트색이 가득한 다운록이 대비되어 보였다.

그런 두 도시의 경계에는 공원이 하나 있다는 설정이었는데, 그 공원이 이번 영화의 주요 배경이었다.

자주 촬영장으로 사용되는 만큼 방해 없이 촬영하기 위해 사라 로트 감독은 아예 자그마한 공원을 만들었다.

“역시 할리우드…….”

서준과 함께 촬영장에 도착한 서은혜와 안다호가 눈을 반짝였다. 영화 하나 찍는다고 공원을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촬영장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저 이곳에 있는 공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무가 무성했다.

서준이야 이미 쉐도우맨 2를 찍을 때 겪어본 일이었기 때문에 감탄하는 엄마와 다호 형을 이끌고 분장실로 향했다.

“어서 와!”

“안녕. 준!”

“안녕. 캐서린! 폴!”

분장실에는 이미 도착한 두 아이가 있었다. 서준도 스타일리스트가 건네준 옷을 입고 머리를 다듬었다. 캐서린, 폴과 이야기를 나누며 밖으로 나오니, 엄마와 다호 형과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인자하게 웃고 있는 벤자민 모튼 교수와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제이슨 무어였다.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삐약대며 벤자민 교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 캐서린 첫 연주 장면이지? 마음 편하게 해야 한다? 긴장만 하지 않으면 완벽해.”

“네! 감사합니다!”

캐서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서준은 제이슨과 인사를 나누었다. 2주 동안의 레슨으로 그럭저럭 잡담을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

잡담을 나누던 중 제이슨이 생애 첫 독주회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을 아이들에게 전해주자, 캐서린과 폴은 첫 촬영 때는 자신도 그랬다면서 제법 의젓하게 제이슨 무어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애들이 더 마음이 넓은 것 같은데…….’

서준이 제이슨에게 물었다. 제법 친해지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는 제이슨 무어였다. 이젠 꿍해 있는 얼굴이 익숙해서 웃는 얼굴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제이슨. 독주회 준비로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온다는데 와야지.”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제이슨의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가 2주 동안 준의 작품을 봤거든. 어제 막 내의원 마지막 화를 봤단다.”

“정말요? 어땠어요?”

분명히 발음이 어려울 텐데, ‘내의원’이라고 말하는 어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교수님이 얼마나 집중해서 봤는지 알 것 같았다.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 잘 봤단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아직도 따끔할 정도야. 그걸 보고 나서 제이슨에게 준이 어떻게 촬영할지 기대가 된다고 했더니, 자기도 궁금했는지 집 앞에 서 있더라고. 그래서 함께 왔단다.”

어쩐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했다. 서준이 웃으며 물었다.

“제이슨도 울었어요?”

“…….”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은 없었지만 다들 알아들었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 *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세 아이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카메라와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인 공원 한가운데로 향했다.

“음. 되게 안 어울린다. 준은.”

“그러게. 얼굴이 너무 잘나서 그런가 봐.”

캐서린과 폴의 말에 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스타필의 아이인 캐서린과 폴, 다운록의 아이인 서준. 세 아이의 옷차림은 눈에 띌 정도로 달랐다.

캐서린과 폴은 깨끗하고 밝은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 입던 옷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저기 봐. 스타일리스트분들도 준 보면서 걱정하고 있어.”

다운록의 아이인 서준은 깨끗하지만, 색이 바랜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곳이라서 새 옷을 구하기도 힘든 옷이었다. 다운록은 위험하고 우울한,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검댕을 묻혀볼까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는 가난하긴 하지만 엄마가 잘 돌봐주는 아이야. 검댕 같은 걸 묻히고 다닐 일이 없어.”

“그래도 너무 튀지 않아요? 저쪽만 조명 비춘 것처럼 얼굴만 빛나잖아요.”

에밀리도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사라 감독과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하게 웃던 사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일단 촬영해 보자. 안 되면 창백하게 화장하는 방법도 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라 로트 감독은 서준을 믿었다.

서준의 연기는 2주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맑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서준 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완벽한 그레이’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에밀리. 촬영 준비 시작하자.”

