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나는 눈을 감고 내 역할에 집중했다.
김 부장의 경쟁사 기업인 롤러 무역의 대표, 송우진.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기업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쟁사에게 안 좋은 소문을 언론에 내는 건 물론, 각종 이슈를 만들고, 산업 스파이를 보내며 내부 정보를 파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 말고도 악행이란 악행은 다 해왔던 송우진이었다.
죄책감이 없냐고?
아니, 오히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책임져야 할 롤러 무역의 가족들이 많았으니까.
그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주기 위해선 회사가 더 성장해야 했으니까.
방식이 어떻더라도, 회사를 성장시키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야.’
혹자는 그런 자신을 손가락질하지만, 송우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올라가는 회사 주가를 볼 때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사람이다.
롤러 무역의 대표 송우진은.
다시 눈을 뜬 나는 윤건하가 아닌 송우진이 되어 차에 올라탔다.
“리허설입니다. 분위기만 잡아보죠. 카메라와 오디오도 테스트 들어가겠습니다.”
설 PD의 신호를 마지막으로 세계가 바뀌었다.
촬영장의 카메라와 스태프가 사라지고, 나만의 세계가 펼쳐졌다.
내가 살았던 과거.
악덕 CEO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매사에 냉철하게 행동했었다.
내 사람만 아끼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적으로 간주했다.
그것이 젊은 나이에 CEO로 성공한 비결이었다.
송우진도 근간은 비슷했다.
내 사람을, 나를 성공의 길로 인도하고 싶은 욕망.
그는 그런 욕망이 강하게 부풀려지고, 삐뚤어진 것이다.
시야가 왜곡된다.
주위의 풍경이 변하며.
나는 송우진이 되었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창문을 열었다.
“김 부장님 맞으시죠?”
그저 안부 인사일 뿐인데도 서리가 맺힐 것같이 싸늘한 목소리.
그간 ‘윤건하’가 내왔던 것과는 다른 톤의 소리였다.
나는 지금 김 부장을 찾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근 여러 이슈로 경쟁사에서 유명해진 김 부장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왜 그런 사건 덩어리를 내 편으로 만드냐고?
사건 사고를 이끌고 다니는 사람이 계속 안에서 훼방을 놓는다면, 결국 이득을 보는 건 나니까.
윤건하도 그랬다.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는 것은 유능한 기업인의 필수 덕목이었다.
그것이 어떤 기업이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좋은 장기말을 많이 보유할수록 승패를 좌우할 수 있기에.
“누구십니까?”
김 부장이 묻는다.
의문의 눈초리.
나를 파악하려는 그 시선을 받아냈다.
그래.
다들 저렇게 바뀌곤 하지.
억대의 차에 올라타, 기사의 비호를 받으며 명품 옷을 걸치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는 위압감을 느끼며 물러설 수밖에 없다.
“룰러 무역의 대표, 송우진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았는데. 여기 계셨네요?”
한때 익숙했던 말투로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나를 마주 보는 김 부장과 눈높이를 똑같이 마주한 채로,
나는 차에서 내려 구희성이 연기하는 김 부장의 앞에 섰다.
* * *
송우진을 연기하는 윤건하와 마주 선 구희성은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대사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이름을 소개하는 대사.
그 짧은 대사를 내뱉었을 뿐인데, 이게 아까 그 아이돌 윤건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싸늘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
듣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만드는 시선.
사람을 충분히 후벼팔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 윤건하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가졌다.
정제되었지만, 동시에 야성미가 느껴지는 말투에 구희성은 침을 삼켰다.
자신이 추천했지만, 무서웠다.
이렇게 잘할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으니까.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연기는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던 걸까?
윤건하는 마치 연기가 아닌 실제 겪었던 일인 것마냥 송우진을 연기했다.
완전히 송우진으로 변한 후배의 연기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러다간 내가 잡아먹히겠어.’
집중하자.
아무리 그래도 내가 추천한 후배한테 밀릴 수는 없지.
구희성은 남몰래 주먹을 쥐며 정신을 집중했다.
“싫습니다.”
밑에서부터 짜내듯 뱉은 대사.
고작 리허설에서 이렇게까지 진심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볍게 테스트만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후배가 이렇게 선전 포고를 했으니.
‘나도 받아줘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연기를 하려던 구희성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순간 촬영장의 분위기 역시 들끓었다.
구희성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이 가볍게 이 상황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의 눈이 진지해졌음을.
‘재밌네.’
오랜만에 가슴이 끓어올랐다.
연기에 첫 도전하는 우리 후배 덕분에 말이다.
구희성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끼며 열연을 펼쳤다.
리허설 무대에서 두 사람의 연기 대결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김 부장님이 끌릴 수밖에 없는 제안을 제시했는데도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한데요.”
“관심 없습니다. 애초에 돈 더 벌자고 이런 짓 하는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구희성이 마지막 대사를 마쳤을 때.
“오케이! 컷!”
설 PD의 컷 사인이 들렸다.
PD마저 리허설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수준 높은 연기였다.
구희성은 진땀이 나는 걸 느꼈다.
* * *
“지금 방금 거 어떻게 담겼어?”
오케이 사인을 보낸 설 PD는 카메라 감독과 오디오 감독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리허설이었다 보니, 앞부분 녹화는 못 땄습니다.”
“음향에도 조금 잡음이 많이 섞였어요.”
감독들의 말대로 녹화는 신(scene)의 중간부터 담겼다.
그마저도 영상의 초반엔 어수선한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겼다.
이렇게 좋은 연기를 써먹지 못한다고?
