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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77화 (77/1,055)

0살부터 슈퍼스타 77화

짐을 찾고 공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커다란 차가 서준의 앞에 섰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반짝이는 금발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에 서준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리첼!”

“준! 오랜만이야!”

미국에 막 도착한 서준의 일행을 리첼 힐이 반갑게 맞이했다.

리첼 힐이 고개를 창밖으로 쭉 빼고 서준이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리첼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말에 선글라스를 쓴 리첼이 짧게 혀를 차며 손짓했다.

“얼른 타세요. 들키면 나가기 힘들어요!”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이 서준이와 부부, 서은찬과 안다호가 모두 리첼 힐의 차에 올랐다.

모두 차에 탄 것을 확인한 리첼 힐이 공항을 빠져나왔다.

“고마워요. 이렇게 신세를 져도 되나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편하게 지내다 가세요.”

전화로 통성명한 서은혜와 리첼 힐이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생전 처음 영화제에 참석하게 된 서준이와 부부는 영화제에 대해서 잘 몰랐다. 영화제에서 보내준 안내문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서준의 주변에는 영화제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라이언 윌 감독과 리첼 힐, 에반 블록에게 연락하니 세 사람이 함께 레드카펫을 걷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서준에게도 마침 연락하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올해 WTV 영화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영화 산업의 메카, 할리우드가 있는 LA는 많은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영화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리첼 힐도 LA에 커다란 저택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집에서 지내다가 함께 영화제에 참석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리첼 힐의 말에 서준이와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정원이 딸린 커다란 저택에 서준과 부부, 서은찬과 안다호가 할 말을 잃었다. 역시 땅이 큰 미국이라서 집의 크기도 한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들 차에서 짐을 내리고 리첼 힐이 안내해 준 방에 짐을 풀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저택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소개해 준 리첼 힐의 말에 다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렇게 큰 집은 사람을 쓰지 않으면 관리하기도 힘들 터였다.

다음 날.

시차 적응을 끝낸 서준은 어른들과 함께 식당으로 모였다. 미리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둔 리첼 힐이 다섯 사람을 반겼다.

모두 자리를 잡고 배를 채웠다. 간간이 가볍게 대화를 나누던 중에 영화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일단 옷을 골라야겠네요.”

따뜻한 차를 마시던 리첼 힐이 입을 열었다. 서은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장이라면 한국에서 가져온 게 있긴 한데 별로일까요?”

“그것도 괜찮지만, 더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잠시만요. 거실에 준비해 둔 게 있어요.”

리첼 힐이 웃으며 서준이와 어른들을 거실로 안내했다. 폭신폭신한 소파가 있는 넓은 거실에는 이동식 행거와 직원이 있었다.

행거에는 옷이 잔뜩 걸려 있었는데 길이로 봐도 생김새를 봐도 리첼 힐의 옷은 아니었다.

“그건 뭐예요? 리첼?”

서준의 물음에 리첼 힐이 웃으며 말했다.

“준의 옷이야.”

“제 옷이요?”

“응. 준에게 꼭 전해달라면서 나한테 온 옷이야. 다들 꼭 영화제나 다른 행사에서 입어달라고 하더라고.”

이게 전부?

어른들은 할 말을 잃었다. 리첼 힐이 가장 앞에 걸려 있던 옷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쇼호스트가 된 것처럼 옷의 브랜드와 디자이너, 그리고 특징을 설명하며 옷을 소개했다.

거기에는 어른들도 몇 번 들어본 유명한 브랜드부터 요새 뜨기 시작한 브랜드까지 여러 종류의 옷이 있었다.

“이건 요새 아동복으로 뜨고 있는 곳의 옷이에요. 아동복 브랜드라서 덜 유명하긴 한데, 아이에게 어떤 옷이 잘 맞는지 잘 알고 있는 곳이죠. 활동성이 많은 아이가 입어도 움직이기도 편하고 튼튼하죠.”

“여긴 여성 정장으로 유명한 곳인데, 어린이 정장의 새 브랜드를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준이 입으면 아마 첫 모델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설명하는 옷이 열 개가 넘었다.

“준의 몸에 맞추려면 수선이 필요하겠죠? 언제든지 불러만 주면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아,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영화제 때는 각 브랜드에서 수선사를 보내거든요. 언제 어디서 수선할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리첼 힐의 설명에 빠지지 않는 건 모든 옷이 ‘서준’을 위한 옷이라는 점이었다.

