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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110화 (11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10화

“오늘은 간단히 제일 짧은 곡만 해보자. 제이슨의 연주를 녹음해 왔는데 하나, 둘 신호를 주면 바로 들어가야 타이밍이 맞아. 하나, 둘. 딱! 알겠니?”

“네!”

벤자민 교수가 서준과 캐서린에게 곡명을 가르쳐 주고 악보를 건넸다.

두 아이가 악보를 보며 배웠던 연주를 떠올리는 동안 사라 로트 감독은 폴을 불러 카메라를 쥐여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촬영하는 거 연습하자.”

“네!”

친구들이 연주할 동안 뭐하나, 고민했던 폴은 신이 나서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 화면에 서준과 캐서린이 비쳤다.

“이쪽이 더 좋겠지?”

“이쪽이요?”

“그래. 찍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안다면 폴이 연기할 때도 도움이 될 거야.”

영화감독님에게 이런 설명을 들을 줄은 몰랐던 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열심히 배워서 연기할 때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일단 준부터. 미리 녹음해 둔 연주에 맞춰보자.”

“네.”

서준은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턱받이에 턱을 괴고 오른손에 활을 쥐었다. 그 능숙한 모습에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의 눈이 반짝였다.

서준이 준비를 끝내자 연습실에 정적이 흘렀다.

“하나. 둘.”

딱, 벤자민 모튼은 신호와 함께 음악을 틀었다.

서준은 활을 내렸다. 활이 현을 그으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왼쪽 손가락으로 바이올린 현을 강하게 짚고 오른손으로 활을 움직였다. 현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연습실을 울렸다.

제이슨 무어의 연주와 서준의 모습은 잘 어울렸다. 두 사람 모두 철저하게 악보의 지시를 따랐다. 그 덕에 박자도 현을 짚는 순서도 알맞았다. 타이밍도 좋았고 소리도 깨끗했다.

그래, 정말로 바이올린에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

고개를 끄덕이며 서준의 연주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깨끗한 소리가 날 리 없을 텐데?’

활로 바이올린의 현을 긋는 시늉을 하는 이상, 활과 현의 마찰로 인해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 자세는 그럴듯하게 배울 수 있어도 곡의 깨끗한 소리까지 배우기는 어려웠다.

‘아니, 짧은 곡인 만큼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가능하겠지만…….’

음 이탈 하나 없는 서준의 바이올린 소리에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벤자민 교수는 스피커를 껐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연주는 계속됐다.

비발디의 사계 봄, 1악장.

전문가와 비슷한 수준의 연주가 스피커가 아니라, 서준의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습실에 있는 누구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계 봄, 1악장의 촬영 분량은 짧았고 악보의 끝까지 연주한 서준은 활을 멈추었다.

상상 이상의 연습 결과에 모두 박수를 보냈다. 열심히 박수를 보내던 사라 로트 감독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아니, 잠깐만.”

모두의 시선이 사라 로트 감독에게로 향했다.

“교수님. 준의 자세가 어떤지 물어봐도 될까요?”

“더할 나위 없습니다. 교과서의 정석이라도 해도 되겠군요.”

만족의 미소를 띠며 벤자민 교수가 말했다. 당장에라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정석적인 자세였다.

만족하던 벤자민 모튼과는 달리 사라 로트 감독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준. 캐릭터의 설정은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한 서준은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아까와는 다른 자세였다. 사라 로트 감독과 캐서린, 폴이 어라?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놀란 것은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였다.

“이렇게죠?”

그건 두 사람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자세였다. 바이올린을 처음 잡아본 사람만의 어색한 자세. 완벽했던 서준의 자세가 완벽할 정도로 초보의 자세로 변했다.

서준이 활을 움직였다. 두 개의 현이 활에 눌려, 끼익-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도 연주는 계속됐다.

비발디 사계의 봄, 1악장.

서준의 바이올린에서 처참할 정도로 엉망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습실에 있던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아까 연주와 이 연주가 같은 사람의 연주라고?’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다.

“……다시 처음처럼 연주해 줄래?”

사라 로트의 말에 서준은 자세를 바로 했다. 지옥의 비명 같았던 연주가 다시 천상의 연주로 바뀌었다. 벤자민 모튼은 할 말을 잃었다. 제이슨 무어도 침음성을 삼켰다.

캐서린과 폴은 신기한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자세만 연습했던 캐서린에게는 더욱 신기한 모습이었다.

“준. 그럼 중간은?”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 서준을 촬영하고 있는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자세가 바뀌었다. 오. 벤자민 교수는 결국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가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과 비슷한 자세였다.