“젠장.”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렇다고 다른 감독들에게 한마디 할 수도 없었다.
넋을 잃은 채 감상한 건 PD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카메라 테스트 때는 내숭이었나?’
무슨 힘숨찐 드라마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실전에서는 더 미친 실력을 보여주는 실전파 배우인 걸지도 모르겠다.
“뭐, 어쩔 수 없죠. 두 사람이 본 촬영에서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설 PD는 현장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낙하산이라 생각하던 질투 어린 눈빛들이 전부 사라지고, 흥미와 선망의 눈빛들이 즐비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를 지닌 건 역시.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두 사람의 연기를 본 박지혜 작가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 모습을 본 설 PD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장난 아니죠?”
“왜 저런 배우가 이제야 나타난 거죠? 미치겠네. 진짜.”
“내가 말했잖아요. 장난 아니라고.”
“와…. 구희성 배우가 추천했다고 했죠?”
“네. 작가님이 아이돌 출신 배우 싫어하는 거 알고 조금 나중에 추천하던데요?”
“내, 내가 뭘 싫어해요. 나 좋아해요. 아이돌 배우.”
“그렇습니까? 구희성 씨가 예전에 같이 하자고 했을 때는….”
“그거야 그때는 배우로서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거절했죠.”
가만히 화장을 고치는 윤건하를 보던 박 작가가 물었다.
“저 친구, 단역으로만 쓰기엔 아깝지 않나요?”
“아깝죠. 하지만 이미 스토리는 다 정해두셨잖습니까. 바꿀 생각도 없으시다고.”
“바꿀 생각은 없죠. 하지만 중간중간에 등장 씬은 늘릴 수 있지 않겠어요?”
박지혜 작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8화에서 10화까지 원고 좀 수정할게요.”
“10화까지 등장시키시려고요? 원래는 8화까지였잖아요.”
“그래야죠. 이렇게 유능한 인재가 들어왔는데 안 쓰고 배겨요?”
그녀는 신이 난 소녀처럼 웃었다.
“배우 본인에게 물어봐야 할걸요? 희성 씨 말로는 이번 역도 엄청 설득했다던데.”
“어떻게든 얘기해보죠. 나 박지혜예요.”
“일단 본 촬영까지 보시고 결정하시죠.”
“좋아요.”
설 PD는 박수를 치며 모두의 주목을 이끌어냈고.
“그럼 바로 본촬영 들어가겠습니다!”
확성기에 입을 대고 외쳤다.
이미 불이 붙은 스태프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본 촬영이 시작되었고.
“오케이!”
리허설 때보다 훨씬 좋은 장면이 만들어졌다.
기가 막혔다.
정말이지 최고였다.
* * *
색다른 기분이었다.
사업가 시절 나와는, 조금 다른 사업가를 연기한다는 것은.
조금은 설레는 기분이었다.
옛날의 나를 잠깐이나마 만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잠깐의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구희성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훌륭한데?”
“괜찮았나요?”
“괜찮았냐고? 최고였어! 진짜 너는 대배우가 될 자질이 있다니까?”
구희성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이걸 다른 멤버들이 봤어야 했는데, 달라진 네 모습에 다들 놀랐을걸?”
내 연기에 만족해하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때, 박지혜 작가가 내게 다가왔다.
“건하 씨, 방금 연기 정말 최고였어요.”
“아, 감사합니다.”
“어디서 연기를 했었나요? 본격적으로 배운 곳이 있나요? 그게 아니라면 개인적으로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나?”
“아뇨. 따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정말? 진짜 재능이네. 아니 오히려 자라났던 환경 덕분일지도 모르겠어. 진짜 재벌가 아들이잖아. 배역이 비슷하니까 어느 정도 연기에 도움이 되었겠지. 음음.”
혼자서 중얼거리며 뭔가 납득하던 박지혜 작가가 내게 물었다.
“혹시 분량이 좀 더 늘어나도 괜찮나요? 희성 씨에게 들었을 때는 연기에 흥미가 없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그랬었는데, 저도 이제 여기저기 활동해야 할 거 같아서요. 뭐든 주면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정말? 그럼 기존에 얘기했던 5컷에서 조금 더 많이 늘어날 거 같은데.”
“얼마나 늘어나죠?”
“조연급으로 늘어날 거예요. 기존에 계약했던 8화가 아니라 10화까지로 생각하고 있어요. 컷도 굉장히 늘어날 거고요.”
“그래도 되나요?”
“네. 제가 누군데요. 박지혜예요.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스케줄 때문에 소속사랑 얘기를 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만, 아마 가능할 거 같습니다.”
“스케줄은 걱정 마요. 우리가 맞춰줄 테니까.”
이런 파격 대우라니.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주위 반응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연기를 해낸 것 같았다.
‘옛 추억만 되짚었던 건데, 반응이 좋네.’
사실 연기…라고 하기엔 민망한 일이었다.
그저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내 과거 모습을 조금 뒤틀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조금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내 반응과는 달리.
[업적 - 의외의 천재성(1)]
[스탯에 표시되지 않은 능력으로 성과를 얻으세요.]
[보상: 25 오픈 마일리지]
시스템은 내게 보상을 얹어줬다.
스탯에 표시되지 않은 능력이라 함은, 연기력일 테지.
‘옆에 1이라고 적혀 있다는 건, 더 큰 보상을 줄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돌발 퀘스트: 의외성의 인정]
[연기로 대중에게 본인의 이름을 각인시키세요.]
[성공 시: 올리오스 인지도 상승, 20 오픈 마일리지]
연기를 조금 더 해도 되는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