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0화 (5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0화

“난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저 정도로 푹 빠져서 연기하는데?”

리첼 힐은 화면을 보았다. 붉고 펄럭거리는 옷을 입은 아이가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저런 일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능숙해 보였다.

에반 블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이언 감독이 멜리사 월튼에게 다음 역할은 되도록 다른 역을 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잖아.”

“그랬지.”

1년 전, 할리우드의 관계자들은 멜리사 월튼에 집중했다.

그녀의 처절한 눈물에 영감을 얻은 감독들이 비슷한 배역으로 멜리사 월튼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유쾌한 로맨스코미디 영화를 찍었다.

엄청난 흥행은 하지 않았지만, 멜리사 월튼의 새로운 매력을 볼 수 있는 영화였다는 평이 많았다.

“그때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로는, 멜리사 월튼은 촬영이 끝나도 울면서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서준 리는 아니었다고 했어. 엄마를 잃은 아이는 없고 오렌지 주스를 맛있게 먹는 아이가 거기 있었다고. 그 모습에서 라이언 감독님도 알아차린 거지.”

“……뭘?”

“비슷한 메소드 연기를 했다고 해도, 멜리사 월튼은 같은 역할을 맡으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거고, 서준 리는 다르다는 걸.”

에반 블록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리첼 힐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이 아인 특별해’. 그건 재능이야. 배역에 완벽하게 빠져들고 완벽하게 빠져나와. 그 정도로 배우에 적합한 재능이 어디 있겠어?”

에반 블록이 히죽히죽 웃으며 노트를 펼쳤다. 서준 리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리첼 힐은 에반 블록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어서 만났으면 좋겠다.”

“……리,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

* * *

저녁 모임의 장소는 라이언 윌 감독의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의 개인실이었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몇 블록 떨어져 있는 호텔에 머무는 서준과 이민준도 곧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서준 리입니다!”

“안녕! 리. 나는 리첼 힐이야.”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난 리첼이라고 불러줘.”

서준은 리첼 힐이 반갑게 악수를 하고 에반 블록과도 악수를 하였다.

“안녕? 네가 서준 리구나? 나는 에반 블록이라고 해. 에반이라고 불러.”

“네. 에반! 잘 부탁해요! 전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라이언 윌 감독은 서준의 옆에 있던 이민준을 소개해 주었다.

“반갑습니다. 쉐도우맨과 맥 역을 맡은 에반 블록입니다.”

“안녕하세요. 잠시지만 준의 누나가 될 리첼 힐입니다.”

“반갑습니다. 우리 준. 잘 부탁합니다.”

에반이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부탁해야 하는 건 저 같은데요. 영화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그런 연기라면 내가 묻힐지도 모르겠는걸?”

악령을 보았던 에반 블록은 긴장감에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종이컵을 구겨버리고 말았다. 다 마셔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쉐도우맨이요?”

“아니, 악령. 음. 이렇게 발음하는 게 맞아? 영어로 제목을 바꿨던데 난 영화는 번역한 제목보다 원제목을 더 좋아하거든.”

에반 블록이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몸을 낮추었다. 에반 블록을 따라서 시선이 내려오니 서준의 고개가 편안해졌다.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악령을 본 사람이 있다니 기쁘고 신기했다.

“네. 완벽해요.”

“그래. 고마워. 근데 연기할 때 무슨 생각 하면서 해? 철저히 계획을 세워서 연기하는 편? 아니면 감으로 연기하는 편? 윌리엄 촬영 때, 앉았다가 일어나던 액션은 네 생각이라던데 사실이야?”

“어…….”

에반 블록이 다다다 질문을 쏟아냈다. 서준은 멍하니 에반 블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첼 힐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고 라이언 윌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민준은 그제야 에반 블록에 대해 인터넷에 떠돌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분석가.

에반 블록의 연기는 자세한 캐릭터 분석과 철저한 계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손 떨림이나 얼굴 근육의 떨림까지도 계획하고 연기했다.

그 철저함에 함께 촬영했던 감독과 배우들마저 감탄한다고 했다. 그렇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자, 자. 일단 밥부터 먹자고. 나 배고파! 아, 두 분도 얼른 앉으세요. 준도 다리 아프지? 얼른 앉아.”

리첼 힐이 에반 블록의 등을 밀었다. 끝까지 대답을 들을 것 같았던 에반 블록도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자 웨이터를 호출하는 라이언 감독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쉰 리첼이 서준을 보며 웃었다.

