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83화
퓨전 사극, 내의원은 반 사전제작으로 제작되었다. 촬영 B팀은 드라마 내용 중 소소한 신을 맡아 촬영했고, 촬영 A팀은 방송 중에는 찍을 수 없는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는 장면을 촬영했다.
“우와.”
2월 말, 아직도 겨울이었다. 쌩쌩 찬 바람이 불었다.
아이스링크장에서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며 겨울방학을 즐기던 서준은 이지석의 제안으로 촬영장에 방문했다.
야외 촬영이라서 두꺼운 점퍼를 입고 어깨에 메는 작은 미믹 모양의 가방에 핫팩도 넣어 두어 따뜻했다.
“어때? 멋있지?”
“네!”
이지석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색색의 천으로 멋지게 장식된 궁궐. 복작복작 관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스태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촬영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오늘은 세종대왕이 즉위하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이런 건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좋지. 공부도 되고.”
이지석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서준과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가 있는 배우들은 조연출의 감독하에 합을 맞추었고 배경이 되어줄 엑스트라들은 스태프에게 자리를 배정받았다.
솔직히 화려하게 차려입은 배우들보다는 똑같은 옷을 입어 구분조차 가지 않는 엑스트라들에게 더 눈이 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듯 친구와 시시덕대며 웃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사가 있는 배우들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러움이 가득 담긴 그들의 얼굴에 서준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모두 촬영 준비를 마쳤다. 대규모 촬영인 만큼 한 명의 실수가 큰일이 될 수 있어, 다들 실수를 하지 않도록 집중했다.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배우들이 마지막으로 동선을 확인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스태프들이 모두 촬영장 밖으로 향했다.
서준과 이지석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에 서서 촬영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걸리는 것이 없자, 최민성 피디가 크게 소리쳤다.
“레디, 액션!”
관인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관복을 입은 단역뿐만이 아니라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섰다. 이지석이 서준에게 속삭였다.
“세종대왕의 즉위식에는 성균관 학생이랑 외국인, 노인, 승려도 참석했대.”
“그렇구나.”
음악이 흘렀다. 후시 녹음을 할 테지만 최민성 피디는 국악단을 불러 촬영장에 생생한 음악이 흐르도록 했다.
옆에서 여(가마)를 탄 세종이 나타났다. 세종이 자리에 앉고 즉위식이 시작되었다. 엄숙한 분위기가 촬영장에 흘렀다.
세종의 즉위식은 다행히도 NG가 나지 않고 한 번에 끝났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가져온 패딩을 껴입었다.
스태프들이 클로즈업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엑스트라들은 몸을 녹였다.
많은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정말로 조선시대로 떨어져 세종대왕의 즉위식을 보는 기분이었다.
서준이 이지석에게 물었다. 다른 대규모 촬영도 있으면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런 촬영 또 있어요?”
“음. 피디님한테 물어볼까?”
두 사람의 질문에 최민성 피디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있죠. 성녕대군 장례식, 원경왕후 장례식, 태종 장례식.”
“전부 장례식뿐이네요.”
“이때가 좀 그렇죠. 누가 아프고 죽고. 궁금하면 보러 와도 괜찮아. 퓨전 사극이긴 하지만 행사 같은 건 고증 열심히 했거든!”
“네!”
그 이후로도 대규모 촬영이 이어졌다. 서준은 성녕대군의 장례식 촬영에 커피차를 불렀다. 엑스트라 배우들까지 마음 편히 마실 수 있게 여러 대의 푸드 트럭이 촬영장 밖에 세워져 있었다.
푸드 트럭에는 ‘성녕대군이 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다들 ‘성녕대군 장례식에 성녕대군이 커피를 준다’며 웃으면서 따뜻한 차와 커피를 마셨다.
사람이 많이 필요한 장면의 촬영이 모두 끝나고 내의원 1화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1화, 2화, 3화. 순조로운 촬영에 금세 서준의 촬영 날이 다가왔다.
