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96화
“여기가 오르체시구나.”
서준과 부부가 오르체시에 도착했다. 아직 핼러윈 축제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가볍게 분장을 해서 핼러윈 축제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서준과 부부는 숙소를 잡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은 파리에서 먹고 왔다.
시간을 살펴보던 이민준이 입을 열었다. 약속 시각이 다 되었다.
“일단 난 광장에 가 볼게. 서준이는 엄마랑 다른 데 구경하고 올래?”
“같이 가면 안 돼?”
“음. 지금은 바쁠 텐데. 물건 옮긴다고 위험할 거야. 나중에 가자.”
“알았어!”
“우리 와인 박물관에 가 있을게. 그다음에는 어디 갈지 모르겠는데, 끝나면 연락해.”
“알았어. 둘 다 조심하고.”
서준, 서은혜와 헤어진 이민준은 핼러윈 축제가 열릴 광장 쪽으로 향했다.
오르체시의 광장은 축제 준비로 시끌벅적했다. 광장과 도로를 경계선으로 나누고 경비원들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광장 안은 주최 측의 커다란 천막과 참가 가게들의 부스들이 설치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놓인 종이 상자들과 의자, 책상들이 널려 있는 광경에 새삼 일하러 왔다는 생각이 들어 이민준이 뒷목을 잡았다.
“김희상. 두고 보자.”
이리저리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입구에서는 경비원들이 출입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출입증이 없는 이민준은 휴대폰을 들어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울렸다.
“왔다!”
화면 가득히 이민준 대표의 이름이 떴다. 2시쯤 방문하겠다고 연락이 왔지만 1시부터 휴대폰만 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팀장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직원들도 안쓰러운 눈빛으로 광장 입구로 달려가는 팀장님을 바라보았다.
“우리 회사도 좋고, 우리 회사 대표님들도 좋은 분들이긴 한데…….”
“솔직히 상사는 다 어려워요.”
“팀장님, 힘내세요.”
다들 팀장을 응원했다.
여기 상사가 와서 힘든 한 사람과 휴가 기간에 일하러 온 한 사람이 있었다.
팀장과 이민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팀장은 준비해 두었던 출입증을 이민준에게 건넸다.
출입증을 목에 건 이민준이 광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쪽입니다.”
“예.”
팀장은 이민준에게 주최 측에서 배부한 행사 진행 안내 팸플릿을 주고 광장 안을 안내했다.
지금 설치되고 있는 중앙의 커다란 무대에서 무대 행사가 진행되고 여기저기 한 줄씩 설치된 부스에서 먹을거리와 기념품을 팔 예정이었다.
오르체시 시청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미아보호소와 응급 치료소를 둘러보았다.
‘여긴 기억해 둬야겠네.’
사람 많을 때는 이렇게 커다란 곳도 찾기 쉽지 않을 터였다.
“이쪽은 푸드트럭 존입니다.”
“가게가 많네요.”
“예. 회차를 거듭할수록 인기가 많아졌답니다. 처음에는 광장의 반 정도만 사용했었는데 이제는 전부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부스로 가 볼까요?”
“네.”
팀장이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안내 팸플릿에 보시면 음식점 표시는 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음료수를 파는 곳은 파란색, 음식을 파는 곳은 초록색입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곳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외국 회사나 좀 커다란 회사 같은 경우에는 한 곳에 몰려 있습니다. 저희 부스도 그쪽에 있고요.”
팸플릿에 있는 지도에는 서준이에게 사주기 위해 해외 직구까지 고려했던 이민준이 본 적 있는 장난감 회사들과 인형회사들의 로고가 보였다. 그중 몬스터사의 로고가 눈에 띄었다.
“여기입니다.”
몬스터사의 부스는 몬스터사의 인형과 학용품, 금속 배지를 진열하느라 바빴다.
인형이 든 종이 상자를 나르던 직원도, 가지런하게 진열하던 직원도 엉거주춤 서서 팀장과 함께 나타난 대표, 이민준을 바라보았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세요.”
이민준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 말에 직원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부스의 간판과 내부 이곳저곳을 멀찌감치 떨어져, 눈으로 살펴본 이민준이 입을 열었다.
