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109화 (10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09화

새해가 되면 끝날 것 같았던 정이슬의 바이올린 수업은 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이올린 연습이 끝나면 서준과 정이슬은 연습실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제는 서준이를 가르치는 건지 같이 연주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하하하.”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교수님들이라면 좀 더 가르칠 게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아직 학생이라 모르는 게 많으니까.”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고마워요, 선생님.”

서준의 말에 정이슬이 미소를 지었다. 서준을 가르치는 시간이 정이슬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었다.

세상에는 상상도 못 한 천재가 있다는 거. 그리고 천재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거.

서준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정이슬의 실력은 쑥쑥 늘었다. 학교로 돌아가 얼른 모두의 앞에서 연주해 보고 싶었다.

그런 정이슬을 보면서 서준도 선생님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이슬은 뛰어난 서준의 습득력에 잠깐 좌절하기도 했지만 금세 기운을 차리고 좋은 양분으로 삼았다.

“대본 읽어봤는데, 나는 어떻게 나올지 짐작도 안 가더라. 이게 일반인이 악보를 읽는 느낌인가? 서준이는 대본 읽으면 장면 장면, 상상이 돼?”

“감독님 연출법에 따라서 다르긴 한데, 대충 감은 잡혀요. 음악으로 따지면 지휘자마다 느낌이 다른 것처럼요.”

“아. 그렇구나. 그래도 대본 자체로는 정말 재미있었어. 이게 그대로 영화가 되는 거야?”

정이슬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고 중간에 대본이나 연출이 바뀌어서 느낌이 다를 수도 있어요.”

“그래? 어떤 영화가 나올지 진짜 궁금하다.”

먼저 벤자민 모튼의 곡을 듣고 대본을 본 탓인지 대본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음악이 흘렀다.

찰떡같이 어울리는 곡과 대본에 정이슬은 영화가 얼른 개봉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촬영도 안 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근데 언제 촬영 시작해?”

“감독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아마 5월 중에 미국 가지 않을까 싶어요. 2주 동안 연습하고 6월부터 촬영 시작한대요.”

“5월이라…… 이제 얼마 안 남았네?”

“네. 빨리 5월이 됐으면 좋겠어요.”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이만큼 연습 기간이 길었던 것도 처음이었다.

중간에 다른 촬영할 기회도 있긴 했지만 이미 이 작품에 푹 빠진 서준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아. 얼른 촬영하고 싶다.’

* * *

[제20회, 대학생 영화제, 김수한 금상 수상!]

[나진(이서준)의 팬으로 알려진 김수한 감독 수상!]

-아 얘ㅋㅋ 사인받았다던 나진 첫 팬ㅋㅋㅋ

-감독 됐구나. 하긴 목소리만으로 이서준 팬이 된 것도 보는 눈이 좋은 거겠지.

-영화는 어떤 내용? 청룡 나옴?

-아닠ㅋㅋ 공포영화임ㅋㅋ

-이서준 벌써 일 년 반째 활동 안 함ㅠ

=빨리 돌아와라!!

“서준아 이거 봤어?”

“응. 수한이 형. 감독 됐나 봐.”

“그러게. 진짜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일이야. 나중에 서준이랑 같이 작품 할지도 모르겠는걸.”

“아하하하. 공포영화 찍을 수도 있겠네. 그럼 아빠는 못 보겠다.”

서준의 말에 공항까지 마중 나온 이민준이 울상을 지었다. 아들 작품이긴 한데 공포영화라. 확실히,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그 모습에 서준, 서은혜와 서은찬이 웃었다.

“다호 씨는 며칠 뒤에 갈 거야. 미국에서 필요한 거 있으면 다호 씨한테 연락해.”

“응.”

서은찬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준이 서은혜와 서준을 꼬옥 안았다.

“가끔 휴가 써서 갈게. 몸조심하고. 서준이도 촬영 잘하고.”

“응! 아빠도 잘 있어.”

“우리 이만 갈게.”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서준과 서은혜가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으로 사라졌다. 곧 하늘 위로 LA로 향하는 비행기가 날아갔다.

* * *

“안녕!! 서준아.”

“안녕. 나라 이모!”

“이번에는 LA에서 촬영해서 자주 볼 수 있겠네!!”

