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142화 (142/236)

<제142화>

이창종 부회장.

솔직히 과거의 윤건하와 알고 있는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예상했어야 했는데.’

지독한 라이벌 관계의 두 그룹.

그리고 회사 대표의 아들.

한 명은 차기 재민그룹의 후계자라고 불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현재 그룹 총재의 외동아들이었다.

한 번, 아니 여러 번 만나 면식이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어야 했다.

‘나도 물러졌네.’

필드에서 떠난 지 한참 됐다.

거의 1년간 아이돌 활동을 하면서 사업가의 감이 많이 죽은 모양이었다.

옛날이었다면, 진작 계산이 됐을 텐데.

‘올리오스의 인지도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만 너무 집중했어.’

끊임없이 머리가 돌아갔다.

이미 해버린 실수,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은 상황을 무마해서 넘기는 게 최우선.

나는 웃으며 이창종 부회장의 손을 맞잡았다.

이창종 부회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마찬가지로 나 역시 힘을 주었다.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내 인사에 이창종 부회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오랜만에 봤다고 거리 두기야? 부회장님이라니, 조금 섭섭한데?”

“하하하, 이런 자리에서 부회장님한테 함부로 말할 순 없죠.”

어떤 사이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무턱대고 친한 척을 할 수는 없었다.

핑계도 괜찮다.

로비 막스의 패션쇼.

아이돌과 기업의 부회장이라는 전혀 다른 입장 덕분에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예전에는 형, 형 하면서 자주 따라다녔는데 조금 섭섭하네. 몇 년 못 보긴 했지만 말이야.”

나를 보는 이창종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뭐, 어색할 만도 하겠네. 마지막으로 본 게 네가 중학교 입학할 때였으니까.”

나를 보는 눈빛, 살짝 올라가는 눈썹, 손에 들어가는 힘과 말투, 그리고 중학교 입학할 때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말까지.

‘특별하게 친했던 사이는 아닌 거 아닌데.’

이창종 부회장과 관계.

추측하건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마 지금 그가 내게 건네는 말들은 전부 카메라 앞에서 쓰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용 멘트.

“아이돌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진짜 잘생겨졌네. 예전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짓과 내게 말하는 멘트.

내 눈에는 이 모든 게 다 계산된 행동처럼 보였다.

나를 이용해 친숙한 기업인 이미지라도 만들 생각인 건가.

“힘들지 않았어? 도와달라고 얘기했으면 나도 손을 썼을 텐데. 하하하.”

재벌가 외동아들이지만, 다른 오너 패밀리와는 다르게 순수한 노력과 실력으로 자리를 따낸 아이돌 윤건하.

인간적인 모습과 아이돌로서 성숙한 모습으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나를 이용해 친숙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진짜 친했다면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진 않았을 테니까.

오래된 친구와 만날 때는 대화 주제도 달랐다.

보통은 옛날을 추억하며, 잠시 추억 여행을 하곤 한다.

함께했던 추억을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거다. 하지만 이창종은 달랐다.

잠깐의 안부 인사가 끝난 뒤엔 이미지를 위한 형식적인 인사가 전부였다.

덕분에 우리가 그리 친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부회장님도 더 멋있어지셨네요. 부회장이라니, 이제 일선에서 뛰시는 건가요?”

“하하하, 그런 셈이지.”

“저는 회사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서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거든요.”

“그래? 회장님께선 별말씀 없으셨어?”

“전혀 없었어요. 설사 그럴 마음이 있으시다고 해도, 저랑은 안 어울리는 자리예요.”

“아쉽네. 너와는 나중에 회사 대표 대 대표로 만나고 싶었는데.”

빈말이다.

입술을 핥는 혀와 오른쪽 위로 살짝 올라가는 시선.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중에라도 생각 있으면 연락해. 내가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도울 테니까.”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이후에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다.

내게는 다행히도 형식적인 대화가 오갔다.

이창종은 황룡그룹의 후계 구도를 떠보고 싶은 마음도 보였지만, 그런 어설픈 술수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이창종과 살짝 거리를 두며, 끝까지 묘한 거리감을 유지했다.

미안하지만,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굳이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서로 이 정도만 합시다.

이렇게 웃으며 넘어가는 게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 같은 필드에서 뛸 사람도 아닌데, 라이벌 관계를 가질 필요도 전혀 없고.

씹는 거 좋아하는 기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부회장님.”

“그래. 다음부터는 옛날처럼 편하게 형님이라고 불러. 어색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창종은 자리로 돌아갔고.

후우.

나는 그가 멀어진 걸 확인하며 한숨을 돌렸다.

긴장한 탓에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혹시 들키지 않을까 잔뜩 힘이 들어갔다.

윤택수 회장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긴 했는데.

무뚝뚝한 아버지와 삭막한 아들과는 달리, 기억에도 없는 타인은 어떤 관계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힘들었다.

‘얘는 친한 사람이 없었던 건가.’

정말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목표 하나만을 갖고 달려온 사람처럼, 타인과의 관계도 그리 깊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이러다 언젠가 원래의 윤건하와 친한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사람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상대가 위화감을 가진다면 어찌해야 하나 잠시 상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방법이 없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어색해졌다는 핑계, 오늘처럼 충분히 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우와, 진짜 건하 재벌집 자식이 맞는구나. 재민그룹 부회장님이랑 형동생 하는 사이라니.”

“갑자기 형이랑 거리감 느껴진다.”

멤버들이 나와 이창종 부회장을 보며 감탄했다.

재벌가, 오너 패밀리와 친하게 얘기하는 내 모습에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하긴, 연예인만큼 보기 힘든 게 오너 패밀리 아니겠어.

