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9화
오르체시 광장에 설치된 무대는 생각보다 컸다. 아직 공연 시작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좋은 자리에서 보기 위해 벌써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튜브 영상에서는 이것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작년에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이번엔 큰 거로 설치했대.”
“그렇구나. 엄청 좋다!”
찰리의 대답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명이 설치된 네모난 무대 가운데 걸어 나올 수 있는 일자형의 돌출 무대도 있었다.
패션쇼의 모델들이 걷는 런웨이와 비슷했지만 좀 더 넓고 길이가 짧았다.
‘이쪽으로 걸어 나오면 되겠다.’
생각보다 넓은 무대에 동선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서준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무대 뒤로 가는 길이야.”
찰리의 안내로 향한 무대 뒤는 시끌벅적했다.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번호표를 받고 준비한 음악과 무대 효과를 넣을 타이밍을 적은 종이를 주최 측에 건넸다.
서준도 종이를 주고 번호표를 받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신청서를 확인하던 직원이 제비뽑기를 시작했다.
13팀 중 서준은 맨 마지막이었다.
“이쪽이야. 공연팀은 더 안쪽에서 준비해. 준비할 소품이 많거든.”
찰리를 따라가자 열심히 공연 준비를 하며 합을 맞추는 두 개의 무리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뱀파이어 무리와 늑대인간 무리였다. 뱀파이어들은 멋진 정장을 입고 있었고 늑대인간들은 늑대탈을 벗은 민얼굴이었다.
“삼촌들! 아빠!”
“찰리!”
“꼬리 없는 꼬마 늑대가 왔구먼.”
합을 맞추고 있던 뱀파이어들과 늑대인간들이 찰리를 반겼다. 찰리의 등장으로 잠시 연습이 멈추었다. 다들 물을 마시며 한숨을 돌릴 때, 낯선 남자가 찰리를 향해 걸어왔다. 찰리가 달려가 남자에게 안겼다.
“아빠!”
“……아빠?”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 순간, 얼굴과 호칭이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아차. 찰리는 인간이고 찰리 아빠도 인간이지.
늑대탈이 너무 인상 깊어서 늑대 얼굴만 기억에 남아버렸다. 슬쩍 본 엄마 아빠도 그런 듯, 표정이 얼떨떨해 보였다.
찰리를 꼭 안아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찰리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도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찰리가 축제를 잘 알더라고요.”
부부의 칭찬에 찰리 아빠는 미소를 지으며 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서준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참가자 일행은 무대 제일 앞에 앉을 수 있어요. 이쪽이에요.”
찰리가 앞서 걸어갔다.
“근데 다들 배우야?”
“아니. 우리 아빠는 요 앞에서 식당을 해. 다른 음식도 맛있는데 뵈프 부르기뇽이 제일 맛있어. 나중에 먹어봐.”
서준과 부부가 눈을 깜빡였다. 찰리 아빠, 요리사였구나.
“뱀파이어 대장 삼촌은 와인을 만들고 다른 삼촌들도 본업은 따로 있어.”
“공연은 왜 하는 거야?”
“오르체시는 특산품이 와인인데, 프랑스에 와인이 특산품인 곳은 아주 많거든.”
찰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오르체시에 사람들이 많이 오게 할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핼러윈 축제를 떠올린 거야. 핼러윈 축제는 아주 옛날부터 했는데 생각보다 참가자가 적었거든. 근데 핼러윈 축제도 많으니까 특별한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정말로 몰입할 수 있게 아예 그런 설정을 만들고 지키기로 했대. 그렇게 시작한 여러 가지 이벤트 중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게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의 대결이었대.”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먹는 싸움뿐만이 아니라, 공연까지 이어가자고 아빠가 이야기했어. 첫 공연은 어설프긴 했는데 다들 엄청 좋아했대. 관광객도 많아지고. 그게 좋아서 다들 열심히 하는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연기에서 우리 삼촌들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걸.”
찰리의 말에 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몬스터 연기라니, 여기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좀 하는데.”
“우리 아빤 벌써 10년째 하고 있는걸.”
“나도 그 정도 될 거야.”
이번 생은. 뒷말은 삼킨 서준이 이히히 웃었다. 서준의 말을 들은 부부도 미소를 지었다.
“여기 앉으시면 잘 보여요. 시상식 끝나고 아빠 공연이 있으니까, 그건 다 같이 여기서 볼 수 있어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은 서은혜는 서준과 함께 무대 뒤에서 콘테스트를 기다리기로 했고 이민준은 관객석에서 서준의 무대를 촬영하기로 했다. 찰리는 서준을 따라 무대 뒤에서 콘테스트를 보기로 했다.
