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6화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단 서준은 아빠 품으로 향했다.
겨우 진정한 브라운블랙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다 못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제 겨우 10분도 안 됐는데. 이렇게 지치면 48시간 동안 잘할 수 있겠어?”
서은찬이 웃었다. 브라운블랙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제 10분 지났다고? 48시간이 2,880분이니까…….
속으로 셈을 하던 박서진의 손이 덜덜 떨렸다.
“괜찮아요. 처음만 조금 고생하면 금방 익숙해져요.”
네 사람은 서은혜의 말에 아주 조금의 위안을 얻었다.
서은혜는 A4용지 더미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브라운블랙과 서은찬, 김화련의 시선이 종이 더미로 향했다.
서준은 알고 있었다. 이 종이 더미들은 지난 밤 엄마와 아빠가 머리를 맞대고 아주 열심히 만든 책이었다.
서준을 돌볼 브라운블랙을 위해, 그리고 서준의 편안하고 안전한 엄마 아빠 없는 48시간을 위해 아주 세세한 서준의 취향까지 적어놓은 서준 맞춤 육아 책이었다.
“이건 뭐야?”
“서준이 돌볼 때 필요한 거. 일단.”
서은찬의 물음에 답한 서은혜가 책을 폈다. 제일 첫 장.
“24시간으로 서준이가 밥 먹는 시간, 낮잠 자는 시간, 놀이 시간, 밤에 자는 시간 등등 나눠놨어요.”
브라운블랙이 첫 장을 보며 설명을 들었다. A4용지 안을 아기의 하루 일정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와, 밥을 3시간에 한 번씩 먹네. 낮잠도 하루에 2번씩 자고.
“특히 밥 시간은 서준이가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울기 전에 시간에 맞춰서 주셔야 해요. 1분도 늦지 않고.”
“울기 전에…….”
브라운블랙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뒤에는 분유 타는 방법하고 이유식 레시피랑 차가운 이유식 데우는 방법하고. 서준이가 먹을 과자량…….”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적어놓았다. 서은찬이 질린 눈으로 누나를 보았다.
결혼하기 전까진 이렇게 철저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게 엄마의 힘인가?
팔랑팔랑 종이가 넘어갔다.
“서준이가 좋아하는 놀이랑 인형…….”
서은혜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은 없어도 되겠죠?”
차마 김희성의 몬스터 인형은 보여줄 수가 없었다. 머리가 2개 달리고 험악한 이빨을 빛내는 인형을 어떻게 보여주겠는가.
이미 서준이의 모든 인형을 자가용 뒷좌석에 숨겨놓았다. 곰 인형 하나 빼고.
“네. 저희도 장난감이랑 인형 준비해 왔어요!”
황예준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짐가방에 대부분이 서준이를 위한 장난감과 인형 그리고 물건들이었다. 서은혜가 환하게 웃었다.
“잘됐네요. 이번 기회로 서준이가…….”
‘평범한 인형을 좋아하게 됐으면 좋겠네…….’
서은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서은혜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이민준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인형들을 뺏긴 서준은 입술을 삐죽였다.
앞으로 이틀 동안은 희상이 삼촌 인형을 포기해야 싶을 듯했다.
‘도플갱어 곰 인형이 남아서 다행이다!’
다른 평범한 인형들과는 달리 희상이 삼촌의 몬스터 인형에는 뭔가 서준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만족감이 있었다. 그래서 왠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다.
“이건 목욕 순서를 적어 놨어요.”
“목, 목욕도 저희가 하나요?”
당황한 최시윤의 반문에 서은혜와 서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당연하지.”
서은혜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그에 따라 브라운블랙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각오는 했지만 주의할 점과 할 일이 엄청 많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48시간 동안의 이 조그마한 아기의 모든 것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애완동물 하나 키워본 적도 없는 그들이 말도 못 하는 아기를 돌봐야 했다. 생각만 해도 기절할 것 같았다.
“이 정도예요. 어때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차마, 양심에 찔려 잘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자, 그럼. 서준이 밥 시간인데 먹여볼 사람?”
이민준의 말에 브라운블랙이 다시 돌이 되었다. 뱃속에 알람시계가 든 서준은 준비를 했다. 1초라도 지나면 울어버릴 거야!
“울기 전에 먹여야 해요. 아직 분유도 안 탔잖아요?”
“나! 나! 내가 분유 탈게!”
“저도요! 온도계 있어요!”
황예준이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최시윤도 짐가방에서 온도계를 꺼내 뒤따랐다. 서은혜와 김화련이 카메라를 들고 뒤따라 갔다.
이민준의 눈이 케빈과 박서진을 향했다. 뱀 앞의 생쥐처럼 두 남자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그럼 두 사람 중 누가?”
“리더한테 양보할게.”
“난 아까 안아봤어.”
“그럼 케빈 씨가 안아볼까요?”
이민준의 말에 케빈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자, 케빈 씨.”
“오…….”
이민준이 서준을 케빈에게 안겨 주었다. 케빈의 손이 덜덜 떨렸지만 다행히 앉아 있어서 서준은 무릎 사이에 안전하게 안착했다.
“이렇게 옆으로 살짝 눕혀서…….”
“흐힝이잉.”
“……!”
“불편해하면 쿠션을 밑에 넣어주세요.”
어색한 자세에 서준이 등이 배겨 신경질을 냈다.
유능한 아빠인 이민준은 익숙한 듯 얼른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서준의 등 밑에 넣어주었다.
서준의 표정이 풀렸다. 서준의 자세는 편안해졌지만 케빈의 자세는 한마디로.
이상했다.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팔의 관절이 제각각 움직였다.
“꼭두각시 인형 같네. 케빈.”
“음. 오른팔을 좀 이렇게 내려볼까요?”
