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64화 (64/1,055)

0살부터 슈퍼스타 64화

흐뭇한 얼굴로 김희상이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안다호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서은찬 사장이 김희상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어.”

“네?”

“앞으로 서준이를 서포트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렇네요.”

좋은 질문이었다. 답변할 상대도, 부부와 다른 기준에서 서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김희상이기도 했다.

“일단 서준이는 하기 싫은 건 안 합니다. 하기 싫은 게 별로 없긴 하지만요. 그리고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합니다.”

김희상은 8개월간의 고행을 떠올렸다. 바뀌지 않는 연기에 답답함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해낸 서준의 모습에 절로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이건 몇몇 사람만 아는 이야기인데, 서준이가 쉐도우맨 2의 촬영을 위해서 8개월 동안 한 대본만 연습했습니다.”

“8개월이요?”

안다호의 눈이 커졌다.

“네. 그 정도로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고, 그리고 노력까지 하죠. 그리고 말했다시피, 서준이는 흥행은 상관 안 합니다. 그냥 재미만 있으면 어떤 대본이라도 좋다고 하죠.”

“그렇군요.”

당장, 열심히 흥행작을 고르고 있을 2팀에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안다호가 휴대폰을 꺼냈다.

“저, 잠시 통화 좀 해도…….”

“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구석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 안다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2팀 전원이 탄식했다.

-아니, 사장님은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빼놓고!

-일단, 제외한 것 중에 망할 것 같은 것만 빼고…… 아니, 진짜 감독이나 제작사에 문제가 있는 작품만 빼고 다 보내죠.

-어린이 뮤지컬도 된다고요? 그럼 다시 찾아야겠네요!

2팀은 시끌시끌 바빠졌고, 사장실에 있던 서은찬은 귀가 간지러워졌다.

“이거 할래!”

모든 대본을 읽어본 서준이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안다호는 당장 수첩을 꺼내 들었고 김희상은 서준의 간식으로 사 온 과자를 먹으며 물었다.

“그래? 무슨 역인데?”

“청룡!”

“청룡?”

고개를 갸웃하는 안다호와는 달리 김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상기된 서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것 같았다. 그 행복을 가득 닮은 얼굴에 김희상은 아기 때부터 몬스터 인형을 옆에 끼고 살았던 서준을 떠올렸다.

어쩌면 서준의 연기력의 원천은 어릴 때의 인형 놀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 난 인형극을 펼쳤던 아기 서준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에나 출연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벌써 이런 날이 오다니.”

서준이 신나게 줄거리를 이야기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김희상과 서준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까 경청하던 안다호의 고개가 점점 옆으로 기울었다.

“주인공이 아니네? 임팩트는 있지만, 분량도 다른 역보다 작은 것 같고.”

서준의 이야기에 당황한 안다호가 대본을 펼쳐 보았다.

[청룡(목소리)]

다시 읽어보아도, 행동이나 연기의 지시문은 없었고, 목소리 톤에 대한 지시문만이 가득했다.

대본에도 적혀 있었다. 청룡은 무대장치로 만들기 때문에 배우의 목소리만 나올 거라고.

“……목소리만 나오는데, 괜찮아?”

안다호의 물음에도 서준은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응! 이게 좋아.”

“……그래?”

안다호의 눈이 김희상에게 향했다. 김희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임 매니저 같은 김희상의 고갯짓에 안다호의 안색이 밝아졌다.

“알았어. 공고 읽어보고 신청서 보낼게.”

“와아!”

드디어 차기작을 찾았다. 기뻐하던 서준이 문뜩 떠오른 생각에, 김희상을 바라보았다.

“근데 무슨 연극이길래 아이들만 나와?”

“보자.”

김희상이 휴대폰 화면을 읽어 내려갔다.

서울에서 제법 큰 공연장을 가진, 뮤지컬과 연극을 볼 수 있는 은하수센터에서 기획한 연극이었다.

“어린이 연극. 연기하고 싶은 아이들은 많은데 연기를 펼칠 무대가 없어서 만드는 연극이래. 근데 처음 시도하는 거라서 이번에만 특별히 경력 있는 아역 배우들의 신청도 받는대.”

“그렇구나! 나도 할 수 있겠네!”

“무료 연극이 아니라 유료라서 연습이 힘들 수도 있고, 배우의 역량에 따라 중간에 배역이 바뀔 수도 있대. 경험 없는 배우는 대사가 적은 배역에 지원하길 권고하고.”