* * *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무대 앞이 북적북적해졌다. 여러 몬스터로 분장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부스를 모두 정리하고 온 몬스터사 직원들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 그레이스와 가족들도 무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준 나오겠지?”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는 걸 깜빡 잊었어.”
“나중에 공연 끝나면 만나러 가자.”
가족들과 함께 있는 그레이스의 표정은 활발했다. 가족들도 활기찬 그레이스의 분위기에 안도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불어, 영어, 여러 나라의 언어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지금부터 몬스터 콘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관람객 여러분은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레이스가 허리를 쭉 펴고 무대 위를 보았다.
[1번 참가자. 요정의 춤!]
경쾌한 음악이 흘렀다. 전부 꺼져 있던 무대에 한 줄기 빛이 떨어졌다. 무대 위에 뭔가가 있었다.
하나둘, 조명이 켜지자, 무대가 확 밝아졌다. 무대 가운데 알처럼 웅크려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쭉 펼쳤다. 그와 동시에 등의 날개가 펼쳐졌다.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날개를 가진 요정이 춤을 췄다.
“와아아아!!”
“발레리나인가? 멋지다!”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치던 그레이스가 손을 멈췄다.
“아냐. 난 준을 응원해야 해.”
손뼉 치던 손을 꼭 쥐는 딸의 모습에 그레이스의 부모가 웃음을 터트렸다.
첫 번째 참가자가 무대를 떠나고 두 번째 참가자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웃긴 컨셉인지 페가수스 모형을 탄 참가자가 나타났다.
페가수스의 앞다리는 인형이었고 뒷다리는 참가자의 다리였다. 물론 페가수스 위에 올라간 사람 다리는 모형이었다.
“이랴!”
유쾌한 음악과 함께 참가자가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대 뒤에서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던 참가자들도 빵 터졌다.
수준이 다른 요정의 춤에 기죽어 있던 참가자들이 한결 마음을 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기로 했다.
“어차피 즐기려고 신청한 건데!”
“이거 만드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무대 위에는 올라가야지!”
다시 참가자들이 기운을 내고 한 명 한 명 무대 위로 올라갔다.
마녀와 마법사들이 마법을 부리는 공연. 잭 오 랜턴이 옷장에서 새로 쓸 호박 머리를 고르는 공연. 뱀파이어가 아름다운 여인과 춤을 추다가 목을 깨무는 공연.
짧은 공연들이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서준의 차례가 되었다. 앞 순서의 참가자가 무대 아래로 내려가고, 서준의 순서를 알고 있던 이민준이 카메라를 들어 무대를 찍기 시작했다.
[13번째 참가자. 늑대인간의 변신!]
서준이 준비한 음악은 북소리였다. 내의원의 북소리처럼 묵직한 소리였다.
둥!
무대 양옆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최 측에서 대여해 주는 장치였다. 여러 효과 중에 서준은 연기를 골랐다.
둥! 둥!
관객들의 심장이 북소리에 따라 뛰었다. 무대 옆에 서 있던 서준이 늑대 모자를 꾹 눌러 썼다. 그리고 아주 낮고 작게 으르렁거렸다.
[(선)그림자 늑대인간의 늑대화가 발동됩니다.]
서준의 그림자에서 길쭉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림자 늑대였다. 서준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폭신폭신한 개 발바닥으로 무대를 디뎠다. 서준의 옆에 그림자 늑대가 섰다. 그리고 서준과 그림자 늑대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림자 늑대를 뒤집어쓴 서준의 가짜 늑대 귀와 늑대 꼬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살랑살랑 움직였다.
오른손,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발, 왼발로 바닥을 딛으며 잠시 몸을 움직이던 서준은 사족보행이 편해지자 또 다른 능력을 발동했다.
[(선)구름 고래의 안개가 발동됩니다.]
[(선)구름 고래의 안개-중하급]
하늘을 나는 고래의 숨구멍에서 안개가 피어오릅니다.
안개의 농도와 두께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서준의 몸에서 안개가 스르르 흘러나왔다. 무대를 디딘 두 손과 두 발에 힘이 들어갔다. 서준과 그림자 늑대가 두꺼운 안갯속으로 들어갔다.
* * *
무대 위는 연기가 가득했다. 지금까지 주최 측에서 제공했던 효과 중 가장 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 위가 구름 같은 연기로 가득 차자, 주최 측은 연기를 만드는 기계를 살폈다.
“음. 기계는 멀쩡한데?”
“날씨 탓인가.”
주최 측이 갸우뚱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13번째 참가자를 찾고 있었다. 연기가 너무 짙어서 무대 위에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뭐가 보여?”
“아니, 안 보이는데?”
그때, 연기 속에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까만 그림자를 본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둥! 둥!
북소리가 울리고, 또 한 번 까만 그림자가 무대를 가로질렀다. 조금 전보다 많은 사람이 그림자를 목격했다. 네발이 달린 무언가 같았다.
