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본래 3일간 진행하기로 했던 촬영을 1주 더 늘리게 되었다. 원래 단역에 불과했던 송우진의 분량을 조역 정도로 바꾼 것이다.
특히 박지혜 작가의 반응이 가장 강렬했다.
“왜 지금껏 이런 재능을 숨기고 있던 거예요? 차기작 쓸 때 무조건 주연급 조연으로 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니지, 이 정도 실력이면 주연도 가능해요. 정말 흥미 없어요?”
“당장은 스케줄 상 확답을 드리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작가님이 연락을 주시면 그때 확인해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 약속한 거예요. 나 무조건 건하 씨 캐릭터를 보고 대본 쓸 거니까. 알았죠?”
박지혜 작가는 내 연기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나 강조하며 말했다.
“리허설도 미쳤고, 본연기도 미쳤어! 그냥 타고난 연기자라니까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에 약간의 광기마저 느꼈다.
“너무 과분한 칭찬인데요.”
“아니요. 오히려 건하 씨가 모르는 거예요. 자신의 가치를! 얼마나 대단한 연기였는지 알아요? 내가 진짜 작가 생활 20년 동안 하면서 이런 연기는 처음 봤어. 희성 씨도 봤잖아.”
“봤습니다.”
구희성도 박지혜의 말에 힘을 더했다.
“왜 그렇게 추천했는지 알겠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같은 소속사 빨대 꽂는 줄 알았지 뭐야.”
“작가님, 저 그런 놈 아닙니다.”
“그럼, 잘 알고 있죠.”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내가 진짜 일정만 여유로웠으면 바로 캐스팅을 했을 텐데…. 너무 아쉽네요.”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박지혜 작가였다.
그녀를 시작으로 설 PD는 물론 함께 연기를 지켜보던 선배 배우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순한 낙하산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겠지.
‘참 솔직하다니까.’
실력을 보여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달라지는 대우.
가수들의 음방 무대에서도, 이런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다들 똑같았다.
실력을 우대하는 연예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짜 아쉽네. 우리 건하 씨 첫 촬영 기념으로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데. 편집 일정도 있고 여러 가지로 바쁘다 보니, 하하하.”
설 PD가 아쉽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단역 연기를 위해 중간에 투입된 아이돌 배우를 위해서 단체 회식이라.
어차피 나를 처음 데리고 올 때는 회식은 생각도 안 했을걸?
아마 그만큼 나를 좋게 보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거다.
굳이 그런 거에 신경 쓰지도 않고.
“다음에 기회가 될 때 함께 하면 되죠.”
“좋아. 그 말 물리기 없다?”
“물론이죠.”
그렇게 첫 촬영이 끝났다.
“어땠어?”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멤버들이 달려들었다.
개인 일정 때문에 찾아오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다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형, 연기하는 거 영상 찍었어? 같이 가는 매니저님께 부탁했어? 나 궁금해 미치겠어.”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아까 작업 끝내고 사무실에 갔는데, 두현이 형이 엄청 좋아하던데.”
모두의 관심이 내게 쏠렸다.
“그냥 단역에서 조연으로 분량이 늘었어. 박지혜 작가님이 좋게 봐 주신 거 같더라.”
“분량이 늘었다고?”
“와…. 그분 깐깐하기로 유명하신 분인데.”
“확실히 건하가 재능이 있네. 노래든 연기든….”
“잘했다.”
다들 흐뭇해하며 한마디씩 건넸다.
“그런데 어떻게 했길래 분량이 늘어난 거야?”
“아마 매니저님이 찍어준 게 여기 있을 텐데….”
나는 촬영을 마치고 매니저에게 따로 받은 연기 영상을 보았다.
구석에서 조용히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모습이었다.
원래는 찍지 말라고 했지만, 구희성의 배려로 아주 짧은 부분만 허락받았다고 들었다.
-김 부장님이 끌릴 수밖에 없는 제안을 제시했는데도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한데요.
“와….”
15초도 안 되는 짧은 연기를 본 멤버들이 멍하니 나와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이 사람이 건하 형이라고? 느낌이 완전히 다른데?”
“제대로 하면 다른 사람이 된다라….”
“표정 진짜 살벌하다.”