박서진과 이민준이 이리저리 케빈의 양팔을 움직였지만 도저히 편해 보이는 자세를 만들 수가 없었다. 한쪽 팔을 움직이면 저절로 나머지 팔이 움직였다.
“음……. 어쩌죠?”
“저, 저는 괜찮습니다.”
불편해 보이는 케빈의 자세 때문에 이민준과 박서진이 고심했지만 케빈은 지금 이 상태가 정말 괜찮았다.
그저 무릎 위에 올려진 묵직한 아기의 무게가 더, 불안했다. 다리를 떨고 싶은데 아기가 떨어질까 봐 움직이지도 못했다. 초조하게 입술만 씹어댔다.
‘쥐…… 쥐 날 것 같은데…….’
당황과 불안함으로 가득한 거실과 달리 부엌은 화기애애했다.
“분유는 이 분유를 제일 좋아해요.”
“알아요. 엘리펀트 분유! 광고도 봤어요!”
서은혜가 분유를 타는 방법과 젖병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황예준과 최시윤이 몸을 움직였다.
처음 하는 일에 분유 가루를 흘리고 물도 바닥에 흘리긴 했지만 금세 따끈한 분유가 만들어졌다.
서은혜가 검사 겸 분유의 온도를 확인했다. 서은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최시윤이 은근슬쩍 온도계로 분유의 온도를 확인했다.
‘40도!’
“나중에도 이렇게 타면 돼요.”
“네. 맡겨 주세요!”
젖병을 들고 거실로 돌아오니 서은찬은 거실 한쪽에 쓰러져 숨을 죽여 웃고 있었고 이민준과 박서진은 고심하는 얼굴로 서준을 안고 있는 케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최선이네요.”
“그러게요.”
이민준의 말에 박서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많은 자세로 바꿔 보았지만 이 자세가 최선이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분유가 잘 섞이게 젖병을 열심히 흔들고 있던 황예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팔 둘 곳을 모르던 케빈은 어느새 두 팔을 의자의 팔걸이처럼 쭉 뻗고 있었다.
서준은 안락한 의자에 앉은 것처럼 케빈의 배에 등을 기대고 팔걸이를 짜리몽땅한 두 팔로 잡고 앉아 있었다. 오동통한 두 다리까지 쭉 뻗으니 세상 편안한 자세였다.
“인간 의자네요. 인간 의자.”
최시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은 폭신폭신한 쿠션과 안락한 케빈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신이 나서 팔걸이가 된 케빈의 양팔을 붙잡고 엉덩이를 들썩들썩거렸다.
이제 8개월. 서준은 무언가를 잡고 벌떡 일어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자, 얼른 먹여보세요.”
시간을 살핀 서은혜가 서준이 울기 전에 얼른 먹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민준은 다시 서준을 쿠션 위에 눕혔다. 케빈의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겨우 자연스러운 자세를 만들었다.
“젖병 여기 있어.”
열심히 젖병을 흔들던 황예성이 케빈에게 젖병을 건넸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젖병을 잡은 케빈은 천천히 젖꼭지를 서준의 입에 넣었다.
“아뭄!”
쭙쭙-!
브라운블랙의 시선이 서준에게로 모였다. 서은찬과 김화련은 카메라를 천천히 움직이며 네 사람의 얼굴을 찍었다.
불안과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네 사람의 표정이 천천히 편안하게 풀렸다.
작은 아기가 기분 좋은 듯 두 눈을 꼭 감고 젖병을 잡고 있었다. 브라운블랙이 천천히 서준을 안고 있는 케빈의 앞으로 가 앉았다.
아주 작은 아기가 열심히 젖꼭지를 빨며 밥을 먹고 있었다. 그건 처음 느껴보는 아주 생경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어쩐지 감동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브라운블랙은 넋을 놓고, 서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어색하던 자세도, 좌불안석이던 분위기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바뀌었다.
네 남자와 아기를 보던 서은혜와 이민준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은찬의 의견대로 아기와 브라운블랙이 방심하고 있을 때 집을 나서기로 한 부부였다.
서은혜가 손을 흔들어 서은찬을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을 보며 서은찬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지금 가게?’
‘응.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쳐 줬고 더 할 것도 없어.’
‘처남. 서준이 잘 부탁해!’
브라운블랙을 촬영하던 김화련도 부부가 나갈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서은혜와 이민준도 조용히 인사를 하고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서은찬의 꼼수로 살짝 열려 있던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하아. 잘하겠지?”
“잘할 거야. 의사 선생님도 있고 처남도 있고.”
“믿기는 하는데……. 그래도…….”
48시간.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가족이었다. 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의 마음을 짐작한 이민준이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 서은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제 우리 둘이 쉴 수 있겠어. 이번 기회에 여행이나 갈까?”
“멀리는 못 가.”
“알아. 그럼 어디부터 가 볼까?”
오랜만의 데이트에 서은혜와 이민준이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와. 다 먹었다.”
“진짜 잘 먹네.”
멍하니 서준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브라운블랙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젖병의 분유가 바닥났을 때였다.
황예준이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다음엔 뭘 하……? 어? 어어?!”
거기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황예준의 놀란 목소리에 서준을 보고 있던 세 사람의 시선도 뒤를 향했다.
“어…… 없…….”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브라운블랙의 눈동자가 불안과 당황으로 크게 요동쳤다.
박서진의 눈이 재빨리 카메라를 들고 있는 서은찬에게로 향했다. 너무 놀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만 벙긋벙긋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려대던 세 사람의 시선도 박서진을 따라 서은찬에게 향했다.
장난기 가득 섞인 미소를 지은 서은찬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브라운블랙과 준의 48시간! 지금부터 시작한다!’
“네에에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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