소리가 났다. 신기했다. 연주는 멋졌지만 드문드문 실수가 있었다.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만 알 수 있는 실수부터 사라 로트 감독과 아이들까지 알 수 있는 실수까지.

“어. 준. 다시 처음 자세로.”

다시 한번 완벽한 봄을 들었다. 벤자민 모튼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이건 완벽한 연주였다. 그러니까. 그 말은……

“실수까지도 연기한 거야?”

초보부터 점차 늘어가는 실력. 많았던 실수와 점점 적어지는 실수. 꾸부정했던 자세와 교과서에 실려도 될 것 같은 자세. 바닥을 치던 소리와 다시 듣고 싶었던 음악.

그 무서울 정도의 변화에 다들 경악했다.

"이게 서준 리구나…….”

캐서린과 폴, 사라 로트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본 서준 리의 연기는, 작품으로 봤던 모습들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잠시 생각하던 벤자민 모튼이 입을 열었다. 계속 서준의 연주만 들을 수는 없었다. 벤자민 모튼이 가르쳐야 할 아이는 두 사람이었다.

“다음은 캐서린.”

캐서린이 벤자민 교수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저런 연기를 보고 연기를 하라고요? 캐서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괜찮다. 편하게 연습해 온 대로 하면 돼.”

“하, 하지만…….”

끝내 캐서린은 바이올린을 들지 못했다. 벤자민 모튼도 사라 로트 감독도 캐서린을 탓하지 않았다. 두 사람도 서준이 이 정도로 연기를 멋지게 해낼 줄은 몰랐으니까, 캐서린이 부담감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촬영 때까지만 연습하면 돼. 힘내자, 캐서린.”

“……네!”

사라 로트 감독의 말에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벤자민 교수가 제이슨에게 물었다.

“대단하지 않니?”

“……악보대로 연주하는 건, 저도 1년도 안 돼서 했습니다.”

첫 독주회 준비로 바쁜 자신을 부른 것이 여전히 못마땅한 듯한 제자의 모습에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밖을 바라보았다.

혼자 차를 탈 때는 빠르게 달리는 녀석이, 자신이 탔다고 제한속도를 지키며 운전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연주 말고, 연기 말이다.”

“…….”

제이슨은 입을 열지 않았다. 벤자민 교수는 연습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라 로트 감독의 지시에 변하던 서준의 연기. 벤자민 교수는 소름이 돋았던 팔을 매만졌다.

“그게 천재라는 거겠지. 이름이 서준 리였던가? 집에 가서 나왔던 작품을 찾아봐야겠군. 너도 보고 가겠니? 저녁도 먹고 가면 좋고.”

"……네.”

독주회 연습을 해야 했지만, 차마 스승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던 제이슨 무어는 결국 취향에 맞지 않는 히어로 영화를 보고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해야 했다.

* * *

다음 날.

일찍 연습실에 도착한 사라 로트 감독과 벤자민 교수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전부 연주할 수 있으면 준이 연주하는 걸 그대로 써도 괜찮을 겁니다.”

“그럴까요?”

벤자민 교수의 말에 사라 로트는 혹하면서도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너무 악보대로의 연주라서요. 전 악보와 맞지 않더라도 그레이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연주였으면 좋겠어요.”

“그건 이제부터 배워야겠죠.”

벤자민 교수는 어제 봤던 영화를 떠올렸다. 제이슨이 텔레비전에 연결해준 플러스+로 서준이 나왔던 작품을 보았다.

목소리만 나오는 어린이 연극과 짧게 나온다는 쉐도우맨 1은 보지 않고, 쉐도우맨 2를 보았다.

연기의 연 자도 모르는 벤자민 모튼과 제이슨 무어가 감탄할 정도로 멋진 변화였다.

“그런 연기를 하는 준이라면 금방 해낼 겁니다.”

“하긴, 준이라면 잘할 거예요. 그럼 준에게 물어보죠.”

마침 도착한 서준에게 사라 로트 감독이 물었다. 뜻밖의 희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서준이 활짝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였다.

“좋아요! 제가 연주하고 싶어요!”

“그럼 2주 동안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네!”

두 번째 연습은 캐서린의 연주와 서준의 다른 곡들을 들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열심히 그동안의 연습을 되짚었던 캐서린은 벤자민 교수와 사라 감독이 만족할 정도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물론 몇 군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연주와 맞지 않는 곳이 있긴 했다.

“고쳐야 할 부분이 보이긴 하지만 2주 안에 끝낼 수 있겠네요.”

“다행이네요.”