잠시 영상을 감상하던 멤버들이 물었다.
“우리 다음엔 촬영장에 놀러 가도 돼?”
“PD님한테 여쭤봐야 하나?”
“희성 선배한테 부탁하면 해주실지도….”
다들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진짜 이럴 때 보면 아직 애들이라는 게 느껴진다니까.
“한번 여쭤볼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곳에 방문하는 경험이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 * *
“표정이 왜 그렇게 좋아?”
“아, 티 났어?”
오랜만에 한진성의 집에 찾아간 구희성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우리 집에 찾아온 걸 보니, 건하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잔뜩 있는 거지?”
“역시 리더, 눈치가 빨라.”
“건하가 오늘 연기를 잘했나 보네.”
“아, 잘했다는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었어.”
“엉? 그 정도야?”
구희성은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윤건하의 맞은편,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건하의 연기를 보았다.
그건 연기라고 하기에는 깊은 몰입이었다.
정말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재벌집 아들이어서 사업가라는 역할에 익숙했던 걸까?
그래.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소름 끼치는 눈빛은 꾸밀 수가 없는 거였어.’
자신을 바라보며 두고 보라는 연기를 했던 건하의 표정을 구희성은 아직도 기억했다.
“형이 저번에 말했지? 건하는 최고의 스타가 될 자질을 갖췄다고.”
“아, 그랬지. 이번에 진짜 잘했나 보네. 얼마나 잘한 거야? 드라마 본방사수 해야 해?”
“꼭 해. 무조건. 건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걸?”
“오랜만이네. 희성이 네가 이렇게 불타는 거.”
“진짜 가슴이 끓는다.”
“건하랑 올리오스 애들이 노래 부를 때는 그렇게 난리 안 쳤잖아.”
“그거야, 애초에 좀 친다고 형이 말해 줬으니까. 그리고 잘 부르기는 하는데, 우리보다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건하는 다르다?”
한진성의 질문에 구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객관적으로 보면 나보다 잘했어. 우리 둘이 함께 찍은 그 신에서만큼은 내가 아니라 건하가 주인공이었다고. 매력적인 빌런이 극에서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단역으로 나올 캐릭터로 주연을 집어 삼켰다고. 이게 무슨 뜻이냐면….”
“네가 예전부터 말해서 알고 있어. 그만큼 무게감이 커진다는 뜻이잖아. 분량도 함께.”
자신의 말을 듣던 한진성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끼는 후배의 발전을 좋아하는 선배의 미소이기도 했지만.
“희성이 네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거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
“옛날 생각?”
“그래. 처음 연기 도전했을 때, 선배들 연기 보면서 딱 이렇게 흥분했었잖아. 최근에는 그런 모습 안 보여줘서 매너리즘에 빠진 건가 싶었는데,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같이 뛰는 동료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빛이기도 했다.
“나중에 TV로 한번 봐야겠다. 얼마나 잘했는지.”
“깜짝 놀랄걸?”
“건하 얘기는 그만하고,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한잔할래? 얼마 전에 좋은 술을 선물로 받아서.”
“나야 좋지.”
구희성에겐 오랜만에 사적인 얘기로 들떴던 하루였다.
* * *
“와….”
내 연기를 구경하겠다고 현장을 찾아온 멤버들이 입을 쩍 벌렸다.
내 촬영분을 마치고 카메라 앵글 밖으로 나가자, 다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건하야, 방금….”
“어땠어?”
“와…. 진짜 대단하다는 말밖에….”
“대박이다.”
“건하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에 재능이 있었네.”
“건하 형, 갑자기 배우로 전향하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팝콘 어디 있어? 이거 팝콘 먹으면서 보고 싶은데.”
호들갑은.
그래도 이렇게 띄워주니까 기분은 좋았다.
골든 콘서트 전까지 연습과 무대 준비로만 바쁠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솔직하게 기분이 좋았다.
기분 전환이 된다고 해야 할까.
무대만 생각했던 머리를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게 좋았다.
“건하 네가 이번에 드라마에 합류한다는 기사도 떴어.”
소속사에서 퍼트린 기사였다.
<미친개 김 부장>의 단역 빌런으로 윤건하가 합류했다는 기사.
