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6화
“대본을 고치면 어떨까요?”
은하수 센터 사장의 말에 박지수 감독이 말없이 팔짱을 꼈다. 조명 감독도 음악 감독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전 그렇게 연기하는 아역 배우는 처음 봤어요.”
다시 떠올려도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무대 위에 홀로 선 이서준이 청룡의 대사를 내뱉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가만히 서서 목소리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에 맞추어 표정도 몸짓도 변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모습이 진짜,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진짜 청룡이 인간 아이로 변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도, 인간이 아닌 역할을 할 때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특수분장도 하지 않고 연기를 할 때는 보는 사람마저 이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서준은 달랐다. 아무런 분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서준의 연기를 본 사람들은 그 어디에서도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사장의 눈이,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해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용이 있다면 그런 느낌, 몸짓, 표정이 아닐까 하고. 박 감독님. 그냥 목소리만 내보내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그건 모든 사람이 봐야 해요.”
“글쎄요.”
박지수 감독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사장님도 아시잖아요. 그 정도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본을 선택합니다. 이서준은 ‘지금의 대본’이 마음에 든 겁니다. 함부로 바꿨다가는,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있죠.”
그런 배우들이 있다.
분량, 대사량 상관없이 마음에 든 ‘대본’만 연기하겠다는 배우.
자신의 연기에 신념을 가지고 있고, 돈도 여유롭고, 상황도 급하지 않은.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찾기 위해 서는 몇 년의 공백기를 가질 수 있는 배우.
그런 배우들의 자신감의 원천은 대중이었다. 언제고 어떤 역으로 나타나도 대중이 열광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슈퍼스타!
“이서준은 그 정도 급입니다.”
박지수 감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이서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서준이 매년 너튜브 영상으로 벌어들이는 돈, 마린사의 영화로 쌓은 세계적인 인지도, 그리고 재수사 카메오로 시작될 브라운관 진출로 얻을 대중적 인기까지.
사장이 한숨을 쉬었다.
“꼭 흥행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냥, 연극계의 일원으로서 무대가 너무 아까워요. 이서준 배우가 너무 아깝습니다. 모두가 이서준 배우의 능력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이서준 배우 쪽에서도 정체를 숨긴다고 하니, 지금의 대본이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것도 있었죠.”
사장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매만졌다.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참 착한 배우인데 전 왜 계속 아쉽다는 생각이 들까요?”
돈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이서준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너무 아쉬웠다. 모두가 이서준의 연기를 봐줬으면 싶었다.
여전히 안타까워하는 사장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지수 감독은 회의의 본론을 꺼냈다.
“그럼 이서준 배우의 출연은?”
“‘봄’ 팀의 의견은요?”
“합격입니다.”
박지수 감독의 말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흐흠. 그럼 일단 센터 내 비밀 유지부터 시작할까요?”
* * *
식탁에 수저를 놓던 서준이 귀를 매만졌다. 된장찌개가 담긴 그릇을 식탁으로 옮기던 이민준이 물었다.
“왜 그래?”
“귀가 간지러워.”
“누가 서준이 이야기하나 보다.”
“그러게.”
서은혜가 웃으면서 노릇노릇 구운 갈치를 식탁에 놓았다. 통통한 갈치가 맛있어 보였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이민준이 갈치살을 발라 서준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서준은 숟가락 가득 밥을 퍼 갈치와 함께 먹었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갈치!
“맛있어!”
“맛있어?”
“응! 아빠. 이번엔 내가 발라 볼래!”
“그럴래?”
이민준이 천천히 서준에게 갈치 뼈를 바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일단 가시가 많은 갈치의 양옆을 젓가락으로 떼어낸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뼈 위를 살살 바르면,
“됐다!”
“잘하네!”
“서준이가 손재주가 좋아.”
완벽!
기다랗고 새하얀 갈치살이 완벽하게 발렸다.
맛난 갈치와 된장찌개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후식을 먹기 위해 서준과 부부는 거실로 향했다. 참외를 한 조각 먹은 서준이 입을 열었다.
“오디션을 봤는데, 애들이 막 울고 그랬어.”
“그랬어?”
“응.”
잠시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안다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서은혜와 이민준이 조용히 서준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걔 엄마가 ‘이서준처럼 되고 싶다며?’ 하고 그러니까, 걔가 울면서 그런 적 없다고 그랬어.”
