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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89화 (8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89화

아니, 죽는 연기 좀 열심히 했다고 장면까지 바꿔요? 말하고 싶었던 서준이었지만 뒤를 이은 최민성 피디와 소은진 작가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서준이의 성녕대군 연기에 너무 푹 빠져 있어요. 죽는 장면 안 보고 싶다고 너무 슬플 것 같다고 합니다. 스태프분들이 이 정도인데, 지금 한창 드라마에 빠진 시청자들은 어떻겠어요. 여기서 서준이가 죽는 모습까지 방영했다가는 난리가 날지도 몰라요.”

“그냥 죽는 연기인데요?”

“다른 배우의 연기면 몰라. ‘배우, 이서준’의 연기니까.”

“혹시 베르테르 효과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안다호의 말에 서준은 고개를 갸웃했고 최민성 피디와 소은진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죽는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저 즐겁게 보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다들 마음의 각오는 하고 있겠지만 말이에요.”

“베르테르 효과가 뭐에요?”

안다호가 서준에게 설명해 주었다.

어떤 소설의 주인공이 자살하자, 그 소설의 독자들이 주인공을 따라 자살 시도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소설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유명인의 죽음을 따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서준은 얼이 빠졌다.

소은진 작가가 말했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그저 저번 촬영 때 영상만 안 나간다면 말이야. 그것도 서준이 연기는 괜찮았는데, 종호 씨 연기가 너무 현실감 있어서 더 위험하게 보인 거야.”

소은진 작가의 말대로, 서준의 연기는 괜찮았다. 카메라로는 서준의 낮아지는 체온도 스켈레톤 생쥐의 냄새도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그저, 열연하던 김종호의 표정이 어느 순간 현실이 되는, 그곳부터가 문제였다.

“그 표정이랑 서준이 연기랑 합쳐지니까, 너무 플러스가 돼서 말이지.”

다시 영상을 본 최 피디와 소 작가는 다급한 김종호의 표정과 축 늘어진 서준의 모습에 소름이 돋은 팔을 매만졌다. 서준의 장면을 삭제한다는 말에 놀라 달려온 안다호와 서은찬은 최 피디가 보여준 영상에, 두 사람의 동의를 얻고 그 즉시 영상을 수거해 없애버렸다.

“누나랑 매형이 봤으면 난 이미 죽었어.”

훗날, 성인이 된 조카, 이서준과 술을 마시며 털어놓는 삼촌, 서은찬의 진심에 서준은 그땐 그랬지. 하며 매사 온 힘을 다해 연기하던 어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웃어버렸다.

서준은 진짜 같은 연기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대단한 연기라도 그건 연기여야 했다.

웃고 즐기고 떠들 수 있는 연기. 슬프더라도 ‘저건 연기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연기.

사람들이 스릴러나 공포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도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었다.

진짜 같은 연기력과 연기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경계선은 어딜까? 다들 서준에게 연기를 잘한다고 했지만 서준은 아직 배울 것이 많았다.

“바꿔도 괜찮을까?”

최 피디와 소 작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서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서준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슬픈 내용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만 슬펐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서준의 첫 드라마, 내의원의 마지막 촬영이, 마지막 장면이 사라졌다.

* * *

수요일 내의원, 13화가 방송되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의 양홍달이 엎드려 고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한마디가 태종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끔찍한 소리였다. 팔걸이를 부서질 듯 꽉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창진이옵니다.”

창진!

어의 양홍달의 말에 태종과 왕후가 할 말을 잃었다. 황망한 얼굴로 엎드린 양홍달의 뒤통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창진? 창진!?”

성녕대군은 며칠 전부터 열이 오르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때때로 피곤한 얼굴로 잠이 오지 않는다며 칭얼댔다.

어의들은 고뿔이라고 했다. 그저 약 잘 먹고 잘 자면 나을!

근데 창진, 두창이라고?

“치료는…… 어의, 치료는 어떻게……?”

왕후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양홍달이 더욱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 무거운 침묵에 태종과 왕후가 넋을 놓았다.