커뮤니티 반응은 상반되었다.
-대체 왜 또 아이돌 배우?
-요즘 올리오스 잘 나간다고 시청자 끌려고 하는 거 같은데. 너무 구식 아닌가ㅋㅋ;;
-요즘 아이돌 나온다고 보는 덕들 있나?
└난 봄.
└눈치 챙겨.
아이돌 배우가 드라마에 합류한다는 걸 고깝게 보는 사람들과.
-이거 구희성이 같은 소속사라고 담당 PD한테 추천한 거라던데.
-그만큼 잘함?
-뮤비에서 어색한 건 못 봤으니까. 모델도 몇 번 해봤고.
-연기가 그거랑 같아?
-믿어볼 만할 거 같은데? 구희성도 연기 웬만큼 하고.
-그리고 배역이 잘나가는 기업인이라면서, 뭔가 잘 통하지 않을까? 윤건하도 재벌가 아들이잖아.
그나마 응원하고 지켜보자는 입장.
물론 내 배역 캐스팅이 찰떡 같다는 반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보여준 것이 없어서겠지.
현장 스태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내 실력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현장의 반응도 좋았으니까.
물론 현장의 반응이 대중과 100퍼센트 똑같은 건 아니겠지만.
“7화 편집본 느낌이 아주 좋아. 이번이 마지막 촬영이지?”
현재 승승장구하는 드라마의 헤드인 설승원 PD의 자신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네, 그렇습니다.”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힘내자고.”
“네!”
마지막 신은 끝내 주인공인 김 부장에게 당해 회사의 경영권이 위태로워지는 송우진 대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벌을 받는 모습은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 부분은 독자의 상상력으로 풀어야 한다나.
그것이 서글픈 현실일지, 권선징악의 시원한 결말일지는 독자들이 판단하게끔 만들겠다고.
“원래는 제대로 처벌을 받았다고 주인공의 독백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건하 씨가 연기를 너무 잘해줘서 조금 바꿨죠.”
나야 연기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나는 마지막 연기를 위해 카메라 앞에 다시 섰고.
“이 개새끼들이!!!!”
꾸밈없는 분노를 쏟아내며 테이블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박살 내고 떨어트렸다.
단단하게 조인 넥타이를 억지로 풀어내며 창가를 바라보는 내 뒷모습을 찍는 카메라로 내가 촬영할 마지막 신이 끝났다.
“오케이! 좋았어요!”
* * *
“떴다! 오늘이지? ‘미친개 김 부장’ 7화 나오는 거.”
“건하 오빠 연기 데뷔잖아.”
“무조건 본방사수 해야지.”
올리오스 팬클럽 ‘원스’의 회원인 최유리와 이선영은 TV 앞에 앉았다.
즐겨보던 드라마에 덕질하는 아이돌이 배역으로 참여한다니.
연기를 못해서 어색하면 어쩔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반대로 기대도 품고 있었다.
‘잘했으면 좋겠다.’
정말 잘해서, 저 기라성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돋보일 수 있지 않을까.
그건 팬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기대였다.
그랬기에 그녀들은 TV 앞에 앉았다.
윤건하의 좋은 연기를 기대하며.
“안 나오네.”
“언제 나오는 거야?”
“진짜 한 컷 잠깐 나오고 끝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드라마가 중반을 지나도 윤건하는 나올 기색이 없었다.
슬슬 불안해졌다.
노이즈 마케팅이었나.
7화에 잠깐 한 컷 나오는 걸로 합류했다고 장난한 건 아니겠지?
그러면 당장 소속사랑 해당 기사를 낸 신문사에 항의 글을 써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김 부장님 맞으시죠?”
귀에 익은 목소리.
그리고 내려가는 자동차의 창문.
“꺄아악!”
“나왔다!”
“오빠아악!”
검게 물들인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위로 스타일링한 채로, 정장을 멀끔하게 입은 윤건하의 얼굴이 화면에서 드러났다.
화면 너머에서 보이는 싸늘한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와….”
“저거 뭐야?”
그녀들은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뭔데? 완전 잘하잖아?”
“미쳤다.”
두 사람이 입을 연 건, 윤건하가 나오는 신이 다 끝난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