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8화
라이언 윌 감독이 한국에 왔다. 서준이 영상을 보내고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라이언 윌의 짐은 대본 몇 개와 지갑이 다였다.
그리고 서준과 라이언 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라이언 윌은 인사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준을 살폈다.
라이언 감독의 눈동자가 마치 처음 볼 때처럼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심각한 표정으로 서준을 살폈다.
서준은 그 진중한 표정에 웃음을 참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뽐내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이 보낸 영상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참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라이언 윌 감독이 입을 열었다.
“평범해졌군.”
“네?”
그건 상상도 하지 못한 평가였다. 안 좋은 건가?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에는 웃고만 있어도 착한 것 같은 분위기가 폴폴 풍겼는데.”
라이언 윌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서준의 고개가 라이언 윌을 따라 움직였다.
“아무 느낌도 안 드는군. 평범해.”
“좋은 거예요?”
“일단.”
서준의 물음에 라이언 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탕에 아무것도 없어야 새하얗게 칠하든 새까맣게 칠하든 하겠지. 잘됐군.”
그리고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라이언 윌은 마른세수를 했다.
“어떻게 한 거지?”
얼굴에서 두 손을 내린 라이언 윌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영상까지만 해도,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최악이었다.”
“미안하다면서 왜 말해요?”
서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진심으로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라이언 윌 감독의 눈빛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의 몸짓이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그건 과거니까. 이제는…….”
라이언 윌이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최고니까.”
갑자기 들어온 칭찬에 서준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칭찬해 줄 것 같긴 했지만 대놓고 최고라고 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곧 칭찬을 들었다는 게 기뻐서 서준은 이히히 웃고 말았다.
“그죠? 엄청 잘했죠?”
“그래. 그래서 수정본은 다 불태우고 왔다.”
“수정본요?”
밤늦게 일어난 수정본 화형식에 놀라 뛰쳐나온 조나단의 모습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제쳐놓은 라이언 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촬영 전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널 최대한 적게 등장시키려고 했다.”
그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았나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도 잠시, 이내 라이언 윌의 마음을 이해한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7개월, 아니, 8개월간의 연습 영상을 보면 자신이 감독이라도 그렇게 했을 터였다.
그건 정말,
최악이었으니까.
착한 분위기를 폴폴 풍기며 악당 같은 대사를 하는 아이는 정말 어색하고 이상했다. 되지도 않는 흉내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억지로 그런 말을 하게 시켰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준이 몸서리를 치고 말했다.
“원래 대본대로 출연해 봤자 사람들은 제 연기에서 어색함만 느끼겠네요.”
라이언 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라이언 윌은 영상을 보자마자 첫 대본을 꺼냈다.
영상 속 서늘한 아이와 윌리엄을 비교해 보니, 더할 나위 없이 기대되었다. 참을 수가 없어서 한국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지.”
“이히히히.”
두 사람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심각한 분위기를 날려 버렸다. 라이언 윌이 눈을 빛냈다.
“그럼 직접 한번 보고 싶은데, 괜찮나?”
“네!”
서준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오른손을 꾹 쥐었다.
[(악)홀로 핀 꽃의 우울한 향기-최하급-이 발동됩니다.]
[(악)홀로 핀 꽃의 우울한 향기-최하급]
반경 10m에 오직 이 꽃만이 피어 있습니다.
잡초와 비슷하게 생겨 누구도 그게 꽃이란 사실을 모릅니다.
꽃의 향기를 맡으면 우울한 기분을 듭니다.
거기에,
라이언 윌 감독의 눈앞에, 학대받아 세상을 원망하는 아이가 있었다.
라이언 윌 감독은 서준의 연기에 만족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한국에 온 지 10시간도 안 지는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려는 라이언 윌에게, 좀 쉬다가 돌아가라고 말하려고 했던 부부는 살벌하게 빛나는 라이언 윌의 눈동자에 입을 다물었다.