궁궐은 싸늘한 침묵에 휩싸였다. 태종은 동생이 아픈데 희희낙락 놀고 있는 양녕을 혼냈고, 밥 한 숟가락도 뜨질 못했다.

원경왕후는 효령대군과 함께 절에 들려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고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렸다.

총명한 충녕대군은 의원들과 함께 성녕대군의 병을 연구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 모두 최선을 다했다. 있는지도 모르는 신을 찾았고 만병통치약으로 소문이 난 영약들을 찾아다녔다.

치료 방법은 이해되지 않을지언정, 그들의 표정과 모습을 본 시청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중 허유선이 가장 바빴다. 아픈 성녕대군은 가족을 배려해서 찾질 않았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허유선만이 유일하게 어리광을 피울 수 있는 상대였다.

의젓한 성녕대군은 허유선에게 조금 어리광을 피우고는 꼭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허 의관. 정말 고마워요.”

“정말, 정말 괜찮습니다.”

허유선은 시뻘겋게 변한 눈가를 숨기며 웃었다. 울 시간도 없었다. 허유선은 성녕대군을 돌봐주고 탕약을 먹이고 시간이 날 때면 충녕대군이 마련한 장소에서 병에 관해 연구했다.

그러나 모두의 노력에도 성녕대군의 병은 심해졌다.

예고편이 나왔다.

눈이 내렸다.

[내의원 13화, 시청률 37%!]

[KBC 목요일 10시, 그날이 온다!]

[조선시대 의학의 수준!]

[창진에 대해서 알아보자!]

[점쟁이, 무녀, 제사.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에게 빌었다.]

-왕자가 죽게 생겼는데 왜 제사를 지내냐?

=그게 그때는 치료법이었음. 점을 쳐서 좋은 날을 받아서 제사를 지내면 감복한 신이 병을 물리쳐 준다고 믿음.

-와, 진짜 죽나.

-솔직히 퓨전 사극이라서 거슬리는 게 많은데 성녕대군 죽음은 뭐라 판단을 못 하겠다.

-한쪽은 신에게 빌고, 한쪽은 연구하고. 대비가 돼서 더 인상 깊음. 가족을 위해서 뭐든지 하는 게, 우리랑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우리 부모님도 내 병 때문에 절에 기도드리고 했는데.

=지금은 괜찮?

=ㅇㅇ 많이 나아짐

“서준아, 아픈 데 없지?”

“네! 엄청 건강해요. 선생님!”

목요일은 평일이고 평일에는 학교에 가야 한다. 서준은 건강을 물어보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다들 안도한 얼굴로 돌아갔다.

“힘내. 서준아.”

벌써 비슷한 상황을 몇 번이고 본 아기 친구들의 위로에 서준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드디어 그날. 역사의 그 날이 다가왔다!]

[KBC 내의원! 결단을 내리나!]

[퓨전 사극, 역사 속 이야기, 어디까지 허용 가능한가?]

[우리 대군마마,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나의 내의원은 어제로 끝났어. 하. 하. 하.

-나 역사학도라서 퓨전 사극은 별로인데 진심으로 성녕대군 살았으면!

-어디 도망쳤다고 하면 안 되나?! 요양 보내!

-망할 놈의 창진! 역사 파괴라도 좋으니까, 살려주세요!

그런데도 모두 10시가 다가오자 텔레비전을 켜 KBC를 보기 시작했다.

높은 단가로 팔려나간 광고가 오래도록 나왔지만 다들 불만 없이 기다렸다. 여전히 기업 순위 1위부터 10까지 모아놓은 것 같은 광고들이었다.

-어차피 죽겠지만, 광고 나오는 동안은 좀 더 살겠지.

-ㅠㅠ 광고가 너무 슬퍼

-광고 빨리 끝났으면, 아니, 안 끝났으면ㅠ

모두의 바람과 달리 오늘따라 광고가 일찍 끝났다. 아니, 평소와 같은 광고였지만 모두 그렇게 느꼈다.

광고가 끝나고 둥-둥- 오늘따라 슬프게 들리는 묵직한 북소리가 시작되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내의원이 시작되었다.