“준. 영화에서 본 것보다 키가 큰 것 같은데?”

의자에 앉은 서준이 등을 바로 펴고 방긋 웃으며 자랑하듯 말했다.

“1년 사이에 10㎝나 컸어요!”

모두 [슬라임의 소화 능력]덕분이었다. 넘치도록 많은 영양분을 시기적절하게 몸 구석구석으로 보내주는 아주 귀한 능력이었다.

유치원에서도 가장 키가 컸다. 아마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반에서 가장 크지 않을까? 하고 가족들 모두 이야기했다.

담당 웨이터가 미리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왔다. 별생각 없이 매일 담당하던 개인실의 문을 열었던 웨이터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숨겨진 마린빠인 웨이터는 프로답게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내려놓으면서 오! 오! 속으로 감탄만 했다.

‘에반 블록에! 키가 많이 크긴 하지만 동양인 아이라면, 서준 리! 게다가 리첼 힐에 라이언 윌 감독까지! 여기가 쉐도우맨2의……!’

당장에라도 카메라를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꾸욱 참고 모든 일을 마친 후 개인실의 문을 닫았다. 식사가 끝나면 사인받아도 되려나.

조금 배를 채우고 난 후에 다섯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에반 블록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

스테이크를 냠냠 씹고 있던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얼른 입안에 있는 고기를 씹어 넘기고 대답했다.

“불쌍하다?”

“네가 윌리엄 같지는 않고?”

그 말에 라이언과 리첼의 시선이 서준에게로 향했다.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리? 윌리엄은 영화에 나오는 애고 난 이서준인데? 서준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전 이서준, 서준 리인 걸요.”

“이것 봐. 특별하다니까.”

마음에 드는 대답인지 에반이 웃었다. 리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민준이 고개를 갸웃하자 리첼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군요. 메소드라…….”

연기하는 방법이나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지만 메소드 연기라면 알고 있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에게 자주 붙는 수식어였지만 배역에 몰입하던 배우가 현실과 혼동했다는 에피소드도 종종 있었다.

“준의 연기는 알고 계시는 메소드와는 완벽하게 다릅니다.”

에반 블록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 윌 감독이 말을 이었다.

“준은 배역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옵니다. 현실까지 배역의 감정과 생각을 질질 끌고 오는 단점이 있는 메소드 연기와는 완전히 다르죠. 진짜로 준이 메소드 연기를 했다면 그때, 그 상황에서 자신을 잃고 한동안 윌리엄으로 지냈을 겁니다.”

설마, 그 어렸던 꼬마가 그런 연기를 할 줄을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서준 본인조차도 그렇게까지 빠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서준이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라이언 윌은 그 자리에서 아이의 보호자에게 절대로 연기를 시키지 말라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서준 리는 달랐다. 잘했다고 머리를 토닥여 주니, 칭찬을 받아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준으로 돌아왔죠.”

고작 5살 아이가, 그렇게 멋진 연기를 펼치고 활짝 웃고 있는 서준을 보며, 라이언 윌은 소름이 돋았었다.

“준의 연기는 메소드 연기와 비슷하지만 메소드 연기가 아닙니다. 8개월의 긴 연습 시간 동안 확실히 알았죠. 저 정도로 배역에 빠졌다가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는 준이 유일할 겁니다.”

라이언 윌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많은 모습을 보진 않았지만 서준은 몰입도가 다른 배우들과 달랐다.

그래서 8개월의 연습 기간 동안 라이언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첫 악역 연기에 영향을 받아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 때, 멈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라이언의 걱정과는 달리 서준은 평소와 같았다. 착해 보였다.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완벽하게 해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첼 힐이 서준에게 물었다.

“준은 어떻게 생각해?”

“음.”

서준은 곰곰이 생각했다. 다들 입을 다물고 서준의 입에 집중했다.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기우뚱기우뚱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난 메소드 연기 아닌 것 같아요.”

“어째서?”

되물은 에반 블록이 가지고 왔던 노트를 펼쳤다. 질색한 표정의 리첼 힐이 앉아 있던 의자를 옆으로 조금 옮겼다.

“여기서 말하는 메소드 연기라는 건 현실에까지 영향을 주는 거고, 그래서 아빠가 걱정하는 거잖아요. 내가 맡은 배역이 현실에도 영향을 줄까? 안 줄까? 하고.”