“네!”

첫 장면은 두 마을의 경계선으로 나누어진 공원에서 세 아이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카메라와 조명을 확인하던 스태프들이 준비를 끝냈다. 아역 배우들의 보호자들도 스태프들도 모두 아이들에게 집중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용해진 주위를 둘러본 조감독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레디, 액션!”

모니터에 비치는 캐서린과 폴을 확인한 사라 로트 감독이 크게 외쳤다. 확 트인 공원, 활기찬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찍고 있어?”

“그래.”

“우리 학교도 참 특이하지. 어떻게 이런 걸 찍어오라고 하지?”

“뭐, 잘 됐잖아. 넌 연습하는 모습 기록에 남겨서 공부하고, 난 너 찍으면서 연출하는 방법 공부하고.”

조지의 말에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 로트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손짓했다. 몇 대의 카메라가 두 아역 배우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무슨 곡을 연주할 거야?”

“내가 연주할 곡은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야.”

“왜 하필 봄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서. 그럼 연주할게.”

“그래.”

조지가 손에 든 카메라로 바이올린을 들고 선 레베카를 찍었다. 후우. 레베카가 숨을 내쉬고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렸다. 턱을 괴고 활을 들어 올렸다.

잠시 시간의 여유를 두고 사라 로트 감독이 외쳤다.

“컷, 오케이!”

단번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캐서린과 폴이 웃으면서 촬영장을 벗어나 모니터 앞으로 향했다.

사라 로트 감독이 다시 돌려보는 영상을 함께 보았다. 준과 감독님이 말없이 영상을 보는데 긴장감이 들었다.

어떻게 찍혔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서준과 사라 로트의 얼굴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촬영했던 영상을 확인한 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껏 긴장한 얼굴의 캐서린과 폴이 보였다. 서준이 활짝 웃었다. 촬영 직전에는 엄청 긴장하는 것 같더니 자연스럽게 잘했다.

“엄청 잘했어!”

서준의 칭찬에 두 아이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이내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사라 로트 감독도 캐서린과 폴을 칭찬했다.

“대사도 완벽하고 시선 처리도 잘했어. 캐서린, 폴. 다음은 연주 장면을 찍자. 모튼 교수님, 부족한 점이 보이시면 촬영 끝난 다음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공원 가운데 캐서린과 폴이 섰다. 캐서린은 자세를 바로 했다. 2주 동안의 연습했던 연주 순서를 떠올렸다. 벤자민 교수도 제이슨도 바이올린 연주가 나오자 캐서린에게 집중했다.

“하나, 둘…….”

딱! 작은 신호가 들리고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시에 캐서린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연습한 효과가 있는 덕분인지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았다.

벤자민 교수가 흐뭇한 얼굴로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자세만 봐서는 ‘레베카’의 설정처럼 몇 년 바이올린에 매진한 아이 같았다.

“컷!”

사라 로트 감독이 벤자민 교수를 바라보았다. 사라 로트의 눈에는 괜찮았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다를 수도 있었다. 벤자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 감독이 외쳤다.

“OK!”

그 이후 같은 장면의 바스트샷과 클로즈업샷 촬영이 있었다. 다행히도 NG 없이 두 사람만 나오는 장면의 촬영이 끝났다.

“으아. 힘들다.”

캐서린이 털썩 주저앉았다. 서준은 안다호가 건네준 물병을 캐서린에게 건네주고 폴에게 부채를 부쳐주었다.

“고생했어.”

“아니야. 난 다음 촬영이 더 걱정되는걸?”

“맞아. 맞아.”

“응?”

두 아이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들이 기대 반 걱정 반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무려 연기 천재! 준이랑 촬영하는 거잖아. 으. 긴장된다! 막 압도당해서 대사도 못 하면 어떡하지?”

“그러게. 나도 걱정돼서 첫 장면만 엄청 연습했어.”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서준의 말에도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서준의 연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아역 배우들만이 아니었다. 사라 로트 감독도 벤자민 모튼도, 제이슨 무어도 스태프들도 궁금해했다.