다음은 서준의 차례였다. 다들 기대 어린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기대대로 서준은 악보에 충실한 멋진 연주를 보여주었다. 벤자민 교수도, 오늘도 따라왔던 제이슨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준의 연주를 들었다.

“그럼 마지막 곡을 들어볼까?”

“오버 더 레인보우 말이죠?”

서준의 말에 제이슨 무어도, 사라 로트도 눈을 반짝였다. 캐서린과 폴도 기대 서린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

벤자민 모튼 교수가 작곡한, 서준의 차기작인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의 마지막을 장식할 곡이었다.

“그래. 할 수 있겠니?”

“네!”

서준이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리고 턱을 괬다.

서준은 고민했다. 지금까지처럼 악보에 충실한 연주를 할까, 아니면 촬영 때 보여줄 연주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서준이 기대로 가득한 사람들의 눈빛에 웃으며 능력을 발동했다.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이 발동됩니다.]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중하급]

유일무이한 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홀로 바이올린 연주법을 터득했습니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선율을 타고 흐릅니다.

연주자가 느끼는 감정의 일부를 청자에게 전달합니다.

그 세계의 유일무이한 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

인간이 버리고 간 바이올린에 빠져 무리에서 쫓겨났다. 그런데도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블린은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천재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멋진 연주를 끌어냈다.

자신의 감정을 음악으로 전하고 적들을 감화, 굴복시켰다.

‘물론, 몬스터의 연주라서 날것 그대로긴 하지만 말이야.’

거칠고 난폭하다. 하지만 이만큼 ‘그레이’에게 어울리는 연주법도 없었다. 서준이 든 활이 현을 따라 미끄러졌다. 폭력적인 음색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 * *

서준이 바이올린을 켰다. 엉성한 자세로 시끄러운 곡을 연주했다. 그 모습에 연습실에 있던 누구도 속지 않았다.

벤자민 교수의 말이 들리고 서준은 자세를 바로 했다. 금세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저건 못 이겨.”

“이길 생각이었어?”

연습을 잠시 쉬며 숨을 돌리던 캐서린의 말에 폴이 웃으며 말했다.

폴 오든은 연습이 없는데도 레슨에 참여했다. 사라 로트 감독은 촬영 준비 때문에 바빠 조감독인 에밀리와 번갈아가며 들렀다. 가끔 건네는 조언이 도움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준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 연기에 기죽어서 연기를 못하는 게 바보 같아졌어.”

“그건 그래. 저 연기에 압도당해서 연기를 못하면 앞으로 배우 되긴 힘들지. 준만큼 연기하는 배우들도 있을 텐데…….”

“음. 있을까?”

“어딘가 한 명쯤은 있지 않겠어?”

캐서린의 말에 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약하게, 좀 더 약하게!”

서준의 연주가 들리고 제이슨 무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애 첫 독주회를 준비하느라 바쁘다던 제이슨 무어는 서준의 오버 더 레인보우를 들은 이후 종종 연습실에 들러 서준의 연주에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좀 더 손가락을 써. 강하게 누르렴.”

제이슨이 영화 촬영을 돕게 하면서 독주회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내게 하려고 했던 벤자민 모튼이 미소를 지었다.

제자가 다른 곡을 연주하면서 숨 돌리기를 바랐는데, 서준의 연주에 빠져버렸다.

의도했던 방향과는 다르기는 했지만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은 제자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의 가르침대로 서준의 연주가 변해갔다. 어느새 촬영 준비라는 걸 잊고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를 가르치는 데 푹 빠진 두 선생님 덕분에 서준의 실력은 날로 향상했다.

‘확실히 선생님하고 교수님하고 가르치는 차이가 있긴 해.’

정이슬의 가르침이 서준의 부탁대로, 악보와 교과서적 자세에 충실했다면 벤자민 교수는 좀 더 자유로운 자세를 유도했다. 게다가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을 쓰면서도 다듬어지는 느낌이 신기했다.

‘감정은 그대로 전하면서도 날카로웠던 음색이 사라지고 있어.’

서준은 신이 나 연주를 계속했다.

캐서린과 폴이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영화 촬영 준비가 아니라 그냥 바이올린 독주회 연습 같은데?”

“저 한 곡은 아마 세상에서 준이 제일 잘할 거야.”

“그러게. 아, 오늘로 레슨도 끝이고 모레면 촬영 시작이네.”

“으. 긴장된다. 진짜 촬영장에서의 준은 어떨까?”

대충 예상이 가긴 했다. 캐서린과 폴이 서준을 보았다. 집중하는 사람은 멋있다던데 서준은 아예 반짝반짝 빛이 났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못하진 않을 거야.”

연습실 가득,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가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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