그 이외에도 온갖 경고문이 달려 있었다.

체력적인 문제부터 훈육할 수 있다는 점까지. 그래도 언제든 연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모의 마음을 얻었다. 물론 연습에 끼어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간에 빠질 수 없으니, 충분히 생각하고 지원하래.”

“말 그대로 어린이가 주인공인 연극이네요.”

주인공.

안다호의 말이 서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다호 형.”

서준이 입을 열었다. 조금 무거운 듯한 목소리에 열심히 공고를 읽고 있던 안다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준을 보았다.

“나 이거 안 할래요.”

“뭐?”

“왜? 서준아.”

당황한 김희상과 안다호의 달램에도 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 * *

서준이 한숨을 쉬었다. 지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준아. 어디 아파?”

“아니. 그냥 고민이 있어서.”

“무슨 고민인데?”

앞자리에 앉은 지후, 지오 쌍둥이가 몸을 돌려 앉았다. 미나도 얼른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음.”

서준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곰곰이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내가 유명하잖아.”

“응!”

“서준이 짱 유명해.”

요즘도 쉬는 시간에 찾아오는 고학년 학생들을 떠올린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연극을 하면 다들 나만 볼 것 같아서 걱정이야.”

“나만 보면 좋은 거 아니야? 난 엄청 행복할 것 같아!”

지윤의 말에 아이들이 자신들도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음. 지후야. 지오야.”

“응?”

“만약에 사람들이 지후만 좋아하면 어떨 것 같아?”

그 말에 금세 감정 이입한 지오가 울먹거렸다.

“엄마도? 아빠도? 지후만 좋아해?”

“아니. 엄마랑 아빠는 지오랑 지후 둘 다 좋아하고. 그냥 슈퍼 아저씨랑 분식집 아주머니가 지후만 좋아하면 말이야.”

서준이 얼른 설명을 붙이자 지오가 진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싫어. 나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지오의 말에 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오랑 나랑 똑같이 좋아해 주는 게 좋아!”

“나도 그래. 같이 나오는 배우들이랑 나도 똑같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근데 내가 유명해서 어려울 것 같아서 고민이야.”

아이들은 반쯤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다들 똑같이 좋아해 줄까?”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서준이를 위해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들이었지만 학교가 끝나자 금세 잊어버리고는 신나게 서준의 집으로 놀러 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학원도 쉬고 친구들과 모여 노는 날이었다. 물론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집 안에서 놀기로 했다. 서은혜가 차로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나 팽이도 챙겨왔어!”

“나도!”

“나는 안 들고 왔어. 까먹었나 봐.”

“내 것 빌려줄게!”

서준은 하루쯤은 고민은 치워두고 열심히 놀기로 했다.

아이들은 간식을 먹고 열심히 놀다가 낮잠을 자고 다시 열심히 놀았다. 금세 저녁이 되었다.

어제 이야기를 듣고 걱정하던 서은혜도, 서준이 걱정돼서 일찍 퇴근한 이민준도, 따라온 김희상도 서준의 신난 얼굴에 마음을 놓았다.

아이들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지금 방송하는 팽이 만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의 눈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것만 보고 집에 가자?”

“네!”

서은혜의 말에 다들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세 사람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김희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때도 이름은 다르지만 비슷한 만화가 있었는데.”

“그러게. 우리도 열심히 팽이 돌렸었지?”

추억도 떠올릴 겸 열심히 보고 있는데, 시합하던 두 개의 팽이 중 하나가 경기장 밖으로 튕겨 나가,

3조각이 났다.

“?!”

“헐?”

화들짝 놀란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주인공이 이겼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김희상이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우리 때는 팽이는 안 부서졌는데. 장외거나 멈추기만 했지.”

“그러게. 우리 때, 팽이가 부서졌을 때는, 진짜 위험한 상황이거나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그 뒤로도 만화 속 팽이는 땅과 부딪히면 간단히 3조각으로 분리됐다.

주인공의 연전연승에 환호하는 아이들과는 달리, 분리되는 팽이에 면역성이 전혀 없는 세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했다.

“너무 쉽게 부수는 거 아니야? 세 조각 날 때마다 심장 떨어지는 기분이야.”