옷과 함께 온 짧은 편지를 보여주며, 윌리엄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디자이너부터 진 나트라의 연기를 보고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는 디자이너까지.

비싼 돈을 주고 샀지만, 기성품에 불과한 백화점 정장과는 디자인 자체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가까이서 옷들을 살펴보고 리첼 힐에게 설명을 들은 서은혜와 이민준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가져온 옷보다 멋지네요!”

“일단 입혀봐야지!”

부부와 리첼 힐의 눈이 반짝였다. 브라운블랙의 시상식 때 옷을 정하면서 파김치가 되는 그들을 보았던 서은찬과 안다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날을 예상하지 못한 서준은 맛있는 초콜릿 쿠키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서준의 작은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서은찬과 안다호가 옷을 갈아입히면, 이민준이 열심히 카메라로 촬영했다.

사진과 실제 모습을 번갈아 본 서은혜와 리첼 힐은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하며 열심히 의견을 나누었다.

“머리는 뒤로 넘기는 게 낫겠죠?”

“아니면 살짝 옆으로 넘겨도 괜찮겠네요.”

그러기를 열 번.

처음에는 진짜 패션모델이 된 것처럼 즐겁게 자세를 잡던 서준이 한숨을 내쉬며 상의를 벗었다.

서은찬과 안다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음 옷을 건네주었다.

“이제 딱 3번만 갈아입으면 돼.”

“힘내. 서준아.”

“응!”

그래. 딱 3번만 더 하자!

하고 힘차게 나왔더니, 복병이 나타났다. 서준이 왔다는 소식에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리첼 힐의 집에 찾아온 에반 블록이었다.

“아, 잘됐네. 나도 가지고 왔어.”

에반 블록이 짐을 꺼내 놓았다. 옷이었다.

“준에게 전해달라더라.”

여성복 관련 브랜드에서는 리첼 힐에게, 남성복 관련 브랜드에서는 에반 블록에게.

도통 서준이와 닿을 길이 없으니 두 배우를 통해서 옷을 보내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섯 벌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서준이는 질린 눈으로 잘 포장된 옷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걸로 해요.”

총 20벌의 옷을 입고 벗고 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에반 블록까지 합세해서 서준의 옷과 머리 스타일이 정해졌다.

모두 모여 저녁을 먹고 서은찬과 안다호는 방으로 향했다. 영화제가 끝난 후 서준의 일정에 대해 아직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은혜와 이민준은 오랜만에 LA의 지인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서준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배우들끼리 할 이야기도 있을 것 같아서 편한 마음으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모두 자리를 뜨고 서준이와 리첼 힐, 에반 블록은 리첼 힐의 저택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DVD가 꽂힌 책장 앞에서 열심히 영화를 고르고 있는 서준과 에반 블록의 모습에 리첼 힐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모이기만 하면 영화 이야기, 연기 이야기야?”

“왜 재밌잖아.”

“너야 그렇겠지. 준은 어때?”

“엄청 좋아요!”

기다린 듯한 두 사람의 대답에 폭신폭신한 소파에 거의 눕듯 앉은 리첼 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저 영화 DVD만 봐도 재미있는 모양인지 영화를 고르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언제까지 고를 거야? 지루하게 기다리던 리첼 힐이 문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럼 그거 볼까?”

“뭐?”

“그거요?”

리첼 힐의 말에 에반 블록과 서준의 고개가 돌아갔다. 리첼 힐은 나라 킴에게서 들었던 소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어 자막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준. 한국에서 연극 했다며?”

에반 블록도 떠올렸다. 영화 DVD에 푹 빠져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연극. 영화로 데뷔한 서준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나라의 설명으로는 아이들만 무대에 올랐다고 했다.

할리우드 배우인 두 배우의 눈에는 모자라 보일 것이 당연했지만, 서준의 연기였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서준의 연기.

오히려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알았으면 당장 한국으로 날아갔을 텐데.

다행히도 서준의 연극은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네. 했어요!”

“그거 DVD가 있어?”

“네! 들고 왔어요. 리첼이랑 에반한테 주려고. 영어 자막도 있어요!”

서준이가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리첼과 에반도 그 뒤를 따랐다. 서준의 늑대 모양 가방에서 DVD 2개가 나왔다. 서준이 건넨, 아기자기한 표지의 DVD에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거 보자.”

“이거 아역 배우만 나와요. 그리고 우리가 대사도 바꾸고 그랬어요.”

