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7화
언제 앞니가 날까? 다른 유치가 빠질까? 매일 한 번씩 거울을 보는 서준에게 이지석의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지석이 형.”
-안녕, 서준아. 영화 잘 봤어! 엄청 잘하던데?
“에헤헤헤. 감사합니다. 형, 생일선물 고마워요.”
이지석은 서준의 입학&생일선물로 서준이 본 적 없는 오래된 영화들과 그 대본을 선물해 주었다. 엄마 아빠도 서준도 재미있게 보았다.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서준이는 요즘 뭐해?
“학교 끝나면 월수금은 태권도 학원가요. 화목토는 음악 학원 가고. 다음 달부터는 합기도 학원도 다닐 거예요. 여름 방학에는 수영 학원도 갈 거고요.”
폭신폭신한 소파에 앉은 서준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대답했다. 쑥쑥 느는 서준의 실력에 부부도 놀라워했고 서준도 재미있었다.
서준은 배우고 싶은 게 많았다. 시간과 여유만 되면 뭐든지 배울 수 있었다.
말을 타는 법도 배우고 싶은데 배울 수 있는 곳이 멀었다. 방학이 되면 배울 생각이었다.
그것 이외에도 검도도 배우고 싶었고 외국어도 배우고 싶었다. 엄마 아빠와 상의해서 너무 힘들지 않게 천천히 배울 생각이었다.
자신보다 바쁜 것 같은 초등학생의 일상에 이지석이 볼을 긁적이고 말았다.
-서준아. 카메오가 뭔지 알아?
“네. 알아요.”
-내가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인데, 괜찮으면 해볼래?
“어, 근데…….”
-왜? 바빠?
“아뇨, 그게…….”
서준이 머뭇거리자, 이지석은 카메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한 번 밥이나 먹자고 말했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석과 약속을 잡았다.
주말.
서준은 새로 산 외출용 가방에 김희상이 선물로 준 골렘 인형까지 달고 엄마와 함께 코코아엔터로 향했다.
이지석과의 약속 장소로 코코아엔터로 정했다.
이지석과 서준을 알아보고 몰려들 사람들이 있을 카페 같은 장소보다는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말이라서 출근하는 사람들도 적었다.
이제 사장이 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서은찬이 연락을 받고 1층으로 내려왔다.
“아하하하. 서준이, 앞니 빠졌네? 엄청 시원하게 빠졌어.”
서은찬이 서준을 반기다 홀랑 빠진 앞니를 보고 웃고 말았다. 그 웃음에 서준이 입술을 삐죽거리고 말았다.
“악!”
“애 그만 놀려!”
서은찬의 등을 세게 내려친 서은혜가 1층을 둘러본 후, 따가운 등에 손이 닿지 않아, 만질 수도 없어서 난리를 피우던 서은찬에게 물었다.
“다른 직원분들은?”
“꼭 필요한 사람들만 출근했어. 요새 브라운블랙 애들 재계약 때문에 일이 별로 없거든. 연습생들은 있는데, 지금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 중이야. 폐는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어. 이거, 직원분들 간식. 서준아, 그럼 나중에 데리러 올게. 연락하고.”
“응!”
서은혜가 떠나고, 1층을 둘러보던 서준이 감탄했다. 꼬질꼬질하던 예전의 건물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장이 바뀐 코코아엔터는 5층짜리 건물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서준이 서은찬에게 기꺼이 건넨 투자금 덕분이었다.
“삼촌. 회사 짱 크다.”
“옛날보다는 낫지? 아직 가수가 브라운블랙밖에 없어서 텅텅 빈 것 같긴 하지만,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서은찬은 서준의 손을 잡고 코코아엔터를 안내했다.
“전에 다른 기획사에서 쓰던 건물이라서 리모델링만 조금 했어. 지하에 연습실도 있었는데 좁고 낡아서 싹 바꾸고. 완전 새 연습실이라서 브라운블랙 애들도 종종 와서 연습해. 1층은 손님들 맞는 곳이야. 회의실이랑 휴게실도 있어. 이것저것 넣어두는 방도 있고.”
천천히 1층부터 5층까지 둘러보았다. 5층에는 서은찬이 쓰는 사장실이 있었는데, 한쪽 벽에 브라운블랙의 사진과 서준의 사진이 있었다. 브라운블랙의 소속사가 코코아엔터니 형들 사진이 있는 이유는 알겠다. 근데,
“왜 내 사진이 여기 있어?”
‘천사’ 사진이라면 이해했다. 다들 부적처럼 휴대폰 갤러리나 조그맣게 들고 다닌다는 후기도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 붙은 사진은 서준이 악령에 나올 때, 스틸컷을 찍어주던 사진사가 찍은 사진이었다.
