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스페인, 마드리드.
11월임에도 낮에는 20도를 웃도는 따뜻한 도시.
내륙 도시지만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이 겨울에도 따스하게 비춰주는 곳.
스페인의 문화와 예술을 이끄는 수도.
마드리드 국제공항에 발을 내딛자, 낯선 타국의 향기가 코에 감돌았다.
한국과는 공기부터 묘하게 달랐기에, 다른 나라에 왔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이곳이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가 있는 스페인입니다.”
김주성 실장이 손을 뻗으며 아직 초가을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도시를 가리켰다.
“김 실장님은 자주 오셨나 봅니다. 많이 익숙해 보이시는데요?”
두현의 물음에 김주성 실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하하, 예전에 업무 차 스페인 쪽으로 출장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내 모델 말고 해외 선수들도 종종 컨택해야 하니까요.”
스페인어가 능숙한 김 실장이 앞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생각보다 우리에 대한 관심이 없네요.”
“아시아권에선 올리오스가 유명하지만, 유럽권에선 활동한 적도 없고 관심도가 그리 높지도 않으니까.”
“일본에 갔을 때도 공항에 사람들이 조금은 있었는데.”
우주가 조금 시무룩한 말투로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 처음 온 거니까 당연하지.”
정민이 그런 우주를 위로하듯 말했다.
한국과 달리,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고 있어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조금 어색하네.”
“반대로 도전 의식이 생기지 않아?”
나는 우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도전 의식?”
“나는 나중에 공항에서 우리를 몰라보고 지나간 사람들 언젠가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후회하게….”
“그래. 이렇게 멋진 대스타를 몰라본 스페인 사람들이 뒤늦게 깨닫고 땅을 치면서 후회하는 거지.”
“그거 좋은 생각이다!”
김한울과 콜라보는 당장 우리를 못 알아보는 유럽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소스가 되어줄 거다.
“자, 그럼 이동합니다.”
나는 GH 엔터에서 우리와 함께 파견을 나온 직원들을 보았다.
해외 출장 관리 및 책임을 맡으며, 새롭게 아이돌 2팀의 팀장이 된 이두현.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의 메이크업을 도와주기 위해 함께 출장을 온 스타일리스트 김예리.
말고도 함께 출장에 동행한 GH 엔터의 직원 2명과 한국에서부터 우리의 가드를 맡아주신 경호원 2명.
GH 직원은 총 6명.
추가로 N-스포츠에서 고용한 경호원과 N-스포츠 현지 직원들까지 함께 움직이다 보니, 한 번에 상당한 인원이 이동했다.
차도 여러 대를 한 번에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이 잠깐 쏠리긴 했는데, 한순간뿐이었다.
조금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약간의 해방감을 느낀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후우, 이서 오빠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내 옆좌석에 앉은 김예리가 핸드폰으로 마드리드의 광장을 카메라에 담으며 말했다.
이서 오빠라.
황이서 프로듀서겠지?
그 얘기를 들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예리 누나.”
“응?”
“그, 프로듀서님의 어디가 좋아서 먼저 고백하신 거예요? 황 프로님 매력이 없다는 게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요.”
나는 실례되는 질문일까 싶어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내가 말 안 했었나?”
“네.”
“그냥, 남성미 넘치잖아. 빽빽한 수염도 그렇고 생각할 때 미간 좁히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수염 깎으면 나름 잘 생겼어.”
“그런가요?”
“너희 아이돌 옆에 있으니까 머슴처럼 보이는 거지. 오빠만 따로 보면 잘생겼어.”
“진짜 좋아하시나 보네요.”
말하는 김예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웃는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엄청 좋아하지. 진짜 너무 답답해서 내가 먼저 고백할 정도였다니까?”
“보기 좋네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봐? 건하 너도 연애하고 싶어?”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이돌이 연애는 무슨, 생각도 없어요.”
“그렇긴 하지. 그럼 갑자기 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때가 있잖아요.”
“건하도 많이 변했네. 예전에는 그런 관심 없어 보였는데.”
“그랬나요?”
“그럼. 매일 아이돌로 성공한다는 것밖에 안 보이는 사람 같았거든.”
김예리의 말에 부정할 순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이 그리 많이 들지는 않았었다.
그나마 관심이 있었던 건 같은 멤버들의 삶이 전부였다.
그것도 전부 공략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
하지만 이제 단순히 이 세계가 게임 속 세계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엔딩이 제시한 보상은 원래 세계로의 회귀. 그렇다면 진엔딩을 달성하지 못 한다면, 그래미상을 타지 못한다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말이다.
그땐 나 역시 이 세계에 녹아들어야지 않을까?
‘멤버들하고만 알고 살 수는 없지.’
더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아이돌 일도 그렇고 주변 인간관계도 그렇고.”
“뭔가 더 성장했구나.”
그렇게 얘기를 몇 마디 하고 나니, 우리가 머물 숙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김주성 실장이 우리에게 다가와 앞으로 일정을 짧게 설명했다.
“현지 촬영팀이랑 내일 오전에 컨택해서 CF용 촬영 짧게 들어가고, 오후에 있는 레알 마드리드와 레알 베티스의 경기를 직관할 겁니다. 직관이 끝나면 강한울 씨와 합동 인터뷰 들어갈 거고, 모레 오전엔 프로필 사진까지 촬영할 예정입니다.”
“모레에도 함께하나요? 내일 오후에만 짧게 만나는 거 아니었습니까?”
“강한울 씨 쪽에서 구단에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같이 만나보고 싶은 모양이에요.”