어른들의 추억 속 만화에서는 팽이가 부서지면 처절하게 울던 주인공들이었다. 팽이가 부서지면 만화 속 관중들도 경악하고는 했다.

“부서진다기보다는 분리가 되는 느낌인데? 일부러 약하게 만들었나?”

“요새 장난감 내구도를 그대로 옮긴 걸지도.”

부순 주인공도 부서진 팽이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는 상대방도, 가라! 외치고 있는 아이들도. 어른들의 눈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뜩, 김희상이 입을 열었다.

“이게 세대 차인가.”

어른들은 숙연해졌다.

주인공이 결승에 올라갔다. 상대방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머리 색하며 눈동자 색까지. 서준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쟤 레이지?”

“진짜네?!”

“레이가 악당이었어?!”

주인공의 친구, 레이였다.

하지만 주인공도 주인공의 친구들도, 관객석의 사람들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경기장에 나타난 레이의 이름도 달랐다.

엑스.

새로운 악당의 출연이었다.

“짱 재밌었어!”

“엑스래! 이름 멋있다!”

아이들이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부모님들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서준이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저녁으로는 족발을 배달시켜 먹었다. 서준은 능숙하게 상추에 고기를 한 점 올리고 새우젓에 양파절임까지 올렸다. 한입에 왕! 먹으면,

“맛있어!”

“그래? 꼭꼭 씹어먹어.”

“응!”

어른들은 열심히 서준의 앞으로 음식을 날랐다. 왜 마음에 든 연극을 안 하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잊어버렸으면 했다.

서준은 맛난 족발을 다 먹고 양치질을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칫솔에 치약을 짜고, 치카치카 칫솔질을 하던 서준이,

“어엉!?”

소리를 질렀다.

온종일 서준에게 신경 쓰고 있던 세 사람이 얼른 달려왔다.

“왜, 왜 서준아!”

“무슨 일이야?!”

우엑-! 거품을 뱉어낸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입을 헹구고 신나게 거실로 향하는 서준을 보며 어른들도 따라갔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은 한껏 들뜬 얼굴로 말했다.

“나 이름 감춰도 돼?”

“이름?”

이름? 세 사람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이름?

“응!”

“갑자기 이름은 왜?”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어른들의 표정에 서준은 아차 했다.

유명세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자신을 보며 걱정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는데,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아서 걱정을 산듯싶었다.

서준이 얼른 설명을 붙였다.

“그게, 어린이 연극이 아이들끼리 하는 연극이잖아. 다들 멋진 연기를 하고 주목받고 싶을 텐데, 내가 한다고 하면 대부분 나만 보러 올 거 아니야. 난 다른 아이들도 다 똑같이 주목받는 게 좋아.”

물론. 상업 연극이나 상업 영화는 다르다. 그건 여러 사람의 돈이 걸려 있고 흥행을 위해서 티켓 파워가 있는 유명 아이돌을 영화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서준도 그런 영화나 연극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오디션 신청서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이들을 위한 연극이었다.

아이들의 진지한 태도를 위해 푯값을 받기는 하지만 일반 연극보다 적었다.

은하수 센터에서도 출연하는 모든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 관심을 받길 원할 터였다. 서준도 그러기를 바라, 포기했다.

“그건 그렇지.”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의 이름으로 홍보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바로 눈앞에서 서준의 연기를 볼 수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윌리엄을 보고 울었던 사람들이나 악령에서 신을 보고, 쉐도우맨 2에서 그 서늘함을 느낀 서준의 팬들은 꼭 보러 올 터였다.

매체를 통해 걸러지지 않은, 서준의 생생한 연기를 느끼기 위해!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신청하면 안 될까?”

서준의 머릿속에 ‘레이’와 ‘엑스’가 떠올랐다. 겨우 이름이 바뀌고 얼굴을 가린 것뿐인데도 만화 속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만화만이 아니다. 영화 분장도 그렇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나왔다.

“가명을 쓰자는 거구나.”

“가명?”

“가짜 이름이라는 거야.”

“응! 가명!”

이민준과 서은혜의 말에 김희상이 쯧쯧 혀를 찼다.

“서준이가 연예인인데, 가명이 뭐야.”

“……넌 집에 안 가? 시간이 몇 신데.”

“아하하하. 예명이지. 예명. 예명 쓰는 연예인 많잖아.”

서은혜의 핀잔을 끊고 김희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명!

서준의 눈이 반짝였다.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