“아직 좀 춥네.”
안다호는 분장을 마치고 의자에 앉아서 촬영을 기다리고 있는 서준에게 겉옷을 입혀주었다.
한복 위에 패딩을 입으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옷 안에 붙인 핫팩이 아직 따끈했다.
서준의 첫 장면은 세트장에서 진행되었다. 꽃피는 3월이긴 했지만 세트장은 쌀쌀했다.
그동안 주인공 허유선은 내의원에 들어와, 여차저차 어의 양홍달의 제자가 되었다.
오늘은 허유선과 성녕대군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내의원 관복을 입은 이지석이 웃으며 서준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대군마마!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 의관, 오랜만이에요!”
“아하하하. 서준이도 꽤 하는걸?”
이지석의 말을 서준도 능청스럽게 받아주었다. 유쾌하게 웃은 이지석이 서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 추워?”
“괜찮아요!”
이지석이 핫팩 하나를 꺼내 보이자 서준이 의자 옆을 가리켰다. 다들 저만 보면 안 춥냐고 물어보면서 핫팩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그렇게 모인 핫팩이 벌써 한 상자였다.
윤성오도 다녀간 모양인지 이지석이 들고 있는 핫팩과 같은 핫팩이 여러 개 있었다.
“인기 많네. 이번 촬영 내내 써도 다 못 쓰겠다.”
“이젠 좀 더운 것 같아요.”
그래도 다들 자신을 위해서 준 거라 모아두고 있었다. 그렇게 이지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출의 목소리에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서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촬영장소로 향했다.
촬영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은진 작가가 화이팅! 응원을 보냈다. 서준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준을 촬영을 보러온 사람들이 많았다. 김종호와 이지혜가 서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대규모 촬영 때마다 보았던 세종대왕 역의 박도훈도 있었다.
서준과 눈이 마주친 박도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동안 왔다 갔다 많은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종호 삼촌과 지혜 이모처럼 엄청 친해지지는 못했다. 그래도 끈질김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제는 인사도 해주었다.
‘오늘은 꼭 친해져야지!’
서준이 주먹을 꽉 쥐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잘 꾸며진 성녕대군의 방에 서준이 발을 디뎠다. 방을 가로질러 방석 위에 앉은 서준의 모습이 마치 그림 같았다. 찰떡같이 어울리는 서준과 배경에 스태프들이 속삭였다.
“사극이랑은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진짜 조선시대 왕자님 같네요.”
“그러게요. 이 드라마 대박 나겠다.”
모두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눌 때, 최민성 피디의 고갯짓을 본 조연출이 목소리를 높였다.
“준비됐어요?”
“네!”
“예.”
조연출의 말에 서준과 이지석이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속닥속닥 떠들고 있던 스태프들도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촬영장이 마음에 든 최민성 피디가 이곳저곳에 설치된 카메라 화면을 보았다. 옥에 티는 없는지 살피고 두 배우의 위치를 살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최민성 피디가 목소리를 높였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서준이 어깨를 펴고 허리를 폈다. 후우. 숨을 내쉬고 생의 도서관에서 찾은 능력을 떠올렸다. 오른손 손등에 새겨진 포효하는 아기 사자의 무늬가 반짝였다.
[(선)어린 사자왕의 위엄-하급]
어린 나이에 사자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무리를 이끌기 위해 많은 능력 중 ‘위엄’만이 상승했습니다.
발동 :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기.
일명, 어린 사자왕의 허세.
능력치는 일반 사자보다도 못했지만, 오직 상상 이상의 ‘위엄’이 어린 사자왕을 나름 무리를 이끌게 해주었다. 그것도 곧 들통이 나서 죽고 말았지만 말이다.
‘다른 능력도 있긴 했지만…….’
좀 더 뛰어나고 편하게 발동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서준은 이 능력을 선택했다. 신하들을 압도해야 하는 왕도 아니고 나이 어린 왕자였다. 적당한 위엄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서준이 탁자 위로 손을 올려 책을 펼쳤다.
