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06화
서준 리에게 캐스팅 제안을 보낸 후, 사라 로트 감독은 시놉시스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제작사에 뿌렸다.
어디든 하나 걸리겠지 생각했는데, 웬걸 마린사가 걸려 버렸다. 시놉시스를 보낸 사라 로트가 놀랄 정도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약속 날, 사라 로트 감독이 만난 사람은 페일런 박이었다.
마린사의 자회사에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페일런과 이제 겨우 두 편의 히어로 영화를 끝낸 감독, 사라 로트 사이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시놉시스는 잘 봤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주인공으로 서준 리를 고려하고 계시다고요.”
날카로운 페일런의 눈에 사라 로트는 허리를 펴고 앉았다. 할리우드에 인종차별은 만연했다.
화이트 워싱은 기본이고 고정된 인종별 이미지까지. 진 나트라 역에 딱 알맞은 서준 리조차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역할을 맡지 못할 뻔했다.
‘마린사의 대외적 이미지는 다르긴 하지만.’
그런 대외적 이미지를 만든 사람이 라이언 윌 감독이었다. 서준 리의 캐스팅 때의 라이언 윌 감독의 무용전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음. 나도 해볼까. 사라 로트 감독은 팔짱을 낄까 말까 고민했다.
“네. 그렇습니다.”
페일런 박의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었다.
“캐스팅됐습니까?”
“네? 아뇨. 아직.”
“감독님은 서준 리가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할 것 같습니까?”
그건 이상한 질문이었다. 이쪽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준 리가 거절할 것이라는 예상이 깔린 물음이었다.
두 눈을 깜빡인 사라 로트가 대답했다.
“일단 시놉시스와 대본은 서준 리의 한국 소속사인 코코아엔터에 보냈습니다. 곧 연락이 오겠죠.”
“아, 서준 리는 미국에 에이전시가 없었죠.”
그 말에 사라 로트 감독의 고개도 옆으로 기울었다. 사라 로트도 이번에 서준 리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일개 영화배우의 에이전시 유무를 페일런 박이 알고 있다고?
“로트 감독님. 조건이 있습니다.”
“네.”
본론인가. 사라 로트 감독은 등을 곧게 세웠다. 이제 팔짱을 낄 타이밍인가!
“서준 리가 출연한다면 제작비를 두 배로 드리죠.”
“……네?”
페일런의 말에 사라 로트의 눈이 아주 크게 떠졌다. 이건,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던 페일런이 가면을 벗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리처드 보윈을 따라 해봤지만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서준 리의 티켓 파워가 대단합니다. 스트리밍 사이트, 플러스의 드라마만 봐도 차기작의 관객 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하.”
사라 로트도 플러스+의 성장을 알고 있었다. 사라도 내의원을 보기 위해 가입했으니까. 엄청 재밌었지. 에밀리와 둘이서 엄청 울었다.
“그런데 쉐도우맨 2 이후로 서준 리가 찍은 할리우드 영화가 없습니다.”
사라 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린, 마린의 자회사들, 그리고 경쟁 제작사에서 서준 리에게 보낸 대본들까지, 저희 쪽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만 해도 꽤 됩니다. 근데 그중에서 서준 리가 선택한 작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게다가 이번 영화가 음악 영화죠?”
“네? 네.”
페일런 박이 미소를 지었다.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음악 영화에 대한 사랑이 큽니다. 다른 나라에서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기도 하죠. 생각해 보세요. 음악 영화라는 장르에 주인공이 한국인인 영화. 한국에서만 얼마만큼의 이익을 얻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페일런 박이 내놓는 숫자에, 사라 로트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여기에 서준 리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전 세계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쉐도우맨 2가 개봉됐던 그때보다도 드라마가 성공한 지금 훨씬 늘었을 겁니다. 제작비 두 배요? 그 정도야 금세 메꿀 수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더 드리죠.”
페일런의 눈이 번뜩였다.
“단, 서준 리가 출연한다는 확신이, 계약서가 있어야 합니다.”
마린사에서 반대할까, 서준 리를 주인공으로 섭외해야 하는 온갖 이유를 떠올렸던 사라 로트는 할 말을 잃었다.
“어, 서준 리가 출연하지 않는다면요?”
