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하루 종일 생각해봤다.
조금 더 포인트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새로 얻은 S급 스킬 대기만성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외모에 포인트를 몰아 쓰는 것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금방 반려했다.
이유야 간단하다.
‘아직은 SS급까지 올릴 필요가 없어.’
국내 활동만 생각하면 S급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스탯을 SS급으로 올리는 건 해외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소모되는 포인트를 생각하면, 시기상조야.
당장 멤버들의 능력치를 올리는 것도 일단 보류했다.
내 스탯을 올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당장은 추가로 투자할 정도로 부족하진 않았다.
평균 능력치도 충분히 높고, 각자 능력치가 특화되어 있기에, 다른 스탯을 올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멤버 간 케미 효과로 인해 부족한 부분은 서로가 보완해주고 있는 상황이라.
‘이것도 무조건 해야 할 정도로 급하진 않아.’
이렇게 소거법으로 하나하나 지웠다.
효율성 때문에,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아서, 이미 높은 스탯을 가지고 있기에.
멤버들의 스탯을 올려주는 것도, 당장 스탯을 올리는 것도 조금 뒤로 미뤘다.
그렇게 하나하나 지우고 나니.
“당장은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아도 되겠네.”
스탯 관련 아이디어는 전부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그렇다고 포인트를 쟁여두고 안 쓸 수는 없었다.
‘좋은 게 없나.’
그러다 문득, 핸드폰에 새로 뜬 윤건하의 통장 잔고가 눈에 들어왔다.
-[Web발신] @월@일 *******윤건하 입금 216,300원 잔액 328,128,530원
스킬 뽑기, 포인트 분배 등을 통해 차곡차곡 입금되었던 돈이 벌써 3억이나 되어 통장에 쌓여 있었다.
원래 세계와 비교하면 아직 한참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3억이라면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돈, 돈이라….’
지금까지는 아이돌 활동과 포인트 분배, 스킬 성장 같은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잊고 있었지만.
이 돈, 나라면 조금 더 크게 불릴 수 있었다.
돈 때문에 아이돌을 하는 건 아니다.
지금 내게 아이돌 활동은 돈 이상의 가치를 위한 것이다.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무대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기도 했다. 멤버들과 함께 무대를 준비하고, 서는 게 좋았으니까.
그래.
지금 내겐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돈을 불릴 생각을 하느냐고?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언제까지 GH의 도움을 받을 순 없어.’
GH 엔터가 최고의 파트너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속사의 도움이 만능은 아니었다.
GH 엔터도 돕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중에 가장 쉽게 생길 수 있는 문제가 바로 돈이었다.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준비했던 무대가 깨지거나,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돈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꽤나 많은 일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윤택수 회장과 내기에서 이기면, 회장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거?
그것도 보험 중 하나지.
‘타인에게 기대기만 해선 중요한 시기에 발목을 잡힌다.’
내 주머니를 키워둘 필요가 있었다.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서 말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와 춤만 불러서는 미래에 있을 진엔딩, 그래미 수상을 손에 쥐지 못할 거다.
세계의 정점을 찍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대 위에 오르는 것, 그 이상이 필요했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최고의 노래를 만드는 건 기본이었다.
그게 제일 중요하겠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도 필요했다.
좋은 노래를 알릴 수 있는 홍보도 필요할 것이고, 많은 무대도 필요했다.
미국 투어를 다닐 미래의 나를 상상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제일 큰 무대라고 불리는 무대 중의 무대.
모든 스타가 평생 가고 싶어 하는 무대.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
저 공연을 뛰기 위해 미국의 내로라하는 유명 가수들도 사비를 탈탈 털어 참가한다고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수들한테 출연료가 지급되지 않으니까.
무대 연출에서부터 공연 구성에 필요한 모든 비용까지 가수 본인이 부담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유명 가수들이 수십, 수백억을 아낌없이 이 무대에 투자한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슈퍼볼 무대는 최고의 가수들만 설 수 있는 꿈의 무대니까.
해당 무대에 올라갔던 가수들은 빌보드 차트를 우습게 씹어먹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렇듯 돈에 목을 맬 정도로 부족하지는 않지만, 최고로 가는 길을 걷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 3억이 초기 투자 비용이라고 생각한다면….’
상당한 돈이었다.
과거의 윤건하는 5천만 원을 들고 시작했다.
