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7화
“레디, 액션!”
이지석은 대문을 두드렸다. 쿵쿵! 대본의 지시문대로 두드리는데 문 건너편에 무언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한 이지석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최대만 감독은 그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수혁’의 몸에 있는 악령이 문 건너편에 있는 아기 무당의, 신의 힘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역시, 연기 잘하는 배우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쿵쿵!
문이 열렸다. 두드릴 때는 이렇게 꽤 두꺼워 보이는 문이었는데 가볍게 열렸다. 그리고 새하얀 한복 입은 아이가 나타났다.
“여기 용한 무당이 있다던데…….”
원래 대사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었지만, 이지석은, 아니, 수혁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아기 무당의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무언가의 눈동자.
모니터를 보고 있던 최대만 감독은 이지석만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뭔가 인간이 아닌 것이,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지석이 느끼는 것을 오디션 때 느꼈기 때문이었다. 서준의 안에 무언가 있는 듯한 기분.
아이에게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은 스태프들도 있었고 아닌 스태프도 있었지만 서준과 이지석의 연기에 다들 숨을 죽였다.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적막만으로도 솜털이 삐죽삐죽 솟았다.
아기 무당의 고개가 수혁의 머리에서 발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제 속을 낱낱이 살피는 저것 때문에 수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혁은 제 안의 악령이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근두근하는 심장의 박자에 맞추어 온몸의 피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발끝부터 손끝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끝내는 머릿속마저도 두근거렸다.
아기 무당의 시선이 사라지고 쿵! 문이 닫혔다. 곧,
“컷! OK!”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수혁, 아니, 이지석은 그 자세 그대로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배우가 움직이지를 않자 다른 스태프들도 조용히 눈만 굴렸다. 의아한 최대만이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덜컹. 문이 열렸다. 이지석이 저도 모르게 두 걸음 물러섰다.
“아, 아직 촬영하고 있었습니까?”
이서준의 보호자, 김희상이 나타나자, 이지석이 정신을 차렸다. 김희상의 품 안에 환하게 웃으면서 저를 보며 손을 흔드는 서준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한 쌍의 눈동자였다.
“둘 다 진짜 잘했습니다! 이제 다음 촬영 준비할 동안 조금 쉬세요.”
최대만 감독의 말대로 이제 클로즈업 샷과 바스트 샷 촬영을 해야 했다.
두 배우의 실감 나는 표정을 잡기 위해 스태프들이 나무 대문 가까이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동안 두 배우는 의자에 앉아 촬영을 기다렸다.
의젓하게 의자에 앉아서 코코아를 마시고 있는 서준을 본 이지석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그런 연기가 가능하지? 이제 막 배우를 시작한 조그마한 아이가 아니라, 오래 활동을 해온 배우 같았다.
아니, 보통의 연기자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이지석이 계속 쳐다보자 서준이 코코아 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매만졌다.
“저, 뭐 묻었어요?”
“아니야.”
이지석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부류의 배우가 있었다.
하늘이 주신 재능을 가진 배우. 천생 배우.
그런 재능은 말로 설명한다고 해서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랑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이런 경우에는 ‘될 것 같아서 해봤는데 됐어요’ 정도일까. 이지석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저런 배우와 함께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연기력이 늘 때가 있었다. 압도적인 연기에 지지 않고 상대역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이지석이 웃었다. 정석으로 배울 수 없다면, 훔쳐서라도 배워야지.
“다음 촬영 시작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석과 서준이 촬영장으로 향했다.
당일 모든 촬영이 끝나고 배우들은 숙소로 돌아가고 스태프들은 남아 장비를 정리했다.
카메라 감독이 어이없다는 듯이 최대만 감독에게 말했다.
“이지석 배우도 그렇지만 서준이도 지지 않는구나. 두 사람 완전 불꽃 튀기듯이 연기하던데…….”
“아닐걸.”
“뭐?”
“내 눈엔 지석 씨가 서준이한테 지지 않으려는 것 같던데.”
