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레프픽션의 트레블리가 눈에 자꾸 밟혔다.
이미 데뷔했음은 물론이고, 더 높은 곳에서 놀았어야 할 애들이 여전히 연습생 신분이라는 것이 말이다.
물론 연습생 기간이 짧을 수도 있었다.
우리와 같은 나이라고는 하지만, 연습생으로 들어온 게 마침 늦었을 수도 있다.
4명이 전부 다 말이다.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황이서에게 레프픽션에 대해서 물었다.
“레프픽션?”
“네. 거기에 트레블리라는 연습생 그룹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아시는 거 있나 해서요.”
“흠, 트레블리?”
“예, 레프픽션에서 곧 데뷔를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얘기는 들은 적 있다. 원래 계획은 작년 데뷔였는데, 자금 문제 때문에 투자를 받느라 계속 미뤄지고 있는 걸로 알아.”
“자금 문제 말입니까?”
“그래. 나도 정확한 건 모르는데, 그냥 내부 사정이 좀 있었다고 들었어. 그런데 갑자기 걔들은 왜?”
황이서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함께 따라온 성훈이 대신했다.
“이번에 그 친구들이 뮤직에어 대기실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아마 건하가 좋게 본 거 같습니다.”
“아, 그래?”
“예, 생각보다 재능이 있어 보이는 애들이라서요. 관심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런 트레블리의 4명 멤버들 모두에게 관심이 있었다.
성공할 수 있는 원석들이다.
제대로 연마한다면, 지금의 우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 그런 애들.
그런 재능을 품고 있는 아이들이었기에, 탐이 났다.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소속사 때문에 재능이 썩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후배들 좋게 보는 건 좋지만, 너무 신경 쓰지는 마라. 결국 다른 소속사 애들이니, 끝에 가서는 서로 경쟁해야 하는 애들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관심을 갖는 겁니다.”
“뭐?”
내 말에 황이서가 되물었다.
“대적자가 없이 홀로 승승장구하면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어요. 저는 경쟁자가 단순히 저를 방해하는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쟁자는 러닝메이트예요.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이 제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죠.”
“…진짜 걔들을 좋게 보고 있구나.”
“네. 마음 같아선 제가 키워보고 싶을 정도예요.”
물론, 내가 아이돌을 키운다는 건 지극히 이른 얘기였다.
고작 데뷔 2년 차, 아니 연차로만 2년이지 실제로는 데뷔한 지 1년도 못 채웠다.
아이돌을 키운다면, 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전문가들이 맡아야만 했다.
황이서에게 말한, 내가 키우겠다는 말은 그 뜻이었다.
재능 있는 새싹을 키울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 믿고 맡기는 것.
‘자금 문제라고 했지.’
문득 얼마 전에 정산을 받으면서 새로 얻었던 입금 시스템이 떠올랐다.
[입금 시스템]
[‘윤건하’가 번 돈을 이용해 포인트를 추가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마침 나에게는 좋은 투자처가 필요했다.
생각이 맞물려가며, 지금 가진 4억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원석을 보석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보석이 돈을 벌어다 준다면?
앞으로 그들의 성장이 내 자극제가 됨과 동시에, 우리 팀은 물론이고 내 능력치도 올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줄 거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문제는 나 개인이 투자하는 것만으로 트레블리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할 수 있다는 거였다.
투자에 대한 조건으로 내가 찾은 전문가의 투입을 걸었을 때, 레프픽션이 거절해 버리면 의미가 없으니까.
약간의 설득이 필요할 거다.
그 부분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테니, 외부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좋은 아이디어이긴 했으나, 지금은 깊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이어지는 황이서의 말에 집중했다.
“지금은 너희 성적에 집중해. 후배를 위하고 걔들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명심해. 좋은 선배는 능력 있는 선배라는 거. 그리고, 너희 아직 1년도 못 채웠다.”
“네,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야생의 정글이나 다름없는 이곳 연예계에서는 실력이 전부라는 것.
몇 번이고 봐왔잖은가.
음악 방송 대기실에서도, 예능을 찍기 위해 나간 촬영장에서도, 광고를 촬영하는 와중에도.
실력에 따라, 유명세에 따라 우리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신인 때와 지금.
너무나 다른 관계자들의 태도에 몇 번이고 깨닫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애들 관심 때문에 저희 일에 소홀해지면 안 되죠. 그럴 생각도 없고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건하 네가 자기 관리를 소홀하게 할 애는 아니니까.”
황이서가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미 그 정도의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단지 말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랬기에 그도 안심하고 더는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아무튼 다들 고생 많았다. 음방 1등도 했고, 이제 진짜 안심해도 되겠네.”
손을 비비던 황이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들 이번 컴백 활동 끝나고 해외 투어 있는 거 알지? 텀은 좀 있겠지만, 준비하느라 정신 없을 거니까 각오해.”
“네!”
“해외 투어까지 끝나면 긴 휴가를 줄 생각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자.”
“알겠습니다.”
“우리도 계속해서 현지 팀이랑 컨택하면서 준비하고 있으니까 다들 잘해보자고.”
“네!”
그렇게 성공적인 하루가 또 지났다.
* * *
여러모로 바쁜 하루였다.
여전히 연예계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직 무대도 많이 있었고, 시기가 시기다 보니, 외부 행사도 끊임없이 많았다.
예능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급하게 받고, 활동 사이의 짬을 이용해 촬영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내내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쪽잠을 자야 겨우 버틸 정도로 강행군 일정이었다.
컴백 이후에 무척이나 바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힘들었다.
