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60화
“크흠.”
이지석의 헛기침에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최민성 피디와 소은진 작가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 카메오 이야기 중이었죠?”
“이서준 배우가 출연해 준다면 당연히 감사하죠!”
“근데, 정말 대사도 별로 없고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역인데, 괜찮아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본도 지석이 형이 줘서 나온 것까지는 전부 읽어 봤어요. 엄마 아빠도 엄청 재밌겠다고 하고 저도 엄청 재미있게 읽었어요.”
재미있겠대! 소은진 작가가 두 손을 꼭 쥐고 날뛰는 정신을 붙잡았다. 할리우드 배우가 내 대본이 재미있겠대!
“피디님이 전에 했던 드라마도 미국에서 재미있게 봤던 거라서 연출도 잘하실 것 같고.”
최민성 피디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내 드라마 봤대! 연출도 잘할 것 같대!
성덕(성공한 덕후)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격한 두 사람을 보며 이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기 잘하는 지석이 형도 나오니까 카메오 하기로 했어요.”
아닌 척하던 이지석도 결국 감동하고 말았다. 서준이가 나보고 연기 잘한대!
말로 세 사람을 감동을 준 서준은 별일 없었다는 듯 주스를 마셨다.
길게 이어질 것 같았던 감동의 시간은 금세 끝났다. 촬영을 위해 스태프들이 하나씩 촬영장에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촬영 때까지는 이서준 배우는 숨기기로 하죠.”
“서준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큭.”
서준의 말에 두 사람이 감격하며 속으로 서준을 부르짖었다.
“그, 그럼. 서준이는 지석 씨 매니저님이랑 같이 있을까? 그게 낫겠지?”
“지석 씨 조카라고 하면 되겠다.”
“네. 알겠습니다!”
서준은 여기까지 쓰고 왔던 모자를 눌러쓰고는 구석에 서서 이지석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매니저 윤성오에게로 달려갔다.
최 피디와 소 작가의 시선이 서준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너무 귀여워!”
“그러게요. 어떻게 저렇게 귀여운 얼굴로 그런 연기를 하죠?”
“괜히 천재라고 소문난 게 아니라니까요.”
“지석 씨! 진짜 대단해요. 어떻게 이서준 배우, 아니, 서준이를 데리고 왔어요?”
최 피디의 물음에 이지석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까 이유 들으셨잖아요, 그게 사실일 거예요.”
“어……. 진짜요?”
빈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저냥 하는 칭찬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냥저냥 하는 칭찬이라도 기뻤는데, 그게 진심이었다고? 이지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대본이랑 연출이 마음에 안 들었으면 제 부탁이라도 그냥 거절했을 거예요. 그 정도로 연기를 좋아하는 아이니까요.”
“와…….”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윤성오 매니저의 옆에 앉아 세트장을 구경하는 서준이 달라 보였다. 이지석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촬영에서 제대로 보여주죠. 드라마 촬영이 이런 식이란 걸.”
“네?”
“서준이가 재미를 느껴서 차기작은 드라마에 출연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되면 다른 분들한테 자랑하셔도 될걸요. 우리 덕분에 이서준이라는 배우가 드라마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이지석이 웃었다. 쉐도우맨2의 진 나트라를 보면서 생각했다. 다시, 서준과 합을 맞추고 싶었다. 그게 드라마가 되어도 좋았고 영화가 되어도 좋았다.
“그게 작가님하고 피디님의 다음 작품이 될지도 모르죠.”
최민성 피디와 소은진 작가의 눈이 반짝였다. 이서준만 나온다면 누구라도 발 벗고 투자를 해주고 어느 방송국이든 황금시간대에 편성을 내줄 터였다. 흥행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아니,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서준이 맡아줬으면 하는 역할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두 사람 다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을 헤집었다.
“좋네요.”
“동감입니다.”
세 어른이 비밀작전을 꾸미듯 속닥속닥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윤성오가 고개를 저었다. 서준이랑 또 촬영하고 싶다! 쉐도우맨2를 보고 난 후부터 이지석이 계속 입에 달고 살았던, 지금도 줄곧 뱉어내는 말이었다.