직접 본 서준의 연기는 영상과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얼른 돌아가 대본을 다시 뜯어고치고 싶은 마음에 라이언 윌은 1시간도 쉬지 않고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라이언 윌이 떠나고 서준은 엄마 아빠에게 한참을 자랑했다. 서준의 연기를 봤던 부부도 어쩜 그렇게 잘하느냐며 칭찬했다. 서준은 아주 만족하면서 잠이 들었다.
얼른 악 성향의 도서관에 가서 문이 열린 두 개의 도서관 책을 열심히 읽을 생각에 신이 났다.
아직 마기가 부족한지, 시간이 부족한지 두 개밖에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곧 선 성향의 도서관과 같은 수의 문이 열리게 될 것 같았다.
“거기도 얼른 열렸으면 좋겠다! 어떤 책이 있을까!”
침울했던 8개월과는 달리 히히 웃으면서 잠이 든 아들을 보던 부부도 행복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주말이라 서은혜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고 오늘은 이민준이 서준과 함께 지내게 됐다. 아빠가 차린 맛 난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던 서준이 문뜩 거울을 보았다.
어라?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항상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숟다가 업서!?”
서준이 우에엑 치약 거품을 뱉어냈다. 그리고 얼른 물로 입을 헹구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숫자가 없었다.
“아빠! 형들한테 전화 좀 해줘! 영상통화!”
“뭐?”
“형들한테 전화!”
이민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서준이 말하는 형들은 브라운블랙밖에 없었다.
브라운블랙은 연습이나 스케줄로 바쁠 테니, 한가해 보이는 코코아엔터의 사장이 된 서은찬에게 연락을 걸었다.
마침 브라운블랙과 함께 있던 서은찬이 전화를 받고 브라운블랙들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헉! 없어!”
-뭐? 뭐가 없어?
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라운블랙의 머리 위에 떠 있어야 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하급]의 유대감을 표시한 숫자가 없었다.
순간 서준의 머릿속에 뎅그렁! 하고 떨어지던 구슬들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 떨어져서 초기화가 되어버렸나!? 너무 쉽게 초기화되는 거 아니야?!
잠깐.
구슬 떨어지고 얼마나 지났지. 서준이 자신을 부르는 브라운블랙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하나 세며 생각에 빠졌다.
도서관 문 열고, 잠에서 깨서 영상 보내고, 그다음 날 라이언이 오고, 다시 아침이니까.
이제 삼 일!
삼 일이면 괜찮다. 브라운블랙은 코코아엔터 전 사장의 일로 지금 휴식기라고 찬이 삼촌에게 들었다.
물론 휴식기라고는 해도 다음 앨범을 만들 준비를 하느라 노래를 불렀겠지만 그래도 삼 일.
겨우 삼 일 지났을 뿐이었다.
서준이 급히 물었다.
“형들. 어제 연습 어땠어?”
-연습? 평소랑 똑같았는데?
“아니, 좀 더. 뭐랄까. 호흡이 안 맞는다든지 실력이 떨어졌다든지.”
브라운블랙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무대 이후로는 완전 호흡 잘 맞는데?
서준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안 된다. 저 형들이 스킬의 효과를 알 리가 없어. 어쩌지?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서준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형들 오늘 뭐 해?”
-팬미팅 있어. 올해 들어서 조금 뒤숭숭했잖아. 서준이도 올래?
“팬미팅 하면 무대도 하지? 팬들 많이 와?”
-이번에 다들 맘고생 많이 했으니까 최대한 많이 초대했어. 무대야 당연히 하지. 우리 별명이 라이브돌인 걸.
박서진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갈게. 팬미팅 몇 시에 시작해?”
-음. 한 시인데, 지금 오면 조금 늦겠다. 6시 타임도 있는데 그때 올래?
“아니! 지금 갈래! 아빠! 가자!”