“응!”

영화 촬영은 LA에서 진행되었다. 머물 장소를 찾던 서준과 서은혜는 LA에 사는 나라 킴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안다호도 방 하나를 빌리기로 했다.

나라 킴의 집은 2층 저택에 직원들도 있어 호텔 못지않았다. 다들 서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놀란 얼굴로 나라 킴을 바라보았다.

“거봐. 내 말 맞지?”

“정말이네요! 사장님 인맥은 진짜…….”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준과 서은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라 킴이 유쾌하게 웃으며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서준 리랑 친하다니까 아무도 안 믿잖아. 아무리 내가 발이 넓다고 해도 서준 리를 알 리가 없다고. 내가 기저귀도 갈아줬는데!”

“이모!”

“왜, 맞잖아?”

“맞긴 한데…… 그래도 나도 민망하거든?”

서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짐을 옮겨주던 직원들의 입이 움찔거렸다. 하아. 서준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기저귀 이야기는 하지 말고 이유식 줬다고 이야기하면 안 돼?”

“이유식을 줬다고 이야기하면 너무 약하지 않나?”

“그럼, 음.”

어디 인터뷰 같은 곳에서 ‘내가 이서준 기저귀 갈아줬다!’라는 이야기를 꺼낼까 봐 서준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런 서준의 모습에 나라와 서은혜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싫어하니 앞으로 이 이야기는 안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모가 나 오디션 소개해 줬다고 하면 되겠다. 이모가 아니었으면 나 윌리엄도 못 했잖아.”

“……그러네?”

“언젠가 다른 역할로 시작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만큼 임팩트를 남기진 못했을걸?”

서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 킴이 웃으며 서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이모 덕분인 줄 알아.”

“아니거든. 내가 연기를 잘해서 그렇거든?”

투닥투닥 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서은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방에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린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바비큐 기계가 설치된 마당에 나와 바비큐를 직접 구웠다.

맛있는 고기, 소시지구이와 요리들. 서준은 그릴 위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소고기를 보았다. 미국의 소고기답게 크고 두꺼웠다. 다 먹을 수 있을까? 서준은 뱃속의 슬라임을 믿기로 했다.

맥주잔을 든 서은혜와 나라 킴이 고기를 구우며 추억에 잠겼다. 고기 한 점이 서준의 앞 접시에 올라오자 서준이 얼른 집어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맛있다. 서준은 활짝 웃으며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옛날에도 이렇게 놀았는데. 그치?”

“민준이랑 잭 가족만 있으면 딱 좋은데 말이야.”

“잭, 야구 시작한다고 했지?”

“응. 꽤 잘해. 그래서 아예 그쪽으로 나갈 생각인가 봐.”

그 말에 서준은 웃음이 나왔다. 몬스터 인형을 주지 않으면 엉엉 울던 그 꼬마 아이가 벌써 진로를 고민할 시기가 되었다.

“서준이는 더 커서도 연기할 거지?”

“응! 오래오래 할 거야.”

“좋아하는 걸 오래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열심히 해.”

킹즈마켓의 사장 자리에 올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라 킴이 웃으면서 말했다.

* * *

이틀 후, 서준과 서은혜는 웨일 스튜디오에서 준비한 연습실로 향했다. 일찍 온 모양인지 연습실에는 사라 로트 감독과 에밀리 조감독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 준! 반갑습니다. 어머님.”

에밀리가 얼른 의자를 준비했다.

“너무 일찍 왔나요?”

“아뇨. 이제 슬슬 준비하려던 참이었어요.”

그 말대로 에밀리는 두 사람의 의자 말고도 세 개의 의자를 더 준비했다.

“같이 연습할 아역 배우와 레슨해 주실 교수님께서 오실 거에요. 준의 연주를 대신해 줄 교수님 제자분도 오시고요. 인사도 나눌 겸 다른 아역 배우도 올 예정이에요. 어머님은 연습할 때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사라 로트의 말에 서준과 서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두 아역 배우와 아역 배우의 보호자들이 도착했다. 에밀리는 보호자들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사라 로트 감독이 의자에 앉은 세 아이를 서로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주인공 그레이 역을 맡은 서준 리 배우.”