발진이 가득한 성녕대군이 색색 숨을 내쉬었다. 흰 천으로 입을 가리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내의원의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허유선이 보였다. 스승, 양홍달의 명에 따라 탕약을 달이고 성녕대군의 땀을 닦고 팔다리를 주물렀다.

며칠 전에는 눈이라도 살짝 뜨더니, 이젠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상태가 심각했다.

‘마마. 마마.’

허유선은 입도 떼지 못하고 눈빛만으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정 붙일 이 없는 세상에,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아이였다. 서자이지만 감히, 아이를 가족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약과를 나누어주던 성녕, 멋지게 활을 쏘던 성녕, 장난을 치며 웃던 성녕.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의 성녕대군.

그 씩씩하던 모습은 어디 가셨습니까, 대군마마.

색색 가쁜 숨만 몰아쉬는 성녕대군의 모습에 허유선은 손톱이 살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쥐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카메라가 멀어지고 충녕대군이 멀리서나마 성녕대군이 있는 처소를 바라보는 모습이 비쳤다.

종아, 종아. 소리를 내지 않고 빌고 있는 충녕대군의 발밑으로 그가 의관, 원학과 연구하던 종이 더미가 눈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의관 중 가장 바삐 발을 놀리고 있는 이가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성녕을 돌보고 시간이 나면 충녕대군과 함께 연구하던 허유선이었다.

대군인 나도, 의관인 저자도, 이 많은 종이도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동생의 모습이 떠올라, 충녕대군은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박도훈 눈물ㅜ 연기 는 듯.

-아아! 이거! 아무래도 그 각인데?!

다들 가슴을 조이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내의원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사방이 조용했다.

색색 숨을 내쉬고 있는 성녕대군의 모습 위로 어디론가 달려가는 허유선이 보였다.

달리는 데 방해가 되는 흰 천을 내던지고 한시라도 빨리, 엄마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그들을 보내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운동 좀 해야겠어요, 허 의관은.’

환하게 웃는 성녕대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마 말대로 운동 좀 할 걸 그랬습니다.

아파오는 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뜀박질하던 허유선이 다다른 곳에는, 이미 성녕대군의 끝을 직감한 상선이 서 있었다.

3교대가 무어냐, 매일 같이 성녕대군을 따라다니던 허유선을 알아본 상선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전하. 허 의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태종과 왕후가 나타났다. 막둥이 아들의 죽음을 예감한 두 사람의 표정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찌푸려진 미간, 아플 정도로 깨문 입술, 흔들리는 눈동자. 하나하나 인상 깊지 않은 연기가 없었다.

-와, 김종호, 이지혜 장난 아니다.

-역사 파괴도 괜찮다니까!?

“가자!”

태종과 왕후가 빠르게 발을 놀렸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 아들이 있는 곳으로.

혹여 창진이 옮을까, 신하들의 반대로 가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경박스러운 두 하늘의 발걸음에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허유선이 그 뒤를 따랐다. 궁녀들도 호위들도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궁궐에 웃음을 가져다준 성녕대군이었다. 슬프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태종과 왕후가 성녕대군의 처소에 발을 들이자, 옆에 있던 차마 신하들도 막지 못했다.

발병 이후로 굳게 닫혀 있던 성녕대군의 처소가 활짝 열렸다.

허유선의 시야에 성녕대군의 처소 안으로 사라지는 태종과 왕후의 등이 보였다.

나무문이 무겁게 쿵 닫혔다.

겨울이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솜털 같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종아!”

찢어질 것 같은 태종과 왕후의 목소리에 허유선은 성녕대군의 처소 문 쪽을 바라보다 흙 위에 풀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아.

“종아! 아니 된다! 종아!”

엎드린 허유선의 등이 흔들렸다. 온몸을 휘도는 절망감과 좌절감에 울음소리 하나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아아,

겨울에 찾아왔던 주인이 겨울에 떠나갔다.

[태종 18년(1418) 2월 4일. 성녕대군, 이 종 졸.]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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