이민준이 화들짝 놀라 서준을 보았다. ‘지금 가도 늦을 것 같은데 6시는 어때……’라고 말하려던 이민준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휴대폰과 지갑,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불타는 아들의 눈빛이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은찬에게서 문자로 장소가 날아왔다. 멀다. 30분은 넘을 것 같았지만, 아빠는 아들을 위해 힘을 내기로 했다. 서은혜에게는 간단히 문자를 보냈다.
“빨리! 아빠! 빨리!”
서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민준은 서준의 재촉에도 아들의 안전을 위해 제한속도를 지키며 운전했다.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곧 팬미팅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준아! 매형!”
팬미팅장 밖에 서은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황당한 얼굴로 서준을 보고 있었다.
서은찬은 두 사람을 팬미팅장 안으로 안내했다. 지나가던 직원들과 무대 제작회사 직원들이 사장, 서은찬을 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삼촌! 벌써 시작했어?”
“시작이야 벌써 했지. 애들 지금 무대 위에 있어.”
서준이 입을 벌렸다. 안 되는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서준에게 서은찬의 목소리가 한 줄기 빛처럼 들려왔다.
“1부 끝나면 무대 뒤에서 만나면 되지.”
“1부에선 노래 안 불러?”
“팬미팅 시작할 때 이미 불렀고, 팬들이랑 이야기 좀 하다가 마지막에 다른 노래를 부를 예정이야. 2부 때 무대가 더 많지.”
서준이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두 번 정도는 못 불러도 2부에서 만회하면 되겠다. 라이브돌 명성에 금이 가서는 안 되지! 너무 걱정했는지 진이 빠졌다.
발만 동동 구르며 재촉하던 서준이 갑자기 진정한 것처럼 보이자 서은찬과 이민준이 눈을 마주쳤다. 얘, 왜 이래요? 나도 몰라. 이민준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볼을 몇 번 긁적이던 서은찬이 입을 열었다.
“저쪽에 가면 형들 팬미팅 하는 거 볼 수 있는데 갈래?”
“응!”
“그래. 조용히 봐야 한다?”
“응.”
서준은 서은찬의 손을 잡고 자리로 향했다.
팬들이 앉아 있는 관객석과 가까운 자리였는데 다들 무대 위에 있는 브라운블랙에게 푹 빠졌는지 서준과 서은찬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대 위에 있던 최시윤이 홀로 알아차리고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냈다. 서준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서은혜에게 전화로 사정을 이야기한 이민준도 서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브라운블랙은 무대 위에서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팬미팅을 구경했다.
팬들이 미리 써놓은 쪽지를 읽는 차례였는데, 유난히 겹치는 내용이 있었다. 황예준이 마이크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똑같네요. ‘서은찬 사장님, 우리 브라운블랙 잘 부탁합니다! 딱 매니저 때처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은찬이 형이 벌써 이만큼이나 쪽지를 받았어요.”
황예준이 테이블 위에 쪽지를 올려놓았다. 제법 쌓인 쪽지들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저희도 은찬이 형이 사장님이 돼서 정말 좋아요. 저희가 원하는 걸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앞으로도 쭉 변하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박서진의 말에 팬들이 열심히 박수를 쳤다. 팬들 사이에서도 험악하게 생겼지만 친절한 서은찬이 믿음직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변해갈 코코아엔터의 행보에 모두 행운만 따르길 빌었다.
“삼촌, 멋져!”
“으흐흐흐.”
조카의 칭찬에 서은찬이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해보는 사장이지만 많은 사람이 지지해 주니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팬미팅 1부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1부의 끝을 알리는 브라운블랙의 무대가 준비에 들어갔다.
다시 초조해진 서준이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형들이 잘하기는 하는데, 능력도 없이 이때까지 많은 무대를 본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이 되었다.
두두둥!
음악이 흘렀다. 하하 호호 단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던 모습은 던져 버리고 진지한 얼굴로 무대에 선 브라운블랙을 본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