그렇게 활동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컴백 후 3주가 지났다.
“건하 씨,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오늘 마지막 스케줄인 예능 출연.
지상파에서 토요일 오후 예능을 담당하고 있는 유명 프로그램, <뷰티 런웨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스타들이 모델이 되어 런웨이를 걷는 예능이었다.
제한시간 안에 디자이너들이 옷을 만드는 과정, 그것을 입는 모델과 디자이너의 화합과 대립, 그 과정을 통해 무대 위에 오른 연예인의 모습까지.
시청률이 많이 높진 않지만, 이 스토리가 가진 매력 덕분에 나름대로 두꺼운 마니아층을 가진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4~6%의 시청률을 주기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동시간대에 경쟁 상대가 인기 예능인 <나홀로 집에>라는 것까지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선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왜 우주가 아니고 나를 섭외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예능엔 우주가 더 낫지 않나 싶었는데.
황이서 말을 빌리자면.
“로비 막스 때 포토존에서 찍힌 네 모습, 그리고 여러 화보에서 찍은 건하 사진을 PD가 감격 깊게 봤다고 하더라. 침을 튀기면서 찬양하던데?”
그래서 우주 대신 내가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뷰티 런웨이>의 마지막 단계.
런웨이 위에 올라가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면 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마지막 차례.
이제 이것만 끝나면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있고, 우승자를 정한 뒤에 엔딩 멘트를 마치고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뷰티 런웨이>가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이었다.
그러니 이것만 끝나면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지.
그리고 오늘은 윤택수 회장과의 약속도 있었다.
그의 아내이자, ‘윤건하’의 어머니의 무덤을 함께 가자는 약속.
내기에서 이긴 내가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그에게 제안하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약간은 긴장이 되었다.
“후우.”
무대 때문은 아니었다.
윤택수 회장과의 대화는 언제나 가슴을 졸이게 했다.
한 기업의 총수라는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내가 이전 생에 경험하지 못했던 아버지란 존재의 위압감 때문일 것이다.
“건하 씨, 올라가시면 됩니다!”
무대 위로 올라가라는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나는 백스테이지에서 런웨이로 발을 내딛었다.
스포트라이트가 눈이 부셨다.
런웨이를 중심으로 나를 찍는 수많은 방송용 카메라들, 외부에서 초청한 심사위원, 그리고 객석을 채운 관객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이제 이런 시선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뛰는 그런 자리였다.
정면을 노려보며 자세를 바로잡은 채로 모델 워킹을 이어갔다.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고 있는 동안, 속성으로 공부한 워킹을 최대한 유지하며 앞으로 걸었다.
약간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워킹.
그리고 이게 <뷰티 런웨이>의 매력이라고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스타들이 보여주는 노력과, 그 속에 약간의 허당미.
편집을 통해 완성되었을 때는 나름대로 괜찮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심사위원을 향해 강렬한 눈빛을 보낸 나는 런웨이를 한 바퀴 돌며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최대한 뽐냈다.
내 할 일을 마친 나는 다시금 백스테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30초도 안 되는 짧은 등장이었다.
하지만 이 30초의 무대를 위해 무대 아래에서 디자이너와 협력하며 의견을 나눈 수 시간이 있기에, 이 30초는 짧지만 그 이상으로 임팩트가 있었다.
내가 무대 안으로 들어가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점수판에 심사위원들의 점수가 올라갔다.
성적은 조금은 아쉽게도 2등이었다.
* * *
“가자.”
숙소로 돌아가자 윤 회장의 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기사만 보낼 줄 알았는데, 직접 최 실장과 함께 오다니.
의외였다.
“오셨습니까?”
“네 엄마가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가야지.”
그는 검은색 양복에 검은색 넥타이를 맨 채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도 전부 염색을 한 듯, 머리카락도 검은색이었다.
나는 그런 윤 회장의 옆에 앉았다.
백금발에 화려한 아이돌 의상을 한 아들과 검은색 정장을 입은 아버지.
참, 어울리지 않은 그림이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윤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 역시 따로 할 말이 없었기에 그의 옆에서 입을 다물었다.
서로 어색한 부자간의 침묵이 가라앉은 차 안에선 나지막한 엔진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5분 뒤면 도착합니다, 회장님.”
최 실장의 말에 그제야 윤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예.”
“빨리도 도착했군.”
서울 근교에 있는 작은 동산.
그곳에 ‘윤건하’의 어머니가 묻힌 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윤택수 회장과 처음으로 ‘윤건하’의 어머니가 묻힌 묘를 찾았다.
“약속을 지켰더구나.”
“예. 저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서요.”
“그렇게 기업을 이끄는 게 싫은 게냐?”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아이돌이 좋습니다, 지금은.”
내 말에 윤 회장이 돌아봤다.
“다음에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게냐?”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내가 진엔딩을 보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을 이룬 ‘윤건하’가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내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는다면….
‘적어도 그룹을 이끌진 않을 거 같습니다.’
이 말은 꾹 삼켰다.
“이왕이면 그 마음이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창밖만을 바라보던 윤 회장이 그제야 나를 보았다.
나를 마주 보는 윤 회장은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 앨범으로 음원 차트와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했습니다.]
[연계 퀘스트: 윤 회장과 내기를 완료했습니다.]
[윤 회장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보상: 아들을 믿는 아버지]
[약속했던 조건을 모두 들어줍니다.]
“내리자꾸나. 네 엄마가 기다린다. 자세한 건 네 엄마를 만나고 얘기하도록 하지.”
묘지에 도착한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