세차게 바람에 새빨간 무복이 넓게 펴지고 진지한 표정의 서준이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배경에 서준의 눈에만 보이는 노란빛 도깨비 기운이 찍혀 있었다. CG로 그 기운을 그대로 표현한다면, 악령의 포스터로 써도 될 만큼 멋진 사진이었다.
“아하하하. 이게 왜 여기 있지?”
서은찬이 얼른 사진 앞에 서서 사진을 가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서준이 코코아엔터에 들어오면 1층 벽에 붙여놓으려고 했던 사진이었다. 쉐도우맨2에 나오는 진 나트라의 사진도 걸 생각이었는데.
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은찬을 바라보았다. 서은찬이 얼른 서준의 몸을 돌려세워 사장실을 나왔다.
‘조금씩 조금씩 꼬시려고 했는데, 텄어!’
아니, 투자금까지 줬으니 반은 코코아엔터 소속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말할 서은혜였다. 그 엄마에 그 아들이라고 서준이도 그럴 것 같고. 서은찬이 한숨을 쉬었다.
“자자, 약속 시각 다 되지 않았어? 1층 회의실로 가자!”
“수상해. 삼촌.”
조카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은찬은 얼른 엘리베이터에 서준을 태우고 1층으로 내려갔다.
대충 예상은 간다.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나도 뭐, 다른 소속사는 낯설기도 하고. 근데 코코아엔터는 배우가 없어서 말이지.
엄마 아빠하고도 의논 중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는 코코아엔터냐, 배우를 케어한 경험이 있는 다른 소속사냐. 이지석이 소속된 회사도 리스트에 올랐었다.
가족회의 끝에, 지금은 아직 아이이니,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이 낫지 않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서은혜도 있고 투자금도 있으니, 아무 일이나 시키지는 않겠지. 이민준의 의견이었다. 서은혜도 그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서준도 동의했다.
‘삼촌이 엄마를 엄청 무서워하니까.’
이제 외할머니한테도 꼬박꼬박 연락하고 집에도 잘 들어간단다.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서은찬은 서준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은 서준에게 휴게실에서 가져온 오렌지 주스도 한 잔 주고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서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소속사는 결정 났어?”
“음.”
엄마 아빠가 삼촌에게 말해도 된다고 했으니, 말해야겠다. 서준이 입을 열었다.
“응!”
“……진짜?! 어디?”
“코코아엔터.”
“……와!”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서은찬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만세! 전부터 노리고 있던 대어가 드디어 손에 들어왔다.
탑 아이돌 브라운블랙과 슈퍼스타 이서준만 있어도 어디 가도 자랑할 만한 소속사가 아닌가!
“근데.”
서준의 입이 열리자, 환호성을 지르고 있던 서은찬이 멈추었다. 서준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삼촌 회사에 있는 건 내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야. 그 이후에는 날 가장 잘 케어해 주는 소속사로 갈 거야.”
서준이가 고등학생.
생각에 잠겼던 서은찬이 입을 열었다.
“……우리 케어가 마음에 들면?”
“그러면 계속 삼촌이랑 일하겠지.”
솔직히 그런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게 엄마 아빠의 의견이었다.
배우를 처음 맡는다고 해도 지금부터 서로 조금씩 맞춰가도 9년이나 남았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어떤 신생 소속사라도 서준을 완벽히 케어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서류를 넣고 영업해야 하는 무명의 아역 배우도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여기저기서 시나리오와 시놉시스가 들어오는 이서준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일이 들어온다는 점이, 방심하는 이유가 되겠지.”
서은찬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소속사들이 탈락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미 잡은 물고기라는 생각으로 설렁설렁 일하면, 서준에게든 소속사에게든 독이 될 터였다.
게다가 소속된 배우의 의견과는 달리 배우의 이름으로 종종 사고를 치는 소속사도 있지 않은가?
서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회의실 구석에 있던 A4용지와 펜을 가지고 와 서준의 앞에 앉았다. 찬이 삼촌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에 서준도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또 다른 조건은?”
“코코아엔터에서 제안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할 거야.”
“좋아.”
“새로운 신인 배우가 들어와도 끼워 팔기는 안 돼.”
“끼워 팔……. 누나가 그랬어?”
“아니. 지석이 형이 가르쳐 줬어.”
이미 브라운블랙과 이지석은 물론이고 한국, 미국 연예계의 아는 사람들에게 모두 조언을 구했다.
성인까지 할까? 고민하던 가족에게 중학생까지라는 시간제한을 제안한 것도 그들의 의견이었다. 고등학생부터 맡을 만한 역할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때부터 확실히 소속사의 케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펜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던 서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석 배우라. 이지석 말고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조언했을 터였다. 서준이의 인맥을 떠올려보던 서은찬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알았어. 끼워 팔기는 안 되고, 다음?”