“시놉시스가 좋더군요. 감독님께서 승낙하신다면 제작은 그대로 저희 쪽에서 할 겁니다. 그 대신 제작비가 줄어들겠죠.”
페일런 박의 말에 사라 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영화 제작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라 로트의 음악 영화가 제작될 곳은 마린사의 자회사로 로맨스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 등의 장르를 제작하는 ‘웨일 스튜디오’였다.
* * *
“마린사요?”
에밀리가 깜짝 놀라 사라 로트를 바라보았다. 사라 로트가 테이블 위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응.”
“하긴 마린사 자회사에 히어로 영화 말고 다른 장르 영화를 만드는 곳도 있었죠. 웨일 스튜디오였나? 마린에 고래에 완전 바다네요.”
“웨일에서 만들 거래.”
에밀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라 로트가 그린윙으로 이름을 알렸다고는 하나, 음악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장르였다. 혹시 제작사도 못 구할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나 보다.
“마린사, 아니, 웨일이라면 괜찮겠죠. 근데 뭐 보고 제작한다고 한대요?”
에밀리의 질문에 사라 로트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서준 리가 출연한다는 조건으로 제작비 두 배래.”
“두 배요?!”
“필요하면 더 줄 수도 있다더라. 배우로서든 티켓 파워로서든 내 생각했던 것보다 서준 리가 대단했나 봐.”
사라 로트가 에밀리에게 페일런 박이 해줬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에밀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음. 히어로 영화가 아니라서 제작비가 적긴 하지만, 두 배라니……. 하긴, 음악 영화 중에 수익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인 경우가 몇 번 있긴 했어요. 거기다 주연이 자국인이라면…… 마린사가 그렇게 나오는 이유도 이해가 가요.”
“서준 리에게서 얼른 답변이 도착했으면 좋겠네.”
“일단 일부터 하죠. 서준 리는 둘째치고 제작사는 결정됐으니까, 제작진도 꾸려야죠.”
“그래서 들고 왔어. 마린사에서 음악 영화 장르에서 일했던 스태프들의 프로필을 주더라고.”
사라 로트가 자리에 앉자, 에밀리도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 모두 펜을 들었다.
“바이올린 연주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전문가를 써야지. 배우들은 전문가의 연주에 맞춰서 바이올린의 운지법이나 바이올린 활을 쓰는 타이밍을 익히고.”
에밀리의 물음에 사라 로트가 대답했다. 사라 로트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히어로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감각이 필요했다.
사라 로트가 재밌게 보았던 음악 영화를 제작했던 스태프가 보였다.
“그 사람은 평이 안 좋아요.”
“그래?”
종이가 한 장 넘어갔다. 두 사람의 눈과 입이 따로 움직였다.
“역시 바이올린을 조금이라도 배운 배우가 낫겠죠?”
“아니. 그런 기준을 세우면 연기 잘하는 배우를 고르기 힘들어. 바이올린이 기본 교육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아. 그렇겠네요.”
다시 한 장 넘어갔다.
“일단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연기 잘하는 배우를 찾은 다음에 바이올린을 연습시켜야겠지.”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글쎄.”
프로필을 체크하던 펜을 멈춘 사라 로트가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자세만 연기하는 데도 오래 걸리려나?”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연습 기간은 넉넉하게 잡는 게 좋겠어요. 아예 바이올린을 연주할 캐릭터들은 모아서 레슨을 할까요?”
“그것도 괜찮겠네.”
에밀리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야외 촬영이 있어서 날씨도 따뜻해야 하고. 개봉이야 웨일에서 알아서 정하겠지만 그래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죠. 배우들 일정도 있으니까, 그것도 고려해야 하고요.”
“음.”
사라 로트도 앞으로의 일정을 떠올렸다.
“서준 리의 답변은 언제 도착할까요? 제작비가 나와야 뭘 해볼 텐데. 좋은 카메라 쓰고 싶어요! 바이올린도 좋은 거 쓰고! 다른 것들도 비싼 거로!”
“일단 처음 계산했던 제작비로 해보자. 나머지는 홍보비로 돌려도 괜찮겠지.”
사라 로트 감독과 에밀리 조감독이 열심히 촬영진을 구성하고 있을 때, 메일이 도착했다. 서준 리의 새로운 에이전시에서 온 메일이었다.