놀랄 만도 했다.

멤버들 말고 주위의 시선 역시 전부 내게 모였다.

“저 사람이 황룡그룹 회장 아들 윤건하?”

“회사 안 물려받고 아이돌을 한다는데요?”

“어머, 왜 그랬대. 좋은 길 놔두고.”

“근데 잘생기긴 했네요. 아이돌을 선택할 만하네.”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아이돌 윤건하보단 황룡 그룹의 외동아들 윤건하로 더 유명한 듯했다.

자리가 자리여서 그런 걸지도.

이곳은 로비 막스의 패션쇼장.

대부분 로비 막스의 VVIP이거나 유명한 스타, 셀럽이기에 갤러리로 초대받은 이들이었다.

아이돌 윤건하보단, 황룡그룹에 더 눈에 가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이게 대중의 시선일지도.’

아직은 황룡그룹의 이름값을 넘어서려면 한참 정진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열심히 하자.’

그래서 황룡그룹 총재의 외동아들이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돌로서 먼저 불리도록 말이다.

그때였다.

“아, 여기 있었네!”

몬스터즈 선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사람은 많이 만났어?”

한진성, 카이, 최도현, 이진규, 구희성.

다들 패셔니스타라 그런가,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패션으로 자신을 꾸미고 있었다.

“어지러워요. 이런 자리는 참 어색하네요.”

“형, 방금 보셨어요? 건하가 이창종 부회장님이랑 형동생 하는 사이래요.”

정민과 우주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얘기하는 거 보고 왔어. 나는 건하가 조금 어려워하는 걸로 보이던데.”

한진성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허물없이 지낼 사이는 아니죠.”

“확실히 부회장님이면 어려운 사람이겠다.”

몬스터즈 선배들과 얘기하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잔뜩 힘준 탓에 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손이 조금 진정되었다.

“참, 라이언 애들도 왔다던데. 봤어?”

“라이언 선배들이요?”

“걔들이 너희 엄청 칭찬하더라. 예전에 같이 인터뷰했는데 엄청 즐거웠다고…. 마침 저기 오네.”

카이가 가리킨 곳을 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테오 엔터의 최정상 인기 아이돌 라이언의 멤버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잘 지냈어? 여기서 다 보네.”

지석을 제외한 세 명. 브리온, 로건, 승현이 웃으며 다가왔다.

인터뷰 이후 처음 만난 선배들이었지만, 이창종 때처럼 불편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가 단지 내 기억에 없는 과거의 인물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 특유의 사람을 고르는 눈빛, 그 눈빛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피곤하거든.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니까.

오랜만에 만난 연예계 선배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에, 구희성이 내 어깨를 톡톡 쳤다.

“건하야.”

“네, 선배님.”

“괜찮은 대본 들어왔는데 한번 읽어볼래?”

아.

또다.

화보 촬영 이후, 종종 내게 배우를 도전해 보라며 대본을 읽게 하려는 구희성이었다.

투어 중에도 가끔 대기실에 찾아와서 일부러 내 옆에서 대본을 읽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마치 나보고 연기를 하라고 시위하는 듯이 말이다.

“괜찮아요.”

“한 번만 읽어봐. 나쁘지 않아. 너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걸? 당장 녹화하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가 제일 난처하다.

구희성 본인이 의욕이 너무 강해 보이는 게.

돌려서 거절하기가 참 어려웠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앨범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렇…구나.”

눈에 띄게 침울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고민했을 때, 한진성이 말해줬다.

“저거 다 연기야. 넘어가지 마.”

연기력을 이런 곳에 쓰다니, 무서운 사람.

선배들과 수다를 떨며 근황 토크를 하다 보니, 어느새 패션쇼가 시작할 때가 다 되었다.

“그런데 그냥 패션쇼를 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는 우주의 말에 한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쇼가 끝나고 따로 신청하면 구매도 가능해. 물론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거라 가격이 좀 있을 거야.”

“아아.”

“건하 너는 뭐 살 생각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옷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김예리 스타일리스트가 있으니,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이전 인생에서도 대부분 정장만 입고 다녔으니까.

우리 자리는 패션쇼 런웨이와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자리였다.

런웨이의 코앞이라 옷 주름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건너편엔 이창종 부회장이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잠시 고개로 인사하는 것이 전부였다.

패션쇼가 시작됐다.

화려한 옷을 갖춰 입은 모델들이 런웨이를 걸었다.

키가 큰 모델들이 걸을 때마다 플래시가 터졌다.

플래시는 모델에게 향할 때가 있었고, 그걸 보는 우리에게 향할 때가 있었다.

그걸 의식하지 않았다.

의식하는 순간, 사진의 주인이 패션쇼의 모델들이 아닌 우리에게 잡혀 버리니까.

지금 이곳은 런웨이 위에 있는 모델들이 주인공인 무대였다.

그런 무대에서 우리가 주목받는 건, 무대 아래에서 관객이 무대에 난입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옷 진짜 멋지다.”

“방금 모델이 지은 표정, 우리도 써볼 만하지 않아?”

“성훈이 형 평소 표정이랑 똑같던데?”

우리끼리 가볍게 귓속말을 하며 모델들의 자세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옷보다 모델들의 자세, 걸음걸이, 표정과 시선 처리 등, 나중에 우리가 무대에서 쓸법한 기술을 새로 배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30분이 넘는 패션쇼가 끝이 나고.

“안녕하세요. 로비 막스의 디자이너 리옹 브르누입니다.”

우리는 로비 막스의 패션 디자이너와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다들 듣던 대로 잘생겼네요.”

우리를 보는 리옹 브르누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뭐지? 이 눈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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