“레디, 액션!”
성녕대군, 이 종은 태종과 황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40에 얻은 아들이라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했다.
부모의 나이가 많은 탓인지 다른 아들들보다 약하게 태어나 더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런 걱정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은 태종의 넷째 딸, 경안공주의 일이 기름을 부었다. 자식들이 걱정된 태종이 자식들에게 의관을 붙였다.
하루 3교대로 의관들이 돌아가며 왕의 자식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전에 있던 의관이 떠나고 새로운 의관이 나타났다. 아바마마를 모시고 있는 어의, 양홍달의 제자라고 했다.
의젓하게 책을 보고 있던 성녕대군에게 밖에 서 있던 김내관이 의관의 도착을 알렸다. 책을 덮은 성녕대군이 의관을 불러들였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허유선이 방 안으로 들어와 부복했다. 서준이 탁자를 톡톡 두 번 쳤다.
[(선)어린 사자왕의 위엄이 발동됩니다]
“고개를 드세요.”
네 번째로 만나게 된 성녕대군을 보기 위해 허유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웃는 성녕대군과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한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의원 의관, 허유선이라 하옵니다.”
성녕대군이 다정하게 웃었다.
“컷! OK!”
최민성 피디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지석이 뒷목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무언가에 서준을 봤을 때, 무언가 홀린 기분이었다.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는 느낌.
‘뭐지?’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이지석이 서준과 모니터 앞으로 향했다. 어느새 다가온 안다호와 윤성오가 핫팩을 두 배우에게 건넸다.
방금 촬영했던 장면이 모니터에 올라왔다. 다들 조용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신기하기만 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성녕대군에게서 왕자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다들 만족하는 가운데 이지석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좀 약한 느낌인데?”
“네?”
“아니야. 클로즈업 샷은 다르겠지.”
서준의 물음에 이지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최민성 피디가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클로즈업 샷의 연출은 머리를 쥐어 싸매고 생각해 낸 것이었다. 좀 더 시청자들에게 성녕대군을 인상 깊게 남기고 싶었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잊지 못하게.
서준이 홀로 세트장에 올라갔고 카메라 감독이 이지석이 있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있는 최민성 피디의 모습에 이지석이 미소를 지었다. 간간이 들리는 지시가 이지석의 마음에 쏙 들었다.
클로즈업 샷 촬영이 시작되었다.
서준은 방금 전처럼 연기했고 모니터에 그대로 나타났다.
다들 숨을 죽이고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았다.
성녕대군이 보였다. 방금 전에도 완벽한 왕자였지만 클로즈업 샷의 연출은 대단했다. 능력이 통하지 않은 사람들마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정말로 왕족으로 태어나 왕족으로 살면 이런 분위기일까. 저절로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특히, 왕족 역을 연기하는 태종 김종호와 왕후, 이지혜, 그리고 드라마 끝까지 왕으로 남는 세종대왕 역의 박도훈은 침음성을 삼켰다.
심각한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고 있는 성녕대군의 얼굴을 보았다. 배우들은 먼저 촬영했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장면에서 자신의 연기가 어땠었나. 저보다는 못해도 왕족다웠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지석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다. 이거였다. 그가 서준의 앞에서 연기할 때 느꼈던 분위기가 고스란히 화면 위에 나타났다.
찝찝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허유선이 된 것처럼 서준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를 조아렸다.
서준과 함께 연기를 하면 이런 기분이었다. 악령 때도, 지금도 서준의 연기에 기대어 메소드 연기라도 체험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간접적인 만큼 큰 효과는 없었지만 신기한 기분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한 번 봤다고 일찍 정신을 차린 이지석이, 자신이 연출하고도 넋이 나가 있는 최민성 피디를 살짝 흔들었다. 정신을 차린 최민성 피디가 크게 외쳤다.
“컷! OK!”
서준의 능력과 뛰어난 연출의 시너지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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