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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82화 (82/1,055)

0살부터 슈퍼스타 82화

이지석은 매니저 윤성오와 함께 내의원의 대본 리딩이 있을 회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텅텅 빈 복도에 윤성오가 시간을 확인했다.

“형.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에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서준이도 일찍 온다고 하더라고. 첫 리딩인데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이지석의 말에 윤성오가 웃었다. 이지석과 일하면서 이렇게 신나 보이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이지석이 회의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내가 제일 처음, 어라? 종호 형?”

촬영진이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인지 회의실 테이블은 배역과 배우의 이름이 쓰인 종이 명패가 세워져 있었다.

이름이 불린 김종호가 몸을 흠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종호의 손에는 두 개의 종이 명패가 있었다.

[허유선 역, 이지석 님]

[태종 역, 김종호 님]

큰 글씨에 이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크흠. 헛기침한 김종호가 두 종이 명패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아 대본을 펼쳤다.

“형, 안 들어가요?”

“아, 응.”

윤성오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이지석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뭐지? 김종호에게 인사한 윤성오가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고 마실 보리차를 꺼내는 사이 이지석이 팔짱을 끼고 김종호를 바라보았다.

“종호 형. 뭐 찔리는 거 있어?”

“뭐, 뭐. 내가 뭐.”

“형, 1화 대본에 나오지도 않는데 대본 보고 있잖아.”

“뭐, 안 나와도 볼 수도 있지.”

김종호가 헛기침하며 대본을 덮었다.

‘이 자식은 아직 리딩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와?’

속으로 한숨을 쉰 김종호와 이지석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흐를 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벌써 오셨어요?”

최민성 피디와 소은진 작가였다. 그리고 두 사람 뒤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준이었다. 대본 리딩은 처음이라 들떠서 다호 형과 일찍 왔다. 요 앞에서 피디님과 작가님을 만나서 과자도 받고 함께 회의실에 왔다.

이히히. 1년 만의 촬영이라서, 대본 리딩이지만, 너무 즐거웠다.

“안녕. 서준아.”

“오랜만이야.”

이지석과 윤성오가 반갑게 서준을 맞았다.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서준에게 최민성 피디가 자리를 알려주었다.

“자리마다 이름 적혀 있지? 거기 앉으면 돼.”

“네!”

자신의 이름표를 찾은 서준이 자리로 걸어갔다. 김종호의 옆이었다.

서준이 꾸벅 인사했다. 서준과 김종호의 나이 차이만도 30이 넘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선생님. 이서준입니다.”

중년 배우, 김종호는 사극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배우였다.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수염을 붙이면 정말로 조선시대의 양반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험상궂은 얼굴에 굵직한 목소리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악역과 매우 어울려 출연하기만 하면 대부분 권력가의 역할을 맡았다.

그 덕에 대중들은 김종호가 나오면 십중팔구는 악역이구나, 예상했다.

‘왕은 처음이시지?’

내의원의 대본을 읽으면서 태종에 대해서 알아본 서준은, 김종호가 태종 이방원의 역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날 알고 있어?”

“그럼요! 선생님이 나온 사극도 봤어요!”

“그래? 아, 앉으렴.”

“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서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김종호의 모습이 멋진 ‘선생님’ 같아서 서준은 열심히 김종호가 나온 사극과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했다.

겨우 테이블의 반대편이지만 어쩐지 이곳만 소외된 느낌이라 이지석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주섬주섬 서준에게 줄 방석과 과자를 찾던 최 피디와 소 작가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서준이 자리는 지석 씨 옆으로 하라고 했는데?”

“그러게요. 깜박했나?”

“네?”

용케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이지석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평소와는 달리 일찍 온 김종호, 손에 이름표를 들고 있던 김종호. 그리고 바뀐 자리.

“종호 형, 설마 그 자리 내 자리야?!”

“뭐, 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황하는 모양새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안다호에게서 유자차를 받은 서준이 꼴깍꼴깍 마시며 김종호와 이지석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준에게 보였던 선생님다운 모습은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본래 성격이 나왔다.

“형은 형 자리에 앉으라고!”

“나도 서준이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저긴 너무 멀잖아! 넌 악령도 찍고 재수사도 찍고 연락도 하니까 오늘만 양보해라.”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김종호가 서준을 의식하고는 목소리를 줄였다.

이를 꽉 물고 말하는 모양새에 이지석은 김종호가 WTV 영화제에 투표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던 것이 떠올랐다.

그저 장한 아역 배우에게 한 표 준다고 이야기하더니, 서준이 팬이었나 보다.

“지석이 형이랑 김종호 선배님이랑 사이가 나쁘세요?”