“그랬구나.”
“응.”
서은혜와 이민준이 서준의 옆에 앉아 꼬옥 껴안아주었다. 따뜻한 엄마 아빠의 품 안에서 서준이 조용히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서준아, 그건 서준이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래. 그 아이는 그냥 그 상황이 싫었던 거야. 그 아이는 다른 걸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억지로 시켜서 그렇게 화가 난 걸 거야.”
“응.”
알고 있었다.
이서준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가장 눈에 띄고 유명한 아역 배우의 이름을 말한 거라고.
그래도 자신이 그 아이의 불행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줬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 같은 사람들이 생겨날 거라는 것도.
‘……이미 생겼을지도.’
서준이 엄마 아빠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서은혜와 이민준이 서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준이는 연기가 좋지?”
“……응. 엄청 좋아.”
“엄마 아빠는 서준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엄청 좋아. 그리고 서준이 팬들도 서준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걸 좋아할 거야.”
“서준아. 서준이가 유명해지면 질수록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거야. 그리고 그렇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서준이가 모두 해결할 수는 없어. 그건 레드본도, 쉐도우맨도 못하는 일이야.”
“응.”
“그러니까 서준이가 힘들거나 마음이 아플 때는 서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떠올리자. 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대단한 일이니까.”
엄마 아빠는 한 명 한 명 지인들의 이름을 말하며 손을 꼽았다. 그 속에는 서준의 팬카페에 자주 글을 올리는 팬들의 닉네임도 있었다.
사랑이 듬뿍 담긴, 엄마 아빠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들이 마치, 엄청난 마법의 주문처럼 서준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이히히히.”
서준이 웃자, 서은혜와 이민준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시 행복해진 서준이네의 거실이 서준의 연기 연습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자신의 방에서 청룡 인형을 가지고 온 서준이 연기를 시작하자, 관객이 된 서은혜와 이민준이 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어릴 때부터 몬스터 인형을 달고 살더니, 진짜 이런 역할을 맡을 줄이야.
솔직히 부부도 김희상처럼 예상했다. 언젠가 어떤 역이든 몬스터 역을 하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엄청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려 서준의 나이만큼의 연습량이 아닌가.
“근데 목소리만 나와도 괜찮아?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고 싶었잖아.”
“괜찮아! 목소리 연기도 연기인걸!”
“정말?”
“음. 조금 아쉽긴 해. 근데 청룡 역이잖아!”
서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용이나 몬스터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지인짜 드물잖아. 나와도 사람 모습이고. 영화는 꽤 있지만, 연극이나 뮤지컬은 별로 없잖아. 연극 하고 싶지만, 몬스터가 더 하고 싶으니까. 이 작품이 아니라면 언제 할지도 모르고!”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서준의 생각보다 몬스터 역할이 많을 수도 있고, 서준의 생각대로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난 지금 이걸 할 거야.”
분명한 건, 목소리만으로 연기해도, 지금 이 역할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으! 엄청 재밌을 것 같아!”
결국,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대감을 참지 못한 서준이 청룡 인형을 꽈악 껴안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서준의 양쪽 볼이 한껏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 모습에 서은혜와 이민준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잔뜩 신이 난 아들이 너무 귀여웠다.
* * *
첫 연습 날이 되었다.
연극 [봄]에 출연할 배우들이 모두 은하수 센터 연습실에 모였다. 15명의 아이들이 제 또래들과 어울려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보호자들도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거 문체부에서 지원하는 연극이라면서요?”
“네. 그래서 조금 있다가 아이들 사진 찍으려 기자 몇 명이 온대요. 문체부 공무원이 올 수도 있다더라고요.”
“아. 그래도 관객은 별로 없겠죠?”
“뭐, 관객 때문에 하나요. 이력서에 경력 한 줄 넣는 거죠. 앞으로 배우를 하든, 공부하든 문체부 지원의 프로그램이면 좋은 대외활동이 될 거예요.”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한 명 모자라지 않아요?”
“그렇네요. 16명 뽑았다던데.”
“첫날부터 늦으면 좀 그럴 텐데요.”
그때 마침, 박 감독과 스태프들, 그리고 기자 몇 명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열심히 떠들던 아이들도 보호자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연습실을 둘러본 박지수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일단, 단체 사진부터 찍고, 그다음 리딩 장면을 찍을 겁니다. 리딩 때는 카메라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저, 감독님.”