“개? 늑대?”
“늑대면…… 늑대인간인가?”
“근데 네발로 걷지 않았어?”
둥! 둥!
그림자가 지나갔다.
둥! 둥!
그림자가 스쳤다.
“근데…….”
관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점점 크기가 커지지 않아?”
네발 달린 짐승이 점점 그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마치 사냥을 하는 것처럼 제 몸을 숨기고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무대의 맨 뒤쪽부터 지그재그로 관객석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둥! 둥! 둥!
빠르게 들려오는 북소리와는 달리,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명과 연기가 만들어낸 흐릿한 그림자는 정말 늑대 같았다.
늑대가 천천히 어슬렁어슬렁 무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했다. 무대의 4분의 1지점에서 늑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선)어린 사자왕의 위엄이 발동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연기 속에서 늑대는 점점 사람이 되어갔다. 밝은 조명이 서준의 뒤에서 비추자, 진짜 후광처럼 보였다.
능력에 후광까지, 서준에게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말을 잃고 무대만 바라보았다.
“와…….”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이 실렸다. 기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바람에 실려 점점 사라졌다.
완전히 일어선 늑대가 옆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연기가 걷히고 늑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힘이 느껴졌다. 귀가 쫑긋 움직였다. 꼬리도 살랑살랑 움직였다.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던 찰리와 찰리 아빠가 감탄했다. 무대 뒤까지 관객들의 탄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표현할 줄은 몰랐는데, 꼬마 늑대가 대단하네. 조명하고 연기를 잘 이용했어. 그림자 연극처럼 말이야.”
“멋지다!”
그렇다고 모두 저렇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무대 위를 걷고 있는데도 늑대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늑대인간을 잘 연기하기 위해 늑대에 관한 공부를 했던 찰리의 아빠에게는 그게 보였다.
어슬렁어슬렁. 관객들은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런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 안갯속 그림자 늑대의 움직임이 이족보행 중인 늑대인간에게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족보행과 이족보행은 그 움직임 자체가 다를 텐데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정말 자연스러워서 무대 위에 서 있는 존재가 조금 전까지 늑대였던 인간처럼 느껴졌다.
둥둥! 둥둥!
빠른 북소리가 들렸다. 돌출무대 가장 끝까지 나왔던 서준이 뒤를 돌았다. 푸른 빛이 도는 회색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둥둥! 둥둥!
무대 위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관객석을 등지고 천천히 무대 쪽을 바라보며 걷던 서준은 점점 속도를 냈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보름달처럼 반짝 빛났다. 서준에게서 흘러나온 안개가 피어올라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연기 속에서 두 발로 달려가던 서준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굽혔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늑대가 되었다.
서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늑대가 서준의 몸을 뒤덮었다. 늑대 꼬리가 살랑 움직였다.
관객들은 연기 속에서 점이 되어가는 늑대만 바라보았다.
두웅!
아주 큰 북소리가 들리고 모든 조명이 꺼졌다. 곧 다시 불이 켜졌다. 안개도 늑대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 깨끗한 무대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관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아아!
와아아아!
열심히 박수를 치던 그레이스가 깨달았다.
“아! 준이다!”
“뭐?”
“아빠! 준이야. 나 찾아줬던 늑대인간!”
그레이스의 말에 가족들이 미아보호소에서 봤던 아이를 떠올렸다. 늑대 머리 인형 같은 탈을 머리에 쓰고 있던 아이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옷이 똑같아.”
“진짜 준이라니까?”
“와. 어린애가 콘테스트 나간다길래 기대도 안했는데…….”
그때도 잘 만들어진 복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정말 대단했다.
“준은 연기를 했니? 현대 무용 같은 거나.”
“음. 모르겠어.”
“근데 진짜 멋지다. 그냥 뛰고 걷는 것뿐이었는데 정말 대단했어.”
“이거면 일등 하겠지?”
“당연하지!”
그레이스도 그레이스의 가족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콘테스트의 일등이었다.
서준이 무대 뒤로 돌아오자 서은혜가 준비한 물을 건넸다. 꼴깍꼴깍 마시고 있는데 찰리가 눈을 반짝였다.
“너 엄청 대단하잖아!”
“내가 좀.”
찰리의 칭찬에 서준이 히죽 웃었다. 찰리의 아빠도 뱀파이어들도 늑대인간도, 콘테스트 참가자들도 무대 뒤로 돌아온 서준을 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꼬마 늑대가 대단하네!”
“우리도 지지 않게 열심히 해야겠는걸!”
환호하는 관객들을 진정시킨 주최 측 직원이 나타났다. 모여 있던 콘테스트 참가자들에게 시상식을 알리고, 찰리 아빠와 삼촌들에게는 공연의 시작 준비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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