“아니, 나쁘지는 않지. 오히려 엄청 친하지. 지석 씨가 데뷔한 드라마에 같이 나왔거든. 너무 친해서 편하게 장난치는 사이야. 재수사 촬영 때, 서준이처럼 특별 출연도 해주셨거든.”

“아, 봤어요. 지석이 형 때문에 나오셨구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찬이 삼촌과 자신과 같은 사이이려나? 결국은 자리를 양보한 이지석이 김종호를 보며 투덜투덜 댔다.

“그럼 너도 이쪽에 앉아!”

“난 형처럼 그렇게 안 치사하거든?”

김종호와 이지석의 2차전이 시작되려던 순간,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배우들에게 나눠줄 물병을 가득 들고 온 모습이 스태프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리딩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 후로 배우들과 매니저들이 회의실 안에 들어왔다. 모두 똑같은 반응이었다.

별생각 없이 회의실에 들어왔다가 떡하니 앉아 있는 선배 김종호와 이지석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조심히 회의실의 분위기를 살폈다. 김종호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서준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김종호 선배님. 후배들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저번에 같이 출연했던 드라마 배우랑 말 한마디도 안 했다던데.”

“연기 못하는 애들 싫어하지. 걔는 낙하산에 연기도 완전 별로였어. 낙하산이라도 연기 잘하면 좋아해.”

“그래도 저렇게 상냥한 모습은 처음 본다.”

다들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종호와 서준도 많이 친해졌다.

“드라마 리딩은 처음이지?”

“네!”

“1화는 우리 대사는 없으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감사합니다.”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었다. 다행히 참석한다고 말한 배우들은 모두 제시간에 도착했다.

서준이 시선을 돌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배우들과 뒷자리에 앉아 있는 배우들을 보았다.

태종, 원경왕후, 양녕, 효령, 충녕, 그리고 의원들.

대본 리딩은 1화만 할 예정이었지만 다들 얼굴도 볼 겸, 대사가 없어도 참석할 사람은 모두 모였다.

배우들에 매니저들에, 촬영진, 홍보담당자들까지. 회의실 안이 북적북적했다.

“그럼 내의원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 앉고 최민성 감독이 대본 리딩의 시작을 알렸다. 사극은 처음인 이지석이었지만 처음답지 않게 자연스럽게 대사를 뱉었다.

연기지상주의자로 알려진 김종호가 투닥거리면서도 열 살은 어린 그와 친하게 지낼 만할 정도로 멋진 연기력이었다.

장소만 회의실이고 말만 대본 리딩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이지석은 설렁설렁 대사만 뱉지 않았다. 손짓에 표정까지 변해갔다.

눈을 감고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조선시대에 온 것 같았다. 서준은 눈을 반짝이며 현대의 말투와 사극의 말투를 비교했다. 지금은 쓰지 않는 말투라서 더 재미있었다.

내의원의 대본 리딩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1화는 의원 허유선이 내의원에 들어가기 위해 의원으로서 명성을 쌓는 내용이었다.

태종이나 왕자는커녕 허유선의 직장이 될, 왕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 탓에 태종도 원경왕후도 왕자들도 뻘쭘하게 이지석과 배우들이 대사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했다.

아니, 다들 서준이 꼼지락 꼼지락 대본에 필기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최민성 피디와 소은진 작가는 이미 턱을 괴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서준만 보고 있었다. 김종호는 옆에 앉은 서준이 무엇을 적고 있나 훔쳐보고 있었다.

[강하게? 약하게?]

[조금 쉬고]

[역시 지석이 형은 잘해!]

그렇게 정신 산만한 사이에도 리딩이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김종호 덕분이었다.

김종호는 연기 못하는 배우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조언을 바라는 후배에게 날 선 말까지 뱉어낸 적이 있었다.

성격이 좋지 않은 김종호였지만 그와 친분이 있는 배우들은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종호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좋아한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종호가 좋아하는 배우는 연기를 ‘좋아하는’ 배우였다.

연기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잘하지 못하더라도 연기를 좋아한다면 김종호는 마음을 열었다.

물론 자신의 실력을 알고 어울리는 역을 맡을 때의 일이었다. 연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분에 넘치는 역할을 차지하면 바로 등을 돌렸다.

단역은 못할 수 있다. 대사 한 줄 두 줄, 조금씩 경험을 쌓으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김종호 자신도 그렇게 연기를 배웠다.

하지만 요즘은 티켓 파워가 있다는 말로 기본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주연, 조연의 자리를 차지했다.

‘서준이처럼 처음부터 잘하는 배우도 있지만 그건 아주 소수지.’