* * *
다음 날.
서준이 나오는 신의 촬영은 금세 끝났다. 아기 무당이 악령 퇴마를 위해 방울과 부적을 가지런히 놓고 마음을 다잡는 장면을 촬영했다. 또 아기 무당과 함께 사는 할아버지와 있는 장면도 촬영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장면이라서 점심이 되자 모두 끝났다.
서준과 달리 이지석이 촬영할 장면은 많았다.
수혁이 아기 무당과 함께 사는 할아버지에게서 아기 무당의 사연을 듣는 장면과 아기 무당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마을을 벗어나려는 수혁과 마을에 남으려고 하는 악령이 싸우는 장면을 찍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맛있어요!”
“엄청 맛있네요.”
마을을 구경하기로 한 서준과 김희상은 숙소로 사용하는 파란 대문집 할머니에게 붙잡혀 손칼국수를 먹게 되었다. 별 재료는 안 들어간 것 같은데 엄청 맛있었다. 서준은 열심히 손칼국수를 흡입했다.
“아기가 잘 먹네.”
“서준이에요!”
“그려?”
파란 대문집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한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마시다 말고 말했다.
“촬영한다며? 어디서 볼 수 있나? 테레비?”
“영화 촬영이라서요. 영화관에서 보셔야 할 거예요.”
“영화관은 저어기, 읍내에는 나가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 마을이 나온다는데 가야지!”
“이장네 차랑, 저기 배춧집 차랑 두 대면 다 갈 수 있겠지?”
“이장 집 차가 크긴 해도 네 대는 있어야지!”
다들 영화를 보러 갈 날짜를 정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말했다.
“거 무슨 영화 찍나?”
김희상이 잠시 고민했다. 엑소시스트? 제령?
“나쁜 귀신 물리치는 영화요!”
그사이 서준이 대답했다. 나쁜 귀신?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당도 나오고, 목사님도 나오고. 그런 영화예요. 제령이라고 할까?”
“오호. 무당!”
“옆 마을 무당님이 아주 용했지.”
금세 영화 이야기에서 무당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김희상과 서준이 다 먹은 그릇을 보고 할머니가 한 국자 더 주려고 하자 김희상도 서준도 얼른 사양했다. 솔직히 너무 많이 먹었다.
마을 구석에 있는 서낭당을 구경하러 가기로 한 서준과 김희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파란 대문을 나섰다.
서준과 김희상이 떠나고 막걸리를 그릇에 부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옆 마을 무당님이 아직도 계셨으면 우리 외손주 점 좀 봐달라고 할 텐데…….”
“아, 엊그제 최 씨 손주 놀러 왔지?”
마을 사람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 다니던 최 씨의 손주를 떠올렸다. 10살 때까지 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라 오계리 노인들의 손주 같은 아이였다.
“걔는 점심도 안 먹고 어딜 그렇게 쏘다녀?”
“아침에 서낭당에 구경하러 갔지. 오늘도 밤늦게 오려나.”
“서울살이가 많이 힘든갑네.”
다들 막걸릿잔을 들어 마셨다.
* * *
오계리의 서낭당은 아주 오래된 나무였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아니었고, 가장 큰 나무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된, 시골에는 꼭 하나쯤은 있을 것 같은 나무였다.
“엄청 크다.”
“200년은 된 것 같네.”
서준이 후다닥 뛰어가서 나무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엄청 컸다. 붉고 파랗고 노랗고 하얀 천들이 나뭇가지마다 묶여 바닥을 향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무의 기둥은 돌담처럼 둥그렇게 둘러싸여 있었다.
김희상이 멀리서 카메라를 들었다.
“서준아, 여기!”
“김치!”
김희상은 서은혜와 이민준에게 보낼 서준의 사진을 틈틈이 찍고 있었다. 열심히 사진 모델이 되어주던 서준은 김희상이 이제 됐다는 말을 듣고 다시 커다란 나무를 구경했다.