“뭐 필요한 건 없습니까?”
“오르체시 시청에서도 많이 도와주시고 다른 부스의 회사들도 서로 돕고 있습니다. 제품을 많이 파는 경쟁이 아니라, 정말 참가하는 회사들까지 즐거운 축제 같습니다.”
그저 대표라는 직책이 부담스러울 뿐이지 이민준과 김희상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힘든 일이 있거나 제가 필요할 때는 바로 연락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벌써……?”
팀장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30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열심히 일하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직원들이 속으로 외쳤다. 아니, 벌써라니!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죠!
이민준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휴가 중에 잠시 들른 거라서요. 다들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고. 그럼 믿고 가 보겠습니다. 다들 힘내세요. 아, 이건 격려금입니다. 일 다 끝나시고 맛있고 비싼 거 드세요.”
“네, 감사합…….”
팀장에게 봉투를 건넨 이민준 대표는 폭풍처럼 사라졌다.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금세 끝났다. 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쪽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짐을 가지러 창고에 들렀다가 부스에 온 직원이 팀장을 보다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온다던 이민준 대표를 찾았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최예슬이 말했다.
“대표님 가셨어요.”
“벌써요? 진짜 가셨어요?”
“네. 그것보다 팀장님. 조금 전에 들으셨어요?”
“?”
최예슬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지금 휴가 중이시라는 거요.”
“그러고 보니 기사에서 가족여행이시라고…….”
“출장 겸 가족여행을 온 줄 알았는데, 휴가 내고 오신 거였어요?”
휴가 중에 일이라니, 그것참 안 됐다.
빠르게 사라진 것도 이해가 갔다.
* * *
이민준이 광장에 가 있는 사이, 서준과 서은혜는 오르체 시의 와인 박물관에 들렀다.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프랑스 지도에 오르체시 이외의 포도밭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포도밭 많다.”
“그러게. 이래서 프랑스 와인이 유명하구나.”
서준과 서은혜는 천천히 와인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와인의 종류와 이름의 유래, 와인이 만들어지는 순서대로 작은 인형들이 일하고 있었다.
엄마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면서 와인 박물관을 구경하니 금세 끝이 보였다.
“와인 시음해 보시겠어요? 어린이용 와인도 있어요.”
직원의 말에 서준과 서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체 시의 특산품답게 포도 향이 확 났다.
달달하고 포도 맛이 진한 게 한국에서 마셨던 포도 주스보다 맛있었다. 서은혜도 맛있는 듯 만족한 표정이었다.
“아빠 와인도 사 갈까?”
“응!”
직원의 추천으로 와인을 사고 서준이 마실 어린이용 와인, 그러니까 포도 주스를 샀다.
두 손 무겁게 와인 박물관을 나오자, 문 앞에 이민준이 서 있었다.
활짝 웃는 아빠의 얼굴에 서준과 서은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빠! 엄청 빨리 왔네?”
“다들 잘하고 있더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한 게 있을 텐데, 괜히 참견했다가 망치면 직원들도 나도 큰일이지.”
“그렇겠네. 요 앞에 연주회 한다더라. 그거 보러 가자.”
“그래. 이건 와인이야?”
이민준이 자연스럽게 서은혜에게서 와인이 든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아빠. 이거 엄청 맛있다? 어린이용 와인도 있어.”
“어린이용 와인?”
“포도 주스야.”
그 말에 이민준이 빵 터졌다. 서준과 서은혜도 웃으면서 연주회가 열릴 소극장으로 향했다.
연주회가 있을 소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놀러 온 관광객들과 오르체시에 사는 시민들이 섞여 있었다.
적은 입장료에 자리는 선착순이었다. 서준과 부부는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준아, 보여?”
“응!”
작은 극장인데도 객석의 단 차이가 있어서 뒤에 있는 사람도 잘 보였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무대 옆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두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니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나왔다. 서준과 부부도 손뼉을 쳤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풀고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두 연주자는 유명한 클래식을 연주했다. 피아노 솔로, 바이올린 솔로. 두 악기의 합주. 연주는 아름다웠다. 유명한 연주자들은 아니지만 좋은 연주였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소라면 좀 더 이어질 연주였지만 오르체시의 핼러윈 축제가 시작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마이크를 들었다.