“저 형이 또 헛다리 짚네.”
“헛다리요?”
어떤 과자를 먹을까? 고민하던 서준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윤성오 매니저를 보았다.
윤성오가 씨익 웃었다. 이지석은 서준이 드라마 촬영을 하지 않는 이유를 고민했지만, 윤성오는 그냥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서준이는 왜 드라마는 안 찍어?”
서준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대본이 없어요. 게다가 비슷비슷한 역할이라서 꼭 내가 아니라도 괜찮을 것 같고요.”
과자를 고른 서준이 봉투를 뜯었다. 깔끔하게 과자 봉지가 뜯어지자, 그 능숙한 솜씨에 윤성오가 박수를 쳤다.
“마음에 드는 내용이면 드라마도 출연한다는 거지?”
“네. 근데 왜 물어보세요?”
“지석이 형은 네가 드라마에는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과자를 씹어먹던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너랑 같이 또 촬영하고 싶은데 네가 영화만 찍으면 캐스팅이 겹칠 확률이 떨어지잖아. 그러니까 네가 드라마까지 출연하면 범위가 늘어나서 확률이 올라갈 거라고 했어.”
“그냥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나?”
분장을 끝내고 세트장에 들어서는 이지석을 보고 서준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경찰복을 입은 이지석이 서준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서준도 마주 흔들어주었다.
윤성오가 웃었다.
“형 마음대로 네가 싫어하는 영화에 억지로 출연시킬 수는 없잖아. 네가 출연하는 영화가 형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그냥 우연처럼 둘 다 좋은 영화를 골랐는데 그게 같은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거지.”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트장을 바라보면서 서준은 윤성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석이 형은 네가 마음에 안 드는 건 확실히 거절할 거라는 건 알아. 형도 마음에 안 들면 확실히 거절할 거고. 하지만 그런 거절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렇거든. 마음은 이해하는데 조금 서운한 거야. 그리고 결국 멀어지겠지. 지석이 형은 그게 싫은 거고.”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나도 지석이 형이랑 또 촬영하고 싶기는 한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쎄. 운에 맞기는 수밖에 없지. 우리 둘이 몰래 작당을 해도 지석이 형이 알게 되면 미안해할 거야. 자기 욕심 때문에 괜히 고생한다고.”
“지석이 형, 너무 복잡해요.”
“아하하하. 섬세한 거지.”
최 피디와 소 작가가 손짓을 했다. 이제 본 촬영에 들어간다. 서준을 드라마 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서 서준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이리 오라는 손짓에 서준과 잠시 잠깐 서준의 보호자가 된 윤성오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계속 쭉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 돼.”
윤성오가 말했다. 서준이 고개를 들어 윤성오를 보았다.
5년. 이지석의 옆에서 매니저로 지내온 윤성오는 이지석과 서준의 닮은 눈빛을 떠올렸다.
연기를 좋아하고 연기를 갈망하고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들의 눈빛이었다.
“지석이 형은 절대로 여기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10년이고 20년이고 늙어서도 연기를 계속할 거야. 너도 그렇지?”
“네. 오래오래 할 거예요.”
“그렇게 오래, 같은 곳에서 연기를 하다 보면 분명히 같은 작품에서 만날 때가 있을 거야. 이 좁은 세계에서 한 번은 만나지 않겠어?”
말을 하던 윤성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생각보다 좁은 세계였다.
“나중에 두 사람 다 ‘왜 또 같은 작품이야?!’ 하고 질려 할지도 모르겠다.”
“아하하하. 그러게요.”
윤성오의 말에 서준도 웃었다. 아역 배우가 맡은 역할이 적은 지금과는 달리 다 자라 성인역을 맡기 시작하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뭐야? 왜 웃어?”
촬영 전 마지막으로 대본을 확인하고 있던 이지석이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지만 둘 다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 * *
드라마 ‘재수사’ 카메오 촬영 날.
카메오 촬영을 위해 최민성 감독은 믿을 만한, 최소한의 스태프들만 데리고 촬영하기로 했다.