* * *
서준 리의 새로운 에이전시, 킹즈 에이전시에 서준과 관련된 서류를 보낸 2팀이 시원섭섭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긴, 우리한테 할리우드는 힘들죠. 한국에서 현지 상황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그래서 다른 배우들도 다 에이전시랑 같이하죠.”
“아예 지사를 만드는 방법도 있긴 한데, 할리우드 배우가 서준이뿐이라 서준이가 활동 안 할 때는 돈만 나가서 그것도 힘들고.”
“그래도 아쉽긴 하네요.”
“우리보다야 매니저인 팀장님이 더 아쉽겠죠.”
그 말에 서준에게 줄 대본을 챙기고 있던 안다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근데 팀장님은 미국에 가도 괜찮지 않아요? 영어도 2년 사이에 많이 늘었잖아요. 큰일은 다 에이전시에서 해주고 서준이 보살피는 거라면 꼭 미국에 빠삭한 사람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데요.”
“맞아요. 브블도 화이트도 해외 행사 때는 한국인 스태프들도 꽤 가잖아요.”
“확실히 계속 일하던 사람이 있는 게 편하긴 하죠.”
그때, 직원 한 명이 2팀 사무실로 들어왔다.
“팀장님. 사장님이 부르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다호가 2팀 사무실을 뒤로하고 사장실로 향했다. 안다호도 씁쓸하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코코아엔터와 서준이 해외 작품에 대한 계약을 예외로 뒀을 거라는 건 생각도 못 했다.
‘할리우드 영화 촬영 때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니야. 한국에서만이라도 최선을 다하자.’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안다호가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서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네. 앉으세요.”
안다호가 소파에 앉기 위해 시선을 내리자, 지금까지 못 봤던 게 의아할 정도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아이가 있었다.
“서준아?”
“안녕하세요! 다호 형!”
사장실 안에는 사장인 서은찬 말고도 집에 있어야 할 서준이 있었다. 놀란 안다호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자리에 앉았다.
“서론은 접어두고 본론부터 말하자면, 서준이 해외 촬영에도 다호 씨가 따라가 줬으면 좋겠습니다.”
“……예?”
서은찬의 말에 안다호가 되물었다. 서준과 서은찬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다호 형, 우리 계약서 다시 썼어요!”
“……다시?”
“원래대로라면 서준이가 해외 활동을 할 때는 킹즈 에이전시의 직원이 매니저를 맡습니다만, 새로 계약서를 쓴 지금은 다호 씨가 그대로 서준이를 서포터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월급도 더 나오죠.”
서은찬이 웃으며 말했다. 안다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다호 형이 영어 공부하는 거 봤거든요.”
서준은 대본을 가지고 올 때마다 영어책을 들고 오는 안다호를 알고 있었다.
서준이 대본을 볼 때나 숙제를 할 때, 할 일을 끝낸 안다호는 손에서 영어단어 책을 놓지 않았다. 쉬는 날의 일정은 항상 영어학원. 때때로 서준과 함께 영어로 대화하기도 했다. 자막 없이 영화도 보고 영어로 쓰인 대본도 읽었다.
WTV 영화제 이후, 안다호는 언제나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호 씨가 서준이의 매니저로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안다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민망했다.
그 모습에 서준이 이히히 웃었다. 이렇게 성실하고 멋진 사람이 자신의 매니저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서준이도 처음 만나는 직원보다는 다호 씨가 함께해 주는 게 마음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겠죠. 다른 일은 다 킹즈 에이전시에서 할 겁니다. 서준이를 서포트하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에이전시에 연락하세요.”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서은찬과 서준의 모습에 감정이 북받친 안다호가 입을 꾸욱 다물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걸 먼저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요.”
서준과 안다호가 서은찬을 바라보았다.
“거절해도 계속 서준이의 매니저로 일할 수 있습니다. 꼭 미국까지 안 가도 됩니다. 다호 씨. 미국에서도 계속 서준이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네! 맡겨만 주십시오!”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미국에서도 잘 부탁해요! 다호 형!”
“앞으로도 잘 부탁해. 서준아.”
결국, 눈물을 찔끔 흘리고만 안다호를 본 서준과 서은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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