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6화
라이언 윌 감독과 조나단은 일주일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라이언 윌이 쓴 일인극은 첫 번째 줄부터 막혀 있었다.
라이언 윌과 서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장 잘된 것 같은 녹화 영상을 보며 영상통화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사이 유럽 여행을 떠났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무사히 돌아왔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서준에게 세 사람은 각자 찢어진 반딧불이 부적 종이를 내밀었다.
“이걸 어쩌나? 서준이가 준 부적이 찢어져 버렸어.”
“할아버지 것도. 나중에 또 그려줘야 해?”
“네!”
섬세하게 그려진 반딧불이 그림이 이리저리 찢어져 있었다. 세 사람이 손주에게서 받은 선물을 찢어버릴 리가 없으니.
‘이거 발동됐구나!’
서준은 깜짝 놀라 할머니 할아버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살폈다. 반가워서 그런다고 생각한 어른들은 웃었다.
서준의 집으로 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즐겁게 유럽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교통사고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숙소에 물건을 놔두고 왔다는 것을 깨닫고 가이드와 같이 숙소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 때문에 패키지 여행 버스는 10분쯤 늦게 출발했다.
“10대나 충돌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다들 할멈 때문에 늦었다고 얼마나 타박을 하는지. 근데 그 사고 보고 기사랑 가이드가 ‘제시간에 출발했으면 우리도 저기 있었겠네요’라고 말하니까, 다들 입을 꾹 다물더라고!”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충돌 사고에 관광버스가 끼었으면 큰 사고가 됐을 수도 있었다. 부부와 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해가 되고 설날이 지나고, 생일 선물을 한가득 받은 서준은 한 살, 나이를 먹었다.
이제 6살. 한국 나이로는 7살!
그리고.
새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
열려 있던 2개의 도서관의 책 전부를 3번이나 읽은 서준은 가느다란 지푸라기를 잡고 매일 밤 도서관 앞에서 이 문만 두드려댔다.
언제 열리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열렸다.
서준은 눈을 반짝이며 새롭게 열린 도서관의 문을 있는 힘껏 열었다.
“오늘따라 서준이가 기운이 없네요?”
“아침부터 저래.”
오랜만에 서은혜의 집에 들른 서은찬이 이민준에게 물었다.
서은찬은 그동안 자금 횡령 등의 범죄로 수갑을 찬 사장을 대신해 코코아엔터를 인수하고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코아엔터 인수에 자금을 보태준 서준과 누나, 매형에게 진행 상황을 알려주려고 왔는데, 항상 팔팔하던 조카가 이상했다.
서준은 힘이 쭉 빠진 슬라임처럼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왜 그래?”
“……없어.”
“없어? 뭐가?”
“나쁜 게 없어.”
서은찬은 이해할 수 없는 서준의 말에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다 이민준을 보았다. 이민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부엌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12월 말에 라이언 감독님이 오셨거든.”
이민준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직도 일인극을 연습하고 매주 라이언 윌 감독과 영상통화를 한다는 말에 서은찬이 질린 눈빛으로 소파 위에 축 늘어진, 다섯 살짜리 꼬맹이를 보았다.
연기하는 걸 엄청 좋아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 나이 때는 돌아서면 흥미가 떨어지는 나이가 아닌가.
“지금 7월인데?”
벌써 여름 햇살이 따갑고, 태풍이 올라오는 7월 초.
7개월째, 서준은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일인극을 연습하고 있었다.
첫 번째 달에는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집에서든 유치원에서든 한시도 쉬지 않고 연습했다. 하지만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서준은 이제 유치원에 다녀와서, 정해진 시간에만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언 윌과 영상통화를 한 수십 번. 모두 불합격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서준이 소리를 지르며 소파 위에서 파닥파닥거렸다.
새로 열린 도서관에도 없었다. 모든 책을 다 읽었는데도 없었다.
가능성 높아 보이는 능력을 썼지만, 단박에 불합격. 어째 더 착해졌다는 평을 들었다.
‘라이언이 온 그 날부터 [엘프의 기초 호흡]도 하지 않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숨 쉬는 것처럼 몸에 익어버렸지만, 무의식중에라도 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앗. 방금 해버렸다!’
서준은 무의식중에 조용히 온몸을 돌려던 [엘프의 기초 호흡]을 멈추었다.
파닥파닥하던 서준이 소파 위에 엎어지자, 서은찬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항상 여유만만했던 서준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서준이의 몰랐던 모습을 많이 본다니까.”
밥 먹다가 벌떡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향하는 아들을 보며 혼내는 엄마. 어린이집에 다녀와서 씻지도 않고 대본을 꺼내는 아들. 간식을 먹다가 딴생각(분명히 연기)을 하는 아들을 혼내는 아빠. 요 몇 달간의 생활을 떠올린 이민준도 웃었다.
아마 그 기저에는 이서준이 잘 헤쳐나갈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 어른들의 믿음과 달리 서준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벌써 7개월이나 흘렀다. 1년이고 5년이고 10년이고 할 자신은 있었지만. 아니, 서준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나라도 10년은 힘들 것 같다.
소파에 엎드려 창밖 하늘을 보던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능력을 쓰지 않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라이언 윌의 평가는 아니었다. 그래도 착해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도서관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는데, 그 안에 있던 삶들도 전부. 여기 착한 애. 저기 착한 애.
“하아.”
서준이 다시 세상 온갖 시름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좀 더 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서준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연습. 연습만이 살길이다.