사람이 드문 골목길에 이지석과 함께 이서준이 등장하자, 그때까지도 몰랐던 스태프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솔직히, 같이 연극 봤다고 하길래 예상은 했는데……. 진짜였네요.”
조명감독이 카메라 감독에게 말했다. 카메라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할 것 없는 카메오 촬영에 비밀 유지를 원하는 최 감독과 실실 웃으며 대본을 쭉쭉 뽑아대는 소 작가. 그리고 그 아역 배우를 이지석이 데려왔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하기는 했다.
“진짜 이서준이네요.”
4월 말. 1달 반의 상영 끝에 쉐도우맨2가 1,000만을 넘기고 영화관에서 내려왔다.
한국인 배우가 출연해서 그런지 다른 마린사 영화보다 관객 수가 많았다.
“……쉐도우맨1도 천만 넘지 않았던가?”
쉐도우맨1 때는 ‘눈물 챌린지’와 ‘쉐도우맨 VS 그린윙’의 효과로 천만을 넘겼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흥행에 마린사에서는 한 번 더 대결 구도를 잡아볼까? 신중히 고민했다.
“와. 쟤 벌써 쌍천만 배우예요? 아니다. 쉐도우맨1은 엑스트라였으니까……. 아닌가?”
“쉐도우맨3 나오면 확실히 쌍천만이지. 그건 누가 예상해도 천만은 넘을 거야.”
주위에서 속닥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는 어때? 재밌어?”
분장을 마친 이지석의 물음에 서준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촬영 준비가 덜 끝나 조금 기다려야 했다.
“입학식 때는 거의 못 알아봤는데 쉐도우맨2 개봉하고 나니까 영화 봤던 사람들은 다 알아보는 것 같아요. 유치원 친구들은 괜찮은데 다른 친구들이나 다른 학년 형 누나들이 난리에요.”
“왜? 사인해 달래?”
“내 사인은 물론이고 쉐도우맨이랑 리첼 사인 받아 달래요.”
선생님들이 잘 막아주고 있긴 한데, 이러면 중학교는 예술중학교로 가야 되지 않나 싶었다.
하긴, 촬영 때문에 빠질 날이 많을 때는 예술중이나 예술고가 나을 수도 있지. 이민준과 서은혜도 깊은 고민에 잠겼다. 아직 6년이나 남았기에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서준의 말에 이지석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의 사인이라니.
“……그건 나도 받고 싶다.”
주위에 서서 할 일을 하는 척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요. 그런 거 한 번 해주면 다들 해달라고 그런대요. 내 사인은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들 사인은 못 해준다고 말하래요.”
“그건 그렇지. 누가 가르쳐 준 거야?”
“삼촌이요.”
“아. 삼촌이 코코아엔터 사장님이지. 그러고 보니, 서준이도 이제 소속사 찾아야 하지 않나? 코코아엔터는 배우가 없지? 형 소속사에 들어올래?”
휴대폰으로 스케줄을 살피던 윤성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오래간만에 좋은 제안 했습니다, 형! 당장에라도 가방에서 캐스팅용 소속사 홍보 책자를 꺼내 설명하려는 매니저의 기세에 이지석이 혀를 찼다.
그래도 자신의 소속사도 다른 곳에 비해 괜찮은 곳이었다.
“배우들도 많고, 나도 있고. 시설도 좋아.”
서준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절레절레 저었다.
“저 코코아엔터로 가기로 했어요. 지금 매니저 할 분 찾고 있대요.”
집에서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다. 물론,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인 엄마 아빠의 사인까지 완벽하게 끝냈다.
신나게 계약서를 받아간 서은찬은 제일 먼저 1층 벽에 서준의 사진을 걸었다. 그리고 서준의 매니저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 아쉽네.”
같은 소속사가 되나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이야기를 듣던 윤성오도 아쉬운 얼굴로 책자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지석 배우! 촬영 시작할게요.”
조연출의 부름에 이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이지석의 단독 촬영이 시작되었다. 서준의 촬영은 이다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