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8화
“DVD요?”
회의실에서 은하수 센터의 사장을 만난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뮤지컬도 연극도 DVD로 만들어서 판매하고는 하죠. 우리만 보기엔 아까우니까, DVD로 만들고 싶습니다. VOD도요.”
DVD라.
서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연극의 특징은 똑같은 무대가 없다는 점이었다. 같은 대본, 같은 무대, 같은 소품이지만 그때그때 배우들의 기분과 시너지가 회차마다 달랐다. 연습할 때도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서준은 그게 재밌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형 누나들이 더할 나위 없는 연기를 하면 이걸 찍어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 또 바로 다음 연습 무대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뜨려서 무대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면 그것도 나름대로 아주 좋았다.
정말로 무대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느낌. 연습하면 할수록, 공연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형 누나들과 함께, 관객들 앞에서 만들어나갈 무대가 기대되었다.
그런 무대를 영상으로 남긴다니! 서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지만, 누나랑 형들은 어떻게 한대요?”
서준의 질문에 사장이 환하게 웃었다. DVD 녹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배우들도 보호자들도,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모두 동의했다.
“다들 찬성했어요.”
“그럼 저도 괜찮아요.”
서준이 승낙하자 안다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한다고 하니, 코코아엔터에서도 할 것이 분명했지만, 계약 조건과 수익 배분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다.
“그럼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런데 팸플릿에 올라갈 이름을, 그러니까 예명을 알려주셔야 하는데, 정해진 예명이 있나요?”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관객들에게 나누어줄 홍보물과 팸플릿을 만들어야 했다.
“사진은 저번 연습 무대 때 썼던 청룡 그림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예명만 정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장의 말에 서준이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랑 희상이 삼촌이랑 찬이 삼촌까지 모여, 예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후보 중 서준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예명을 말했다.
“예명은 나 진으로 해주세요.”
사장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딘가의 지명 같은 이름이, 서준과 함께라면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건…….”
“아시겠어요?”
서준이 이히히 웃었다.
* * *
DVD에 대한 계약의 이야기가 나온 날부터 무대가 한껏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넉넉한 예산의 힘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어디 외국 유명 무대에서나 볼 법한 장치들이 나오고 움직이는 소품들에 아이들의 연습이 더욱더 완벽해져 갔다.
최소영은 기가 질린 얼굴로 무대를 보았다. 중 2라는 나이에 출연한 연극 작품만 벌써 6개. 그중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뮤지컬도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힘을 들이는 무대는 처음 봤다. 두 작품을 같이한 연기학원 친구, 이다진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감정이입 저절로 되겠다.”
“그러게. 근데, 감정이입은 그게 최고지.”
“서준이 말이지?”
“진짜,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최소영은 연습 때를 떠올렸다. 2주 동안의 장면별 연습도 대단하긴 했는데, 단체 연습 때가 결정적이었다.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면 그 정도 연기력이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럴지도.”
“난 평생 못 가겠네.”
질린 듯한 최소영의 모습에 이다진이 웃었다.
“하긴 대단하긴 했어. 우리도 한 번씩 소원 빌었잖아.”
“다진이, 너. 그때 진짜로 소원 빌고 싶어서 그랬던 거지?”
“응!”
최소영의 말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이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이없는 대답에 두 사람이 킬킬 웃었다.
* * *
몇 번의 단체 연습이 지났을 때였다.
간식을 먹던 이다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다진은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연기는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친구, 최소영의 연기가 청룡이 등장하는 장면만 되면 진짜 멋진 연기로 변했다.
정말로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그리고 청룡도 그에 답하듯 엄청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 장면을 보면 정말로 청룡이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절이나 교회에 가면, 그 종교를 믿지 않아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도 괜히 한 번 소원을 비는 것처럼 이다진은 청룡님에게 소원을 빌고 싶었다.
“저도 소원 빌고 싶어요!”
“뭐?”
알 수 없는 이다진의 말에 박지수 감독이 되물었다. 아차.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한 이다진이 얼른 이것저것 갖다 붙였다.
“서준이 연기가 너무 진짜 같아서, 같이 연기를 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합니다! 소영이도 실력 많이 늘었잖아요!”
