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한국에서의 활동도 끝나고, 휴식기도 끝났다.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한 해가 지나갔다.
“해피 뉴 이어!”
“다들 1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송년회 겸 신년회를 위해 GH 엔터의 전원이 모였다.
최강훈 대표가 서울에 있는 스테이지 하나를 빌렸고, GH 소속의 아이돌과 스태프, 직원들이 전부 다 모여서 파티를 열었다.
몬스터즈, 올리오스, 그리고 내년 중순에 데뷔하는 걸로 정해진 데뷔조인 앙상블.
아이돌은 물론이고, 솔로 가수들, 거기에 배우와 개그맨들까지.
정말 모두가 순수하게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건하 씨, 이번에 박지혜 작가님이랑 정상준 감독님이랑 작업 하나 했다면서요.”
“네. 저번 주에 크랭크 업 끝났고, 지금 편집 들어가고 있을 겁니다.”
GH 엔터의 배우 쪽 선배인 이영하가 샴페인을 손에 쥔 채로 나를 찾아왔다.
십 년 전, 찰진 고등학생 연기로 국민 여동생 타이틀을 땄지만, 최근에는 성숙한 누님 연기로 다시금 제 2의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한 선배 배우였다.
“OTT 드라마?”
“네, 사전 제작입니다.”
“아아, 그럼 이미 촬영도 다 끝났겠네요.”
“맞습니다.”
“부러워요. 나는 이제 촬영 들어가거든요. 물론 저는 종편 쪽이지만요.”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데 건하 씨처럼 갑자기 연기에 몰입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나도 그런 식으로 연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던데.”
“그렇게 물어보시면 딱히 답해드리기가 어려운 게,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본능적인 건가…. 부럽네요. 건하 씨가 가진 재능이.”
말을 마친 그녀가 샴페인을 마셨다.
“건하 씨는 술을 못 한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아쉽네요. 같은 길을 걷는 선후배끼리 가볍게 한잔할까 했는데.”
“이걸로라도 대신하시죠.”
나는 바텐더가 만들어준 무알콜 칵테일을 내밀었다.
짠.
잔을 맞대자, 이영하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앞으로 배우 쪽에서도 자주 봤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내가 후배 덕을 볼 수 있지.”
“제가 선배님의 덕을 봐야죠.”
앞으로 배우 쪽으로 일하게 된다면 그녀의 도움을 종종 받을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말이 좋아 주연 배우지, 아직 경험치도 얼마 쌓지 못한 초짜니까.
“그렇게라도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한진성이 찾아왔다.
“건하야! 우리 귀염둥이 후배!”
이미 몇 잔을 마셨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진성이 형?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조금밖에 안 마셨어. 아까 너희 애들 보이길래 같이 한잔씩 했지. 헤헤.”
살짝 들뜬 얼굴로 다가온 그가 이영하와 어색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진성이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니?”
“어떤 거요?”
“나보고 그래미를 갈 수 있다고 얘기했잖아. 너도 그래미를 노릴 거라고도 했고.”
“네, 맞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한진성을 보며 그런 말을 했다.
그를 육성해서 그래미까지 수상하게 만든 후에 있었던 첫 만남이라, 그와의 만남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게임에서만 봤던 스타를 현실에서 만났을 때의 설렘과 기대, 그리고 반가움이 나를 들뜨게 했었다.
“그래미 수상 후보자가 보기엔 어때? 여전히 내가 그래미를 노릴 수 있을 거라고 봐?”
그는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방금전까지 취해 있던 목소리에 진지함이 깃들며, 표정이 바뀌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나한테 묻는다고?’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얼굴이잖아.
설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꺾이지 않을 그런 얼굴 말이다.
내가 예전에 보았던 한진성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
그 상큼한 얼굴로 물어보면 내가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형은 이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보였어?”
“너무 잘 보였어.”
“에잉, 나름 숨긴다고 숨긴 건데.”
한진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래미를 노리기 위해서 활동을 하진 않을 거야. 한국, 미국 양국에서 활동하며 인정을 받을 거거든. 이번에 아깝게 1위를 놓친 거지, 우리도 2위를 했었으니까.”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형은 할 수 있을 거야. 충분히.”
“고맙다.”
우리의 서로를 보는 눈빛 속에서는 무언의 확신이 함께했다.
“두 사람, 사이 정말 좋아 보이네요.”
이를 보던 이영하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하하하, 제가 이 친구들을 업어 키웠거든요.”
“에이, 우리가 알아서 컸죠.”
“어어? 이러기야? 내가 올리오스를 위해서 얼마나 조언을 하고 옆에서 도왔는데?”
“이 형 말 다 거짓말이에요. 우리가 알아서 컸어요.”
진성이 진짜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그제야 손을 저었다.
“농담이에요. 몬스터즈 선배들이 다 업어 키웠죠. 도움도 엄청 많이 받았습니다. 기본적인 조언부터 아이돌로서의 자세, 팬을 대하는 방법까지 전부 다 받았죠! 하핫.”
그 말에 한진성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럼.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진짜 이 친구들 무대를 마음 졸이며 봤었거든요.”
우리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각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올리오스 멤버들을 보았다.
이제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가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올리오스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있었던 관계가 조금 더 넓게 뻗쳐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보기 좋네.”
“애들이?”
“응. 뭔가 어른이 되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느낌이야.”