“그렇지.”

“근데 윌리엄 했을 때도 평범했고 악령 했을 때도 괜찮았고 8개월간 세상을 원망하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하면서도 나는 계속 나였어요.”

촬영할 때는 분명히 배역에 몰입한다. 몰입하지 않는 배우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촬영이 끝나면 여전히 몬스터 인형을 좋아하는 이서준이다. 가방에 달린 슬라임 인형을 봐라. 나는 나였다.

“그러니까 메소드 연기가 아니에요. 그냥 내가 연기를 잘하는 거죠.”

서준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엉뚱한 대답에 모두 웃고 말았다.

“그럼 어떻게 연기를 하지?”

에반 블록이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서준이 대답했다.

“대사나 지시문을 보고 이 캐릭터는 이런 과거 때문에 이런 성격이니까, 이렇게 행동해야겠다 하고 생각해요. 촬영을 시작하면 더 좋은 생각이 날 때도 있어요.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죠. 윌리엄 때 했던 연기도 그랬어요.”

“확실히 메소드 연기랑 비슷하기는 하네.”

“하지만 아니에요. 전 멀쩡한 걸요.”

어쩌면.

서준은 생각했다.

메소드 연기는 이 ‘몸’에 있는 능력이 아닐까?

다른 삶들의 능력처럼 다음 생에 태어나면 사용할 수 있는 스킬.

그리고 ‘정신’은 생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라서 배역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평범한 메소드 연기와는 다른 게 아닐까?

평범한 메소드 연기의 재능이, 특별한 자신과 만났다.

‘만약 이 능력을 구슬로 만들 수 있다면, 이렇게 뜨겠지.’

[(선? 악?)이서준의 특별한 메소드 연기]

촬영 시, 실제 배역이 된 것처럼 몰입감을 줍니다.

자신의 의지로 배역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등급은 어떨까? 속으로 웃던 서준이 에반 블록에게 물었다.

“에반은 어떻게 연기해요?”

“난 철저히 계산하지. 예를 들면 맥은 고아지. 고아지만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아. 어째서 많을까? 밝고 유쾌한 성격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 맥의 행동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시선의 방향, 발 위치까지도 생각해. 아는 사람 중에 맥과 비슷한 성격이 있으면 그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사소한 버릇이라도 촬영에 도움이 될 때가 있거든. 그래서 내 친구들은 내가 영화 대본 받으면 엄청 싫어해. 내가 나온 영화를 보면 그 안에 자신이 있을 때가 있다면서 말이야.”

“대단하네요.”

에반의 말에 서준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 식으로 연기할 수도 있구나. 두 배우는 열심히 자신의 연기 방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첼 힐도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메소드 연기라고 하면 오히려 에반 블록이 위험하겠죠. 저렇게 철저히 준비하다가, 결국 모자람을 느낄 때가 올 겁니다.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결국 현실에까지 영향을 줄 겁니다.”

“그렇군요.”

“준은 그냥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똑똑한 아이입니다.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부모는 걱정하게 마련이죠.”

두 배우와 신나게 웃으며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있는 아들을 보며 이민준이 웃었다.

* * *

“와. 여기 영화 촬영하나 봐.”

“그러게. 무슨 영화지?”

센트럴파크 내부를 구경하고 다니던 관광객들이 고개를 빼 들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보았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중심에 있는 공원, 센트럴 파크는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소 중의 하나였다.

영화 촬영에 익숙해진 현지인들은 별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되돌렸다.

“에반 블록?! 쉐도우맨2 찍나 봐!”

센트럴파크 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 앞, 셔먼 러닝트랙에 쉐도우맨2의 촬영 스태프들이 모여 있었다.

스태프들은 촬영 대기 중에 햇빛을 막아줄 천막도 몇 개 설치하고 조명같이 큰 촬영 기기도 설치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설치된 대기 천막에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본을 보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여러 나라에서 뉴욕으로 놀러 온 관광객들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줄여 대화를 나누었다.

“에반 블록이랑 윌리엄인가.”

“윌리엄 엄청 컸는데?”

“쉐도우맨 촬영 때가 1년 전인데, 진짜 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크네.”

“와. 그때 진짜 가슴 아팠는데, 쉐도우맨2에 어떻게 나올지 기대된다.”

누군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천막으로 달려왔다. 곧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촬영 시작하나 봐.”

쉐도우맨 2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