연극 ‘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주인공을 맡은 최소영이 손을 들었다.
“네.”
“아직 한 명이 안 온 것 같은데요.”
“아.”
박지수 감독이 볼을 긁적거리고는 대답했다.
“청룡 역의 배우는 개인 사정으로 오늘은 못 오고 다음 연습 때는 확실히 참여할 겁니다. 그럼 모두 모여서 단체 사진 촬영할까요? 일단 배우들 먼저 찍고 다음은 보호자분들까지 함께 찍읍시다.”
“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키가 작은 아이들은 앞으로 키가 큰 아이들은 뒤에 섰다. 기자들과 스태프들이 들고 있던 카메라가 번쩍 번쩍거렸다.
아이들의 첫 리딩은 기자들과 보호자들의 예상보다는 나았고 감독과 스태프들의 기대보다는 못했다.
연신 박수를 보내는 보호자들과 적당히 호응하는 기자들의 모습에 박지수 감독과 스태프들이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이게 정상이다. 이서준이 특별했을 뿐이었다.
[문체부 지원, 은하수 센터 기획. 아이들만의 연극 ‘봄’]
[‘봄’은 한 소녀의 모험을 그려낸 연극으로…….]
[봄 연습 첫날, 단체 사진.]
출연하는 아이들과 보호자만 찾아서 본, ‘봄’의 기사는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연예 기사에 묻혀버렸다.
* * *
두 번째 연습 날.
서준은 박지수 감독의 소개에 맞춰 나갈 생각이라서 일찌감치 은하수 센터에 도착했지만 옆 연습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준은 평소답지 않게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에 안다호가 물병을 따, 서준의 앞에 내밀었다.
“물 마실래?”
“응!”
물 한 모금을 마신 서준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안다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긴장해?”
“아역 배우를 만난 적이 없거든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것도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호 형도, 이야기를 들은 엄마 아빠도 모두 서준을 위로해 주었다.
그 아이의 일처럼 서준의 마음과는 달리,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 문제를 모두 자신이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서준은 자신과 모두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들 연기를 좋아하니까, 모두 함께 즐겁게 작품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사이가 좋아질까?
연습실에 모두 모였는지, 직원이 손짓했다.
그에 서준은 크게 숨을 내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약간 반칙 같았지만, 아이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엘프의 기초호흡]을 시작했다.
그리고 서준의 몸에서, 모두가 궁금해했던 배우의 아우라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에 직원과 안다호가 몸을 흠칫했다.
‘……기선제압인가?’
서준의 생각과는 완전 달랐다.
“그럼, 청룡 역을 맡은 배우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박지수 감독의 말과 동시에,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곧 다들 박지수 감독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아이가 누군지 깨달았다.
누구보다도 반짝이는 외모에 환한 미소. 또래 연기자는 처음 만나 조금 긴장한 서준이 아이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뿜어내는 선기까지.
그 따뜻하고 일반인 같지 않은 아우라에, 모두 한 번씩은 본 적 있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서준!”
주인공 ‘봄’ 역의 최소영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쉐도우맨을 봤던 아이들이 와아아! 소리를 질렀고 보호자들도 할 말을 잃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던 아이들도 텔레비전에서 한 번은 들어봤던 ‘할리우드 스타, 이서준’의 모습에 입만 벌리고 있었다.
배우의 아우라를 내보내고 있는 서준이 아이들 앞에 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서준입니다!”
“안녕하세요!”
마치 선생님이 된 것처럼, 서준의 말을 따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 자신을 환영해 주었다.
걱정이 사라지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제야 여기 있는 아이들과 함께 연기한다는 사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항상 어른들과 연기를 하다가, 이렇게 또래를 만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올려 봐야 하는 어른들과는 눈높이부터가 달라 신기했다. 연기라는 같은 길을 가는 아역 배우들.
학교 친구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안녕. 난 최소영이라고 해.”
“안녕하세요!”
가장 연장자이자 첫 연습 날 아이들의 리더가 된 최소영이 먼저 자신을 소개하자, 아이들도 차례차례 자기소개했다.
별 탈 없이 아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자 박지수 감독은 조연출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럼 보호자분들은 잠시 이쪽으로.”
박지수 감독은 아이들을 조연출에게 맡기고 보호자들과 다른 연습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보호자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박지수 감독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쿵. 하고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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