에반 블록의 말에 서준은 영화관으로 향하면서 연극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던 두 사람은 목소리만 나왔다는 서준의 말에 웃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서준의 연기가 궁금해졌다.

“정말 궁금하네.”

“그러게. 어떤 연기를 했는지 짐작이 안 가.”

서준과 두 배우가 자리에 앉았다. 세 배우의 눈앞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 무대가 펼쳐졌다.

1회차.

2회차.

3회차.

즐겁게 연극을 보던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진지한 표정으로 연극을 바라보았다. 두 배우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스크린만 보았다.

몇 번이나 보았던 연극을 보던 서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다가 푹신한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그사이 외출했다가 돌아온 부부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영화관에서 무대에 푹 빠진 두 배우와 잠에 푹 빠진 서준을 보았다.

문이 열려도 두 배우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민준은 조용히 서준을 안고 나왔고 서은혜는 영화관을 문을 꼭 닫아주었다.

그리고,

8회차.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은 잠시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룡의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음질 좋은 스피커가 쿵쿵 심장을 때리듯이 울려 댔다.

한국에서 관객 중 일부가 봤다던 ‘진짜 청룡’이 두 사람의 앞에도 나타났다.

물결치는 수염, 날카로운 눈매, 번쩍이는 발톱 그러나 인자한 목소리와 따뜻한 눈빛.

이상한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두 사람은 청룡이 서준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 날.

리첼 힐의 저택은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다. 모두 WTV 영화제에 가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리첼 힐이 부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서준과 에반 블록까지 화장해 주고 얼른 리첼 힐에게로 향했다.

서준은 서준의 체형대로 수선을 마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나비넥타이를 하고, 앞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으로 차에 올랐다.

“서준아. 이거 챙겨야지.”

“응!”

서은혜는 서준의 정장 주머니에 손수건을 잘 접어 넣어 주었다. 검은색 양복에 하얀색 손수건이 눈에 띄었다.

날개가 달린 말, 페가수스가 수놓아진 손수건은 서은찬이 영화제 후보에 오른 기념으로 선물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서준의 머리와 정장을 매만져준 서은혜와 이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잘 보고 있을게! 잘하고 와!”

“서준이 화이팅!”

“응! 나 잘하고 올게!”

서준은 엄마 아빠와 포옹했다. 긴장감에 쿵쿵 뛰는 엄마 아빠의 심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서준에게 인사를 한 서은혜와 이민준은 다른 차에 올랐다. 서준은 창문으로 엄마 아빠가 탄 차가 출발하는 걸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는 찬이 삼촌, 다호 형과 먼저 영화제 관람석에 가 있기로 했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아쉽기도 했지만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이리저리 소리를 질러댈 사람들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릴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따로 가는 게 더 좋았다.

관심받는 게 참 좋은 서준과는 확실히 다른 엄마 아빠였다.

“연극 정말 잘했더라.”

서준의 옆자리에 앉은 에반 블록이 입을 열었다. 서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요?”

“그래. 밤새 보느라 잠도 설쳤어. 화장으로 가려서 안 보이지만 다크서클이 이만큼 내려왔어.”

에반이 손가락으로 턱 끝을 가리키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나만 빼고 재밌는 이야기 하는 거야?”

그리고 리첼 힐이 차에 올랐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금발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리첼 힐이 정말 예뻐서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뻐요! 리첼!”

“고마워!”

리첼 힐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연극 이야기요. 에반이 밤새 봤대요.”

“아. 나도 같이 봤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봐버렸어. 지금 엄청 피곤해서 나중에 시상식 때 잘지도 몰라.”

리첼 힐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리첼 힐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그 DVD 라이언 감독님한테도 주자. 준이 연기를 엄청 잘했다고 하면 보고 싶어서 못 참으실걸.”

“영화제는 보고 가셔야지. 끝나면 드려.”

진짜로 영화제 중간에 나가버릴 것 같아, 서준은 에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 배우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가 출발했다.

중간에 함께 레드카펫을 걸을 라이언 윌 감독까지 차에 오르고 쉐도우맨 팀이 모두 모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어쩌다가 DVD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버렸다.

영화제에 참석하느라 리첼 힐의 집에 DVD를 놓고 왔다는 서준의 말에 라이언 윌 감독은 가는 내내 초조한 듯 다리를 떨어댔고 이것 보라는 듯한 에반과 눈이 마주친 서준은 웃고 말았다.

‘라이언 감독님. 진짜 중간에 갈 것 같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고 차가 멈추었다.

WTV 영화제.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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