“모두 오르체 시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핼러윈 축제도 마음껏 즐겨 주시고 부디 행복한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
연주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길을 거니는 사람들이 모습이 몇 시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들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 마녀의 빗자루를 들거나 붕대를 휘감고 미라 흉내를 내고는 했다.
어른들은 악마 뿔이 달린 머리띠나 천사 링이 달린 머리띠를 쓰는 가벼운 분장부터 인형 탈을 뒤집어쓴, 본격적인 분장까지 있었다.
서준과 부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느새, 몬스터들이 오르체시의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번 생에 처음 보는 광경에 서준은 상기된 얼굴로 엄마 아빠의 손을 잡았다.
“엄마 아빠! 우리도 얼른 가자!”
“서준이 옷이 숙소에 있지. 얼른 가야겠다.”
서준과 부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호텔 문 앞도, 로비도, 호텔 직원들까지 조그맣더라도 다 분장한 모습이었다.
핼러윈이라서 멋지게 꾸며져 있던 호텔 장식도, 알록달록한 호텔 조명과 만나, 낮에 봤던 광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른 세계라도 온 것 같네.”
“소극장 문이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아니었을까.”
“멋지다! 진짜 핼러윈이야!”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Trick or Treat(트릭 오어 트릿)을 외쳤다. 어른들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얼른 가자!”
“그래.”
방으로 돌아온 서준이 캐리어를 열었다. 김희상이 만들어준 옷이 잘 개어져 있었다. 서은혜가 와인을 놔두고 말했다.
“혼자 입을 수 있어?”
“응! 엄마 아빠는 뭐 할 거야?”
“희상이가 만들어준 머리띠 쓰려고.”
“에헤헤헤.”
서준이 청재킷을 꺼냈다. 그림으로 봤을 때보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워진 늑대 머리였다. 쫑긋 선 늑대 귀도, 송곳니도 작았고 눈도 동그랬다.
희상이 삼촌이 그랬다. 너무 열심히 만들어서 무게는 생각 안 하고 만들다가 늑대 머리가 너무 무거워졌다고. 어른도 목이 뻐근할 정도니, 서준에게는 힘들 거라고 다시 간단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음. 할 수 없지.”
늑대 머리를 조심하면서 청자켓을 입고, 꼬리가 달린 검은 바지도 입었다. 그리고 소매 끝에 달린 장갑에 손을 넣었다.
두 손 모두 장갑을 끼니 통실통실한 늑대 손 같았다. 손등은 복실복실했는데 손바닥은 개발바닥이었다.
“오. 젤리!”
동글동글하고 말랑말랑한 발바닥이 귀여워 잼잼 주먹을 쥐어보았다. 장갑의 발톱도 크기가 작고 말랑말랑했다.
서준은 마지막으로 늑대 머리 모자를 썼다.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여보니 모자를 두 개 겹쳐 쓴 정도의 무게인 것 같았다.
“가볍네! 앞도 잘 보이고.”
거울을 보니 이마까지 늑대 주둥이로 가려졌다. 거울로 본 늑대 머리는 아기 늑대 같았다.
음. 좀 더 멋진 늑대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무게 때문이라니. 어쩔 수 없지!
“서준아, 다 입었어?”
“응! 짜잔!”
“오! 귀엽네!”
“진짜! 엄청 귀여워! 장갑에 젤리도 있네.”
“김희상. 대단하네. 신발은 없어? 늑대 발도 만들 것 같은데.”
“신발은 그냥 운동화 신으래. 장식 달면 밟고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그건 그렇겠네. 아, 이거 가방 잘 챙기고.”
이민준이 작은 가방을 서준의 어깨에 매주었다. 사탕이나 과자를 넣을 수도 있고 비상금이 든 늑대 모양 가방이었다.
“그럼 이제 내려갈까?”
“응!”
서준이 활짝 웃으며 늑대 귀가 달린 머리띠를 쓴 엄마 아빠의 손을 잡았다. 늑대 가족이 모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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