연습실에서도 어마어마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건 악기 연주였고 지금이 진짜 연기였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에밀리도 다른 때보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촬영 시작을 외쳤다. 카메라도 조명도 마이크도 모두 집중했다. 모두의 시선이 촬영장으로 향한 가운데, 사라 로트 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까만 머리통을 발견한 것은 조지였다. 카메라 화면에 비치는 풀숲의 까만 머리통이 너무 눈에 띄었다.

“거기. 누구야?”

검은 머리통이 움찔했다. 다음 곡을 연주할 준비를 하고 있던 레베카의 시선도 뒤를 향했다. 조지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니까?!”

“……미, 미안.”

머리통이 쑥 올라왔다. 어? 캐서린과 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라 로트와 벤자민 교수, 제이슨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서은혜와 안다호만이 뿌듯한 얼굴이었다.

‘역시 우리 서준이!’

조금 전까지 옷만 조금 낡았을 뿐, 세상 밝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았던, 보기만 해도 잘 컸구나 생각했던 서준이 아니었다. 세상에 치여, 외로움에 치여 꼬질꼬질해진 아이가 거기에 있었다.

오색찬란한 세상, 오직 아이가 서 있는 곳만이 흑백으로 보였다. 나무의 그림자에 가려진 듯, 아이가 있는 곳만이 어두워 보였다. 흑백 특유의 진지함과 우울함이 느껴졌다. 그저 서준이 연기를 시작한 것뿐인데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어, 어…….”

결국, 그 변화에 두 아역 배우는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컷! NG!”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라 로트 감독이 외치고 카메라가 멈추었다. 그 말과 동시에 다시 한번 서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꼬질꼬질함을 어디다 던져뒀는지 밝은 얼굴로 저쪽에서 달려왔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그 멀쩡하고도 환한 얼굴에 모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흑백처리는 헛것이었나.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서준은 총천연색으로 알록달록했다.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가 밤하늘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제이슨 무어는 소름이 끼친 팔을 쓰다듬었다.

2주 동안 벤자민 선생님과 서준을 가르치면서 자신과 비슷한 연주법이 마음에 들었다.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눈부시게 성장하는 서준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커서 연주를 한다면 어떤 음악이 나올지 심장이 요동칠 정도로 기대되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께 서준에게 바이올린을 권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벤자민 선생님은 아무런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뭐, 내의원에서의 연기도 대단하긴 했지만…… 그게 감독의 연출일지, 작가의 역량일지 알 수 없지.’

내의원을 보며 엉엉 울었던 것은 까맣게 잊었는지, 제이슨 무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좋은 교수와 좋은 학교에 대해 알음알음 조사했다. 어떻게 서준을 꼬드기면 좋을까, 요 며칠 고민했는데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천재적인 실력은 둘째치고…….’

반짝이던 서준의 눈동자를 떠올린, 제이슨 무어는 후우, 한숨을 쉬며 마음을 접었다.

조감독 에밀리가 아역 배우들에게 대본을 건네주며 서준과 아이들이 다시 합을 맞추는 사이, 사라 로트 감독과 벤자민 모튼이 대화를 나누었다.

“영화계에 멋진 배우가 나타났군요. 바이올린도 잘했는데 연기는 상상 이상입니다.”

“솔직히 준은 바이올린을 해도 잘할 거예요.”

“아니요. 잘하긴 할 겁니다만, 이 정도로 하지는 못할 겁니다.”

벤자민 모튼은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다른 분야의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학생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집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준은 연주를 잘합니다만, 그건 연기를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마음이 딴 곳에 잇죠. 아마 준이 연기에 쏟는 열정과 사랑을 악기에 쏟아부으면 엄청난 연주자가 탄생할 테지만, 준은 그러질 않을 겁니다.”

벤자민 교수의 시선에 제이슨에게로 향했다. 못마땅한 듯 굳게 닫힌 입에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제자는 이제야 이해한 모양이었다. 제이슨 무어가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것처럼,

“준은 연기를 사랑하니까요.”

벤자민 모튼의 말에 사라 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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