열심히 필기하고 있는 서준을 보며 김종호가 미소를 지었다. 이지석의 말처럼 아직 어린데도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잘하면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가 참 마음에 들었다.

다정한 서준과 김종호의 모습에 이지석도 뿌듯해졌다.

연기를 좋아하고, 연기를 좋아하는 배우도 좋아하는 김종호는 가르치는 것에도 소질이 있었다.

좋은 후배를 가르치고 그 후배가 스타가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끝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연기를 사랑하던 후배들이 어느새 연기는 뒷전이고 유명세만 즐기는 배우가 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안 그래도 더러웠던 김종호의 성격은 더 더러워졌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아주 드물어졌다. 이지석도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툭툭 짧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의 대사에 서준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릴 때면 김종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서준을 향한 채였다.

“거기선 좀 더 빠르게, 절박하게 말해야지. 지금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의원을 찾아온 거지 않나.”

“네, 네!”

그 말에 배우가 다시 대사를 뱉으면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종호의 충고를 대본에 적고는 했다.

[빠르고 절박하게]

그 모습에 김종호가 미소를 지었다. 다른 배우들에게 조언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장한 아이가 간접적으로나마 많이 배우기를 바랐다.

1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언제 김종호 같은 배우에게서 조언을 듣겠나 싶어,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서 열심히 대본 리딩을 계속해갔다.

두 사람의 모습에 뿌듯한 마음도 잠시 평소와 다른 김종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지석은 소름이 돋아 대사를 더듬을 뻔했다.

꼼지락거리는 배우 이서준, 후배를 가르치는 김종호, 열심히 참여하는 배우들.

여기저기서 화젯거리가 생겨나니, 홍보담당자는 실실 웃으며 열심히 카메라 렌즈를 비추었다.

“수고하셨습니다!”

1화 대본 리딩이 모두 끝났다. 서준이 대본을 덮자 다들 아쉬운 얼굴로 자신의 대본을 덮었다.

매니저들이 자기 배우들의 짐을 챙기고 서준의 뒤에 서 있던 안다호도 하나둘 서준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모두 정리하려는 분위기에 김종호는 애가 탔다. 오랜만에 만나는 연기를 좋아하는 데다가 엄청 잘하는 배우였다. 한마디라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김종호가 요즘 초등학생은 뭘 좋아하지? 무슨 이야길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이지석이 끼어들었다.

“서준아, 종호 형 말이지. 너 엄청 좋아해. 영화제 투표도 했어. 형이라고 부르긴 좀 그러니까, 삼촌이라고 불러드려.”

“어…… ‘종호 삼촌’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럼! 얼마든지!”

“에헤헤헤.”

화기애애한 세 배우의 대화에 끼어들 용기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원경왕후 이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서준아. 이모 사인 하나 해줄래? 이모 이름은 이지혜야.”

“알아요! 영화도 봤어요. 다진이 누나랑 같이 나오셨죠?”

이지혜가 준 새하얀 종이에 서준이 익숙하게 사인을 했다. 사인지를 받아 든 이지혜가 웃었다.

“다진이도 너 엄청 잘한다고 하더라.”

“헤헤.”

서준이 웃는 사이 사람들이 종이를 들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차가운 안다호의 시선에도 슬쩍 시선을 피하며 서준의 앞에 한 줄로 섰다.

김종호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서준의 사인을 받고 싶었다. 그 낌새를 눈치챈 이지석이 놀리듯 말했다.

“서준아, 종호 형도 사인 하나만 해줘. 엄청 갖고 싶나 보다.”

“네!”

뒷말을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김종호와 서준은 똑같이 생각했다.

회의실에 작은 사인회가 열렸다. 사람이 많아 다 하기는 힘들어, 서준과 같은 촬영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받기로 했다.

그 안에는 김종호도 있었다. 아쉬워하는 김종호에게 서준은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 * *

KBC의 새 드라마, 내의원의 대본 리딩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KBC에서 작정했는지 리딩 버전, 이서준 버전, 배우들 버전으로 나눠 영상을 올렸다.

특히 이서준 버전은 노랗고 귀여운 자막과 아기자기한 음악까지 넣어 한편의 예능을 보는 듯했다.

-너무 귀엽ㅋ 꼼지락대고 있어ㅠ

-김종호 눈에서 꿀 떨어짐. 근데 저 얼굴에 저렇게 보니 좀 무서운 듯ㅋ

-서준이가 멈칫할 때마다 김종호가 가르쳐 줌ㅋ

=거기다 잘하면 끄덕끄덕

-서준이는 대본만 본다고 몰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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