그 말에 아이들도 저마다 손을 번쩍 들고 보호자들도 이다진의 말에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지수 감독이 피자를 먹고 있던 서준을 보았다. 냠냠 맛나게 먹던 서준도 자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박지수 감독도 청룡이 나오는 장면에서 정말로 청룡을 믿는 아이가 되는 최소영의 연기력에 감탄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전 장면에서는 평소 실력이라는 말이지. 서준이의 연기력이 소영이의 연기력마저 상승시키는 거라면, 다른 아이들과 한번 연기해 보면 어떻게 될까?’
박지수 감독은 어느새 피자 조각을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과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보고 서준에게 물었다.
“어때? 서준아.”
“괜찮아요.”
서준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음. 열다섯 명에 소영이 누나를 빼면 열네 명이니까. 열네 번이나 하는 건 무리고.
남은 선기를 체크하며 능숙하게 나눗셈을 하던 서준이 되물었다.
“4명씩 해도 돼요?”
“응!”
“그러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무대가 꾸며졌다. 무대 위로 청룡이 나타났다. 무대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가장 먼저 완성했지만 지금도 수정되고 있는 청룡. 놀이동산 퍼레이드의 그것을 그대로 떼어온 듯한 청룡 모형.
길고 긴 수염이 무대의 양 끝까지 이어졌고 커다랗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무대와 관객석을 내려다보았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길고 긴 몸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무대가 어두워지고, 판자 뒤에 선 서준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무대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스위치를 눌렀다.
끔뻑,
청룡의 눈이 감겼다 떠졌다.
“그 날 이후로는 진짜 아이들 실력이 많이 는 것 같아요.”
“뭐, 이 연극 한정이기는 하지만요.”
“이런 경험이 토대가 되는 거죠.”
보호자들과 학원 관계자가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학원 관계자의 말대로 이 연극에서만 아이들이 감정이입을 훨씬 더 잘하게 되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동화 속에서 사는 주민이 된 듯, 그렇게 움직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청룡이 진짜 있는 것 같다면서 무대 위에서만큼은 청룡이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 같대요.”
“우리 애는 저번에 소품 상자를 빤히 보더라고요.”
“소품 상자요?”
“네. 그 안에 주인공이 모으는 여의주 조각이 들어 있었거든요.”
“아하. 알 것 같아요.”
“네. 진짜 이걸 가져가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것 같다고. 한번 빌어볼까? 고민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조금 현실과 상상을 구별 못 하는 경향이 있긴 하죠.”
“솔직히…….”
누군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비밀 유지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고, 간식을 순서대로 사 오면서 보호자들도 서로 친해졌다.
“저도 단체 연습 보면서 소영이가 소원을 빌 때 같이 빌고는 해요.”
“하긴, 청룡신이 분위기가 대단하죠.”
그런 보호자들의 이야기가 직원을 통해서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다시 한번 사장의 눈이 번쩍였다.
* * *
“야. 진짜 이거 보게?”
“이게 제일 쌌다고. 남은 돈으로 피시방이나 가자.”
“진짜, 창피해서.”
김수한의 말에 친구가 마른세수를 했다. 여름방학 숙제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숙제가 있었다. 학교에서 지원금을 줘서 적당한 가격대의 작품이라면 무료로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이제 고등학생인데 어린이 연극은 너무하지 않냐?”
“다른 건 다 매진이더라. 빨리 보고 맘 편히 놀아야지.”
맞는 말이기는 한데, 친구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너 이거 감상문 써야 하는 건 알지?”
“알아. 뭐, 동심을 찾았다. 정도로 쓰면 되겠지. 별로 안 알려진 연극이라서 쌤이 푯값을 알 리도 없잖아.”
“그래. 알았다.”
이미 은하수 센터 앞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기도 그랬다. 김수한과 친구가 은하수 센터에 들어갔다.
“……어린이 연극 맞아?”
“맞는데…….”
그런 것치고는 어른이 많았다. 단체로 온 듯한 손님도 있었고, 가족 손님도 많았다. 아이들 반 어른들 반. 눈을 끔뻑거리던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만 나오는 연극이라니까, 가족이랑 친구들이 보러 왔나 보다.”