커다란 나뭇가지가 하늘로 뻗고 나무 기둥도 굵었다. 길게 연결된 색색의 천이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방울 도깨비의 무덤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설마! 여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서준은 서낭당 주위로 한 바퀴 천천히 걸었다. 김희상은 그 모습을 사진사라도 된 듯 열심히 찍어댔다.
이곳저곳 열심히 찾아봤지만 김 서방이 깨진 방울을 넣어 놓은 구멍은 없었다.
“있을 리가 없나.”
조금 아쉬웠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희상이 삼촌이라면 금세 원래대로 고쳐줬을 것이다.
“뭐가?”
“아니야!”
서준은 김희상에게 뛰어갔다.
“삼촌! 산에 가 보자!”
이 산이 그 산인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 변했을 수도 있지만, 한 달 반 동안 심심하면 옛날 동화처럼 읽었던 삶의 책 덕분에 어쩐지 산이 좋아졌다. 진짜 도깨비 하나쯤은 살 것 같은 산이었다.
“그러자. 여기 돌멩이가 많으니까 뛰면 안 돼.”
“응!”
서준과 김희상이 천천히 서낭당 옆의 오솔길로 걸어갔다.
산이 가까웠던 것만큼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내리쬐던 여름 햇살이 가려졌다.
“역시 그늘이 시원하네.”
“저기! 꽃이다!”
서준이 근처에 있던 꽃을 발견했다. 이렇게 밖에 나와서 구경하니 참 좋았다.
서준은 신이 나서 여기저기 가리켰다. 새도 발견했다. 다람쥐도 있었다. 서준이 가리키는 곳을 보던 김희상이 말했다.
“이러다가 멧돼지도 나오겠는데?”
“꿩이다!”
“꿩?! 진짜 멧돼지 나오는 거 아니야?”
동물을 찾으며 열심히 길을 걷고 있던 서준이 발을 멈추고,
휙!
고개를 돌렸다.
부드럽게 부는 바람 사이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새소리라기에는 뭔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서준은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처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심히 서준을 뒤따라가고 있던 김희상이 의아해 서준을 불렀다.
“서준아?”
“쉿!”
서준은 신경을 집중했다, 저어기, 멀리서. 무언가. 하지만 너무 작아서 방향이 가늠되지 않았다.
“김 서방.”
“응?”
“놀자.”
[방울 도깨비의 김 서방 놀리기를 발동합니다.]
서준은 도깨비의 기운을 마치 박쥐의 초음파처럼 흩뿌렸다. 내면의 형태를 만들고, 더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고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이 기운에 반응하는 건, 김 서방뿐이었다.
서준은 신경을 집중했다. 하급이라서 그렇게 많은 기운이 아니었다. 이렇게 넓은 장소에서는 짧은 거리밖에 닿지 못했다.
그래서 서준은 중심이 되는 자신이 열심히 돌아다니기로 했다.
뒤에 희상이 삼촌이 있으니 최대한 길 쪽으로 다닐 생각이었지만, 그새 아주 가늘게 들리던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이다.
이내 마음을 바꾼 서준은 길을 벗어나 산속으로 걸어갔다.
“서준아?!”
오솔길을 벗어나 길이 아닌 곳으로 가는 서준을 김희상이 불렀지만, 일단 속으로 사과하고 서준은 발밑을 조심하며 열심히 걸었다.
삼촌! 뛰지는 않았어! 조그마한 아이가 다람쥐처럼 뽈뽈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김희상도 얼른 서준의 뒤를 따랐다. 길은 험하고 서준은 얼마나 빠른지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너, 아주 혼날 줄 알아!
부드럽게 흘러가던 도깨비의 기운이 한 곳에서 막혔다. 서준은 얼른 그곳으로 향했다.
“찾았다!”
“서준이, 너! 삼촌한테 혼날 줄 알아!”
“삼촌! 여기! 사람이 있어!”
“엄마 아빠한테도……. 뭐?!”
김희상이 서준의 말에 놀라 단숨에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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