내 말에 한진성이 나를 우두커니 서서 보았다.
“몇 번을 봤지만, 역시 적응이 잘 안 되네.”
“뭐가?”
“널 볼 때마다 20대가 아니라 30대 삼촌을 보는 느낌이야. 그것도 30대 후반.”
“늙었다는 거야?”
“하는 행동이?”
“너무하네. 파릇파릇한 동생한테.”
“그럼,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민증이라도 보여드려야 하나.”
이런 시간이 좋았다.
멤버들은 물론 이 세계에서 사귄 사람들과 이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원래 세계에선 할 수 없었던, 벽이 없는 대화.
이게 왜 이렇게 좋은 건지.
진엔딩에 다가갈수록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사소해서 무심코 넘겼던 즐거움이 이곳엔 너무 많았다.
‘결과는 지켜봐야지.’
진엔딩을 본 보상이 무엇일지.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일단 다가올 그래미 어워드에서 뭐든 수상해야만 했다.
쉽지 않은 일이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기저기 활동을 이어갔다.
연말 연초 콘서트도 했고,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건 물론이고, 국내 투어를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팬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늘렸다.
팬미팅과 사인회도 몇 번 진행했다.
휴식기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바쁜 하루가 이어졌다.
잘 나가는 연예인들은 그 활동의 간극이 넓다던데,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다니는 건지.
“우리가 하겠다고 한 거지만, 엄청 많네.”
우주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사실 이 스케줄들 전부 우리가 자처해서 만든 일정이었다.
거의 반년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다고 국내 활동은 하질 못했으니까.
그래미 시상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 전에 조금이나마 한국 팬들과 함께 숨쉬고 싶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의 스케줄도 예전과 달리 많아졌기에, 사인회나 팬미팅은 5명 전원이 가지 못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바쁜 한 달을 보냈다.
“솔로 활동할 때보다 더 바쁜 거 같은데.”
“그래도 지금이 더 즐겁지 않아?”
성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쨌든 한국에서 있는 마지막 스케줄을 끝마친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 짐을 쌌다.
미국행의 목적은, 그래미 어워드.
이번 그래미 어워드에선 우리의 무대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운이 좋다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상 하나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자주 출국하다 보니, 이제는 우리 집만큼이나 익숙해진 공항에 도착했다.
“자, 이제 내리면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 맞다. 두현이 형, 이번에 같이 안 간다면서요?”
“아, 그렇게 됐다.”
이두현 매니저가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 미국으로 가는 일정부터 이두현은 올리오스의 매니저가 아닌, 몇 달 뒤에 데뷔하게 될 GH 엔터의 신인 아이돌, 앙상블의 서포트에 전념하기로 했다.
우리를 성공적으로 서포팅했던 덕일까.
수뇌부에선 이두현이 신인 아이돌의 서포팅에 능숙하다고 판단하고, 앙상블의 초기 활동을 이끌 것을 지시했다.
“그럼 우리는 누가 맡는 거죠?”
“미국 일정 동안엔 황이서 프로듀서님이랑 함께 하다가, 귀국하면 아마 다른 친구가 담당이 될 거야. 물론 여전히 너희는 아이돌 2팀이라, 스케줄은 내가 짜는 거니까 나한테 잘 보여.”
“박카스 들고 찾아가면 되나요?”
“와서 밥이나 한 끼 사줘.”
이두현이 특유의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마음이 복잡할 텐데, 미국으로 가는 우리가 걱정하지 않길 바라며 억지로 웃음을 짓는 모습이 대견했다.
“앙상블 2년 채우면 다시 올리오스 맡는 건가요?”
“그건 모르지만, 그때 되면 다른 신인들을 맡지 않을까?”
“안 돼요. 그땐 다른 매니저한테 시켜요. 나중에 두현이 형이 우리 안 맡아주면, 나 재계약 시즌 때 다른 곳이랑 계약할 거예요.”
우주가 진심으로 삐진 듯 뚱한 얼굴로 말했다.
유독 이두현과 친하게 지냈던 우주였기에, 아쉬운 걸 거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오는 건 당연한 법.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놓아줄 때는 깔끔하게 놓아줘야만 했다.
그래야 상대도 미련을 갖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영원히 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팀에 있을 거니까.
“앞으로도 스케줄 잘 짜주세요.”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내가 다 특별히 직접 다 처리해줄게.”
그가 담당해준다면 걱정이 없었다.
공항 앞에서 우리와 함께했던 오랜 친구, 매니저와 작별한 우리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래미 어워드 참석을 위해서.
출국 심사를 마친 우리를 태운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그래미 어워드가 진행되는 아레나 홀이 있는 라스베이거스.
시상식에 대한 기대를 품으며 우리는 미국으로 날아갔다.
“어서오게!”
루케 크롬블과 엘븐 라비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직접 나와 있었다.
“어서 와! 나를 꺾은 라이벌, 올리오스!”
작년 그래미에서 베스트 보컬 앨범을 받은 엘븐 라비가 과장된 몸짓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엘븐 라비가 왜 있냐는 얼굴로 루케 크롬블을 바라보자.
“한 고집 하더라고. 자네들을 꼭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루케 크롬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어제의 적이라도, 오늘까지 적이라는 법은 없었다.
그와 우리는 올해 같은 부문에서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미 수상자가 함께 있으면 기운도 받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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