“아, 그렇겠네.”
“뭐, 뻘쭘하게 우리 둘만 있는 것보다는 낫지.”
관객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그룹이 있었다. 아이는 한 명도 없었고 어른만 있는 무리였다.
서은혜와 이민준은 팸플릿을 들었다. 김희상도 서은찬도 있었고 손주의 첫 연극을 보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 왔다.
“여기 서준인가 봐.”
잘 그린 용 그림 밑에 ‘나 진/8세’라고 적혀 있었다. 모두 팸플릿에 집중하는 사이 서은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데?”
“연기학원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사장님.”
어디선가 안다호가 불쑥 나타났다. 헉! 하고 놀란 서은찬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심장 떨어지는 줄!
그런 동생은 무시하고 서은혜가 물었다.
“연기학원이요?”
“서준이가 출연한다는 걸 몇몇 사람들에게 말한 것 같습니다.”
안다호의 눈이 학원장들과 강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입이 근질근질한, 미묘한 표정이 누가 출연하는지 아는 눈치였다.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보며 도 닦는 기분으로 입을 닫고 있었다.
이서준의 이름값을 얻느냐, 아니면 기자들의 먹잇감이 되느냐, 그 양자택일에서 선택할 건 전자임이 분명했다.
“다행히 충고를 잘 알아들었는지, 기사도 없고 뜬소문도 없었습니다. 함께 온 아이들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서준의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데려온 아이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지루한 얼굴이었다. 몇몇은 휴대폰만 보기도 했다.
같은 학원 학생이 출연했다는 이유로 우르르 몰려와서 관람해야 하나? 나 때는 안 그랬는데? 그런 이야기도 들렸다.
겨우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서은찬이 물었다.
“그 정도면 괜찮죠?”
“네. 사장님.”
“다호 씨. 서준이는요?”
오늘 아침 서준과 함께 은하수 센터로 향하는 안다호와 인사했던 이민준의 물음에 안다호가 안쪽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집중해야 한다고, 웬만하면 비켜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이거 DVD도 나온다던데, 언제 파나요?”
손주의 연극 무대를 소장하고 싶었던 할머니의 질문에 안다호가 대답했다.
“일단 8번의 공연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공연의 녹화분을 판매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연극이 끝날 때 판매할 것 같습니다.”
“아직 두 달이나 남았네요.”
이민준과 서은혜는 손가락을 접으며 DVD를 선물할 사람들을 떠올렸다. 브라운블랙 애들한테도 보내야 하고, 미국에도 보내야 했다.
[이제 곧 연극 ‘봄’이 시작할 예정입니다. 관객분들은 모두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음과 함께 직원이 극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한 손에는 팸플릿을 든 사람들이 극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날에는 가족과 지인들만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넓었던 관객석은 조금밖에 차지 않았다.
여기서 배우들과 관계가 없는 관객은 숙제로 연극을 보러온 두 남학생뿐이었다.
배우들의 부모들이 아쉬운 눈으로 빈 관객석을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아이들은 연습 때만 해도 텅텅 비었던 관객석에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에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활기차게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조용해지자, 박지수 감독이 평소처럼 박수 소리로 아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다들 준비됐어?”
“네!”
마감이 잘 되어 있는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대답했다.
쏟아지는 예산에 아이들의 의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처음 이번 연극을 구성할 때는 그저 적당히 끝나기만을 바랐는데, 언젠가부터 ‘진짜’ 있는 이야기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럼 화이팅할까?”
박 감독의 말에, 주인공 최소영이 손을 뻗었다. 그 위로 서준과 아이들이 둥글게 모여 손을 모았다.
스태프가 활짝 웃고 있는 서준과 아이들의 얼굴을 돌아가며 찍었다. DVD에 들어갈 메이킹필름이었다.
“봄!”
“봄!”
“화이팅!!”
발끝에서부터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이제 곧 무대가 시작된다.
꺼진 마이크를 든 서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긴장감과 기대감에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걱정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서준이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서준도, 아이들도 알았다. 그들이 만든 무대가,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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