“해외 영화 계약은 따로 해야 해.”
“좋아. 거긴 생각도 안 했어.”
마린사라니, 할리우드 진출이라니. 생각도 안 했다. 서준이 조곤조곤 엄마 아빠와 결정한 사항을 서은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돈보다는 서준의 의견을 중시한 내용이 많았다.
한 해에 몇 작품을 하든, 서준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몇 년을 쉬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언제 서준이 다른 것을 하고 싶어 할지 모르니, 엄마 아빠는 하나부터 열까지 서준을 위한 조건들을 제시했다.
“재계약은 중학교 졸업하고.”
“응. 이제 더 없어?”
“이야기할 건 다 이야기한 것 같아.”
“그럼 이걸로 계약서 써서 집에 가져갈게. 그때 누나랑 매형이랑 같이 이야기하자.”
“응!”
“아 참. 약속 시각은?”
생각도 못 한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서준과 서은찬이 회의실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다행히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시간도 남았겠다, 그동안 들어온 시나리오 볼래?”
“또 들어왔어?”
“시나리오랑 시놉시스는 많지. 제작하는 게 별로 없어서 그렇지. 요새는 웹 드라마 때문에 더 양이 늘어난 것 같아.”
“응. 읽어볼래!”
“이번에는 서준이 마음에 든 게 있었으면 좋겠네. 근데 앞니가 그래서 마음에 들어도 못하는 거 아니야?”
“삼촌!”
“아하하하.”
이지석이 매니저 윤성오와 함께 코코아엔터로 찾아왔다.
“사진이랑 완전히 다른데?”
사장이 바뀌고 몇 달 만에 코코아엔터가 완전히 바뀌었다. 뉴스나 인터넷 기사에 떴던 낡은 전 건물과는 확실히 달랐다.
“사장도 바뀌고 투자금도 들어와서 싹 바뀌었대요. 직원도 더 뽑고.”
사무실도 넓고 깨끗했다. 새로운 직원들도 채용하고 실력 좋고 매력 있는 연습생들도 뽑았다.
저기서 이지석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연습생들이 몇 달 후 데뷔할 그룹이라고 안내하던 직원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이지석이 손을 흔들자, 과자를 사러 편의점에 가려다가 놀란 연습생들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참새떼처럼 연습실로 사라졌다.
직원의 안내로 이지석과 매니저 윤성오가 1층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삼촌이 준 시나리오들을 뒤적거리던 서준이 두 사람을 반겼다. 딱 약속 시각에 맞춰서 왔다.
“지석이 형! 성오 형! 안녕하세요!”
“푸핫. 이래서 머뭇거렸구나.”
이지석이 서준의 앞니 빠진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귀엽고 카리스마 넘치고 멋진 모습을 보다 보니까 이런 평범한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도 한데, 서준은 아주 개구쟁이 아이처럼 찰떡같이 어울렸다. 윤성오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서준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벌써 두 번째였다.
“발음도 새요.”
“전화로는 잘 모르겠던데?”
“바람이 자꾸 이쪽으로 빠져요. 나중에는 이거랑 이것도 빠진대요. 진짜! 영구치 나올 때까지는 진지한 연기 못할 것 같아요.”
“그건 그렇겠다.”
이지석이 실실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윤성오 매니저도 옆에 앉았다.
이지석은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서준에게 건넸다.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대본들과 시놉시스였다.
“이게 대본이에요?”
“그래. 어때?”
[재수사]
제목부터 나 형사물이요! 하는 느낌이 들었다.
서준은 대본을 팔랑팔랑 넘겨보았다. 후반쯤에 이지석이 해둔 듯, 형광펜과 포스트잇으로 표시된 곳이 있었다. 석 줄 정도의 대사였다.
“진짜 드라마 내용이랑 상관없는 지나가는 역할이야.”
“근데 이런 상태인데 괜찮아요?”
이젠 체념한 서준이 이- 하며 텅 비어버린 앞니를 이지석에게 보여주었다. 이지석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더 잘 어울리는걸.”
“무슨 역할인데요?”
“뺑소니차 번호 가르쳐 주는 초등학생 역할.”
“그거 정말.”
이지석의 말을 들은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잘 어울리네요.”
“어때? 할래?”
“어떤 드라마인지 읽어보고요.”
“철저하긴.”
서준이 이지석에게서 받은 대본들과 시놉시스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방 지퍼에 달린 골렘 인형이 달랑거렸다.
이지석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먹으러 가자.”
“네!”
“이 근처에 맛있는 가게 있어?”
“저 앞에 만두 맛있는 가게 있어요. 냉면도 팔아요!”
이지석은 악령 촬영 때 둘이서 만두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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