그렇게 연습과 도서관 탐방을 반복하던 서준에게 기다리지 않았던, 소식이 전해졌다.
라이언 윌이 다시 한국에 왔다. 조나단도 함께였다. 갑자기 등장한 감독의 모습에 부부와 서준이 바짝 긴장했다. 오늘 큰 게 터진다는 직감이 들었다.
오늘은 라이언 윌 앞에서 직접 연기를 펼쳤다. 대사도 다 외웠고 몸동작도 완벽했다. 하지만 역시 불합격을 받았다. 한숨을 쉬는 서준을 보던 라이언 윌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9월에 쉐도우맨2 촬영을 시작할 거다.”
그 목소리에, 부부와 서준의 몸이 멈추었다. 서준의 요동치는 눈동자를 본 라이언 윌이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했다. 좀 더 좀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촬영요?”
“그래.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쉐도우맨 2에 나오는 다른 배우들 스케줄도 그렇고, 새로 개봉할 마린사 영화들의 일정도 잡혔다.
라이언 윌 감독은 자신의 재량으로 최대한 기한을 늦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불가능했다.
서준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항상 즐겁기만 했던 연기였는데, 촬영이었는데. 오늘만큼은 오지 않았으면 했던, 절망적인 말이었다.
“그럼 연기는…….”
“일단 그때, 오디션에서 했던 연기로 촬영하자.”
서준은 할 말을 잃었다. 7개월이나 연습했는데, 하는 말이 ‘처음 걸로 하자’라니. 입만 벙긋벙긋거리던 서준이 말을 돌렸다.
“아직도 제 사진 돌아다녀요?”
“그건 FBI도 못 없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사진은 어떻게든 없앤다고 하지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더더욱 그게 출력이 된 상태라면.
라이언 윌과 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이언 윌의 본가에도 그의 어머니가 출력해 놓은 서준의 사진이 있었고, 서준의 집에도 김희상이 멋들어진 액자까지 만들어 넣어둔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기 싫다며 입을 삐죽거리는 서준에 부부는 자신들의 방에 걸어 두었다.
“그러고 보니, 조나단 말이 어떤 나라에서는 아예 컵이나 부채 같은 기념품으로 만들어서 판다는군. 행운을 불러다 주는 부적인가? 인기가 많다고 하던데.”
“라이언!”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라이언의 말에 기운을 차린 서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십 번의 영상통화로 두 사람은 자조적인 농담까지 나눌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너무 잘 찍혔어.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너무 천사 연기에 푹 빠졌던 거 아닌가?”
“내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어요?”
서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때는 정말, 크리스마스이브에, 생방송이라는 말에 너무 즐거워서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리는 기분으로 능력을 사용했다. 라이언의 말에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자조적인 농담이 지나가고 침묵만이 남았다. 짧지 않은 침묵이 지나가고 라이언 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 준비할 수 있겠어?”
“네.”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 [방울 도깨비의 김 서방 놀리기]로 넘어가고 다음은, 좀 더 열심히 연습하자.
“해볼게요.”
* * *
조나단은 라이언과 서준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촬영일을 알려준 라이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부와 서준도 작별 인사를 했다.
좀 더 서준의 집에 머물면서 연기 지도를 하나? 생각했던 조나단이 따라 현관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요?”
“대본 좀 수정하러.”
벌써 몇 번째 수정인지. 조나단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라이언의 뒷모습을 보았다.
딱 맞는 배우를 발견했다며, 겉으로는 들어내지 않았지만 정말 기뻐하던 삼촌이었는데. 축 처진 모습이 안쓰러웠다.
“더 수정하게요?”
“배우도 노력하는데 나도 최대한 해봐야지.”
이 정도면 배우를 바꿔도 되지 않나 싶지만. 조나단은 입을 다물었다. 몇 년째 영화를 찍고 있는 라이언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서준 리도 분명 알고 있겠지. 하지만 두 사람은 도통 포기하지를 않았다.
조나단과 라이언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 * *
서준은 도서관의 앞에 섰다. 라이언 윌 감독이 찾아와 쉐도우맨2의 촬영을 예고했다.
“하아.”
이제 8월. 오늘도 서준은 뒤로 돌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밝게 빛나던 선 선향의 도서관이 점점 서준의 등 뒤로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얼마가 걷지 않아, 여러 개의 문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색을 가지고 있던 선 성향의 도서관 문들과는 달리 오직, 검은색 일색의 문들이 보였다.
도서관의 문은 두꺼운 검은 사슬들로 뒤덮여 있었다.
서준이 다가가 도서관의 문에 손을 댔다. 문은커녕 검은 사슬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 거무튀튀한 도서관은 갖가지 나쁜 전생이 모여 있는.
“악 성향의 도서관.”
사슬을 풀고 문을 여는 방법은 하나였다. 악 성향의 마나(마기)를 지니고 있을 것.
만약 서준이 [마인의 기초 호흡]을 이용해 근원을 만들었다면 여기 악 성향의 도서관은 활짝 열렸을 테고, 두꺼운 흰 사슬이 선 선향의 도서관을 굳건히 감싸고 있었을 터였다.
8개월째, 매일 같이하는 일이었지만 긴장이 되었다.
서준은 숨을 내쉬며 긴장한 몸을 풀었다. 몸 안의 선 성향의 마나(선기)가 악 선향의 도서관의 영향을 받았는지 꿈틀거렸다.
서준은 악 성향의 도서관 앞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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