그 말에 두 아이가 숨을 흡! 들이마셨다. 지금까지 아무도 주인공 역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그게 서준 리였다니!

같은 연기 학원에 다니는 배우들 사이에서 서준 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서준 리처럼 유명해지고 싶었고 멋진 연기를 하고 싶어 했다.

“이쪽은 레베카 역을 맡은 캐서린 밀러 배우.”

사라 로트가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서준보다 약간 키가 큰 금발의 아이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이쪽은 조지 역을 맡은 폴 오든 배우.”

장난꾸러기같이 생긴 남자아이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서준도 씨익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안녕. 난 서준 리라고 해. 준이라고 불러줘.”

“난 캐서린이야.”

“난 폴. 잘 부탁해!”

서준과 아이들이 악수를 하고 있는데 사라 로트 감독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벤자민 모튼 교수. 사라 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오셨나 보다. 모시고 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사라 로트 감독이 연습실을 떠나고 우물쭈물 대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면 나중에 사인해 주지 않을래? 영화 엄청 재미있게 봤어.”

“그래. 너도 네가 출연한 영화 가르쳐 주지 않을래? 찾아볼게.”

“으음. 내가 나온 영화는 별로 재미없을 거야. 전부 망했거든.”

캐서린의 말에 서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망한 영화라도 넌 열심히 했잖아. 난 영화보다 네 연기를 보고 싶어. 우린 이제부터 같이 연기해야 하니까. 폴도 가르쳐 주면 좋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도 상대방이 어떤 연기를 하는지 아는 편이 훨씬 이해가 빨랐다.

간단한 역할이라면 모르겠지만, 캐서린과 폴은 서준과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맞출 예정이었기에 더 중요했다.

서준의 말에 캐서린과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유명한 배우는 뭔가 다르구나.

“그렇구나. 알았어. 가르쳐 줄게.”

“연락처도 가르쳐 줘.”

“오. 나 준하고 연락할 수 있는 거야? 내 친구들은 아무도 안 믿을걸!”

폴과 캐서린이 신난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 서준도 유쾌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 후, 사라 로트 감독이 두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아마도 벤자민 모튼 교수님인 것 같은 중년인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마른 체형이긴 했지만 그렇게 약해 보이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마음씨 좋은 선생님 같았다.

함께 들어온 이십 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옷차림은 벤자민 모튼과 마찬가지로 단정했지만, 눈빛만은 사나웠다. 주눅이 든 캐서린과 폴이 신나게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이분은 우리 영화 음악을 만들어주신 분이야.”

“벤자민 모튼입니다.”

벤자민 모튼이 정중히 말했다. 어른에게서 이렇게 정중한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던 탓에 캐서린과 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서준이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모튼 선생님. 서준 리에요.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준. 잘 부탁합니다.”

서준의 모습에 캐서린과 폴도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벤자민 모튼이 입꼬리를 올리자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 상냥함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졌는지 벤자민 모튼이 먼저 소소한 이야기를 꺼내자 서준과 아이들도 편하게 입을 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홀로 떨어져 있는 남자는 별말 없이 서 있었다. 못마땅함이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양새였고 꽤 잘 숨긴 것처럼 보였다.

다만, 여기가 눈빛으로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과 그것을 파악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감독이 있는 곳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역 배우라도 배우는 배우. 캐서린과 폴이 가운데 서 있는 서준을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서준도 등 뒤로 손짓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차렸나 보다.

“이쪽은 제 제자입니다.”

“제이든 무어입니다.”

하지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제이든 무어의 못마땅한 눈빛이 금세 잠잠해졌다. 정중해진 제이슨 무어의 태도에 오히려 감독과 배우들이 의아할 정도였다.

그래도 뭐.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 그런 모습이었다면 조금 난감했겠지만 바뀌었으니 다행이었다.

서준이 손을 내밀었다.

“준이에요. 잘 부탁해요.”

“그래. 잘 부탁한다.”

아이들도 제이슨 무어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럭저럭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만족한 표정의 벤자민 모튼이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그동안 각자 연습했던 걸 보기로 할까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봐야 앞으로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알 수 있겠죠.”

“네!”

그 말에 영화 속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야 하는 캐서린과 서준이 대답했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