김주성 실장의 말에, 뒤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우와, 와아….”
호진이 입을 가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다가 기절하겠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오다니.”
호진이는 사인을 받기 위해 강한울의 국가대표 유니폼도 챙겨왔다고 했다.
성덕의 얼굴 그 자체였다.
헤실헤실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건하야, 한울 님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의 안호진입니다. 너무 딱딱한가? 아니면 진짜 잘하시더라고요! 팬입니다! 이럼 너무 부담스럽나?”
“일단 자연스럽게 인사하면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아?”
“그렇겠지? 그럼 만나자마자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 실례겠지?”
“그건 한울 선수 만나고 얘기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래. 진정하자. 후우, 후우.”
호진이 유별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이 흥분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들 축구를 좋아하는 남자들이었다.
그런 남자들이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꼽히는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 직관은 물론이고, 한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망원경도 챙겨왔어.”
“우리 좌석 그래도 1층이라고 하던데.”
“1층? 진짜?”
“구단이나 선수 관계자들한테 내주는 자리래.”
“우와….”
앞으로 있을 강한울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김주성 실장이 다가왔다.
“오늘 머무실 호텔입니다. 각자 1인 1실이고, 스페인에 체류하실 3일간 불편하신 게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3일.
우리가 스페인에서 체류할 일정이었다.
비행기로 왔다갔다 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5일.
이 먼 곳, 스페인까지 오면서 고작 3일밖에 있지 못한다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었지만, 바쁜 11월의 일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 김주성은 이곳에 있는 동안은 최대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N-스포츠 역시 이번 출장에 힘을 잔뜩 줬다는 게 느껴졌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호텔 데스크에서 익숙하게 체크인을 하며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에게 선물한 번역 스킬 덕분에 멤버들 모두 영어에 능숙해졌다.
해외 일정을 시작한 이후부터 쭈욱 외국어 회화를 공부했던 멤버들이었다.
아직 현지인처럼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대화에는 문제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우주가 데스크의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키를 받았다.
“스페인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호진이 축구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면 우주는 스페인의 음식에 진심이었다.
각자 여행을 온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애초에 N-스포츠에서도 그러기를 원했다.
이미 한 번 작업했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대우였다.
CF 촬영과 인터뷰 등의 공적인 일정의 스케쥴만 지키면, 그 외의 시간은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각방 쓰는 건 편하긴 한데, 뭔가 쓸쓸할 거 같지 않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우주가 물었다.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그렇긴 하지만….”
“오랜만에 푹 쉬어.”
“이따 저녁에 놀러가도 돼?”
우주가 가방을 흔들었다.
부스럭 부스럭.
봉지 안에서 과자가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스페인 요리 먹고, 간식으로 한국 과자 먹으면 딱일 것 같지 않아?”
“술은 안 된다.”
“알지! 내일 당장 촬영이 있는데. 헤헤. 가도 되지?”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처럼 설레는 얼굴로 물었다.
학창 시절을 대부분 연습생으로 보냈으니, 이런 시간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걸 거다.
“그래. 성훈이 형이랑 호진이, 그리고 정민이한테도 물어봐.”
“물론이지!”
“대신 잠은 각자 방에서 자는 거다.”
“응!”
1명이 쓰기엔 넓은 방이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마드리드의 전경이 보이는 위치에 자리잡은 욕조였다.
앉아서 목욕을 하며 마드리드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욕조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와, 이런 방을 개인당 하나씩 줬다고?”
기업의 보스로서 업무차 많은 호텔을 다녔던 내가 봤을 때도 훌륭한 수준의 방이었다.
최고급, VVIP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VIP룸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방이었다.
“3명이서도 쓸 수 있겠는데?”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형! 그거 봤어? 여기 욕조 대박이야!”
우주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이미 잔뜩 감탄한 얼굴이었다.
일본에서도 태국에서도 호텔을 경험했던 우주였지만, 욕조에서 마드리드의 전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얼굴이었다.
“와, 여기도 엄청나네.”
우주는 우리 방의 욕조를 보며 다시 감탄했다.
“이따가 목욕하면서 보면 기절하겠다. 형, 안 그래?”
눈을 빛내는 우주를 보니 왠지 놀려주고 싶었다.
“여기서 목욕하면 안이 다 보인다?”
“정말?”
“아니, 뻥이야.”
“형!”
“속았을 때 표정이 귀엽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과자는 챙겨왔어?”
“물론이지!”
곧바로 정민과 호진, 성훈이까지 내 방에 모였다.
“애들아, 마침 여기 다 모여 있었구나?”
두현이 방으로 찾아왔다.
“회의 끝나고 김 실장님이 요 근처에 괜찮은 하몽을 파는 맛집을 소개시켜 준다고 하니까 이따 한번 가보자고.”
“하몽이요?”
“그래.”
“스페인 전통 음식도 먹을 수 있나요?”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말을 마친 이두현은 우주의 손에 들린 과자 봉지를 보며 작게 웃었다.
“놀고 싶은 마음 나도 잘 아니까 간섭하지는 않을 텐데, 내일 오전에 스케줄 있다는 것만 명심해라. 술은 절대 마시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럼 김 실장님이랑 일정에 관련해서 회의 하고 올 테니까, 이따가 보자.”
스페인에서 받은 기분 좋은 휴일을 보냈다.
스페인의 전통 음식은 맛있었고, 숙소에서 멤버들과 떠드는 시간은 즐거웠으며, 욕조에서 본 마드리드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끝내주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