‘스킬을 하나 더 구한다면 1억 원에 가까운 돈이 또 입금될 거고.’
최대 4억.
시드 머니로는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스킬을 뽑아야 하는데.’
오늘 픽업 스킬이 뭐였더라.
나는 스킬 뽑기 아이콘을 클릭했다.
[픽업 스킬: SS급 스킬 – 번역]
[효과 1: 여러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효과 2: 해당 스킬은 추가 재화 소모 없이 멤버에게 복사가 가능합니다.]
빙고.
드디어 떴다.
번역 스킬.
그중에서도 SS급 번역.
내가 이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번역 스킬은 단계별로 총 5개의 등급으로 분류된다.
C등급부터 SS등급까지.
S급까지는 번역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C급은 가장 기초적인 회화를 능숙하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S급은 고급 어휘는 물론 프레젠테이션까지 가능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외국어를 할 수 있게 도와줬다. 심지어 본토 발음으로 노래는 물론 랩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SS급 번역이 아니면 스킬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S급까지는 복사 기능이 없으니까.
SS급 스킬 하나로 최소 S급 스킬 5개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메리트인데.
한 명만 가지면 다른 멤버들에게 전부 나눠줄 수 있다는 것.
팀업 게임에서 이보다 좋은 스킬은 없었다.
노래, 춤, 예능, 외모.
아이돌에게 필요한 주요 능력치를 보정해주는 스킬이 아님에도.
무대 위에서 특별한 추가 효과를 붙여주는 스킬이 아님에도.
성격이나 습관 같은, 긍정적인 요소를 더해주는 스킬이 아님에도.
번역이라는 스킬이 SS급의 레어도에 어울리는 이유가 바로 복사 효과였다.
때문에 해외 활동을 시작하는 중후반부에선 꼭 필요한 스킬이었다.
‘흐름이 좋아.’
반드시 얻어야 하는 스킬이 때마침 나왔다.
조금은 이르지만 픽업이 아니라면 얻기가 몹시 힘들기에, 나는 남은 557만 포인트 중 300만 포인트를 모두 사용해 번역 스킬을 구매했다.
역시나 뽑기에서는 뜨지 않았다.
빌어먹을 뽑기 운.
언제쯤 천장을 안 치고 먹을 수 있을까.
돈으로 찍어눌러서 놓치는 것도 없고 환전되는 것도 있었지만,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플레이어일 때, 가끔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비틱글을 보면 화가 많이 났거든.
-이거 떴는데 좋은 건가요?
-처음 해서 잘 모르는데 스킬 이렇게 떴어요. 괜찮나요?
-무과금 뉴비 초반 재화로 SS급 아이돌 2명 뽑았는데 이륙해도 되겠죠?
저 비틱들 사이에서 버티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모를 거다.
이젠 비틱을 할 유저들도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Web발신] @월@일 *******윤건하 입금 179,500원 잔액 406,756,710원
-[Web발신] @월@일 *******윤건하 입금 382,700원 잔액 407,139,410원
4억.
시드 머니로 총 4억이 모였다.
‘좋아.’
어떤 방법으로 어디에 투자할 건지는 천천히 생각해보자.
고민은 신중하게, 결정은 빠르게.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지에 대한 고민은 오래 걸려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이게 돈이 되겠다 싶을 때는 최대한 빠르게 행동하는 것.
이게 내가 돈을 투자할 때 애용하는 방법이었다.
‘번역은 바로 나한테 사용하고….’
그렇게 얻은 SS급 번역 스킬을 스킬창에 새로 장착했다.
연습실에 도착하면 다른 멤버들에게도 줄 생각이었다.
재화 소모 없이 달아줄 수 있는 최고의 스킬이니까.
스킬을 뽑고 새로 달아주니 벌써 새벽이 되어 하늘이 슬슬 밝아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자.’
내일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쉬어야 하니까.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투어 마지막 무대가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 *
“늦는군.”
윤택수 회장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짜증을 냈다.
미간에 그어진 깊은 주름이 지금 그가 몹시 언짢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최 실장은 그런 자신의 보스를 보며 생각했다.
뭐 때문에 저리 기분이 나쁘신 건지 빨리 파악하는 것이 수행원의 기본 자질이었다.
‘최근 사업 계약 중에 딜레이되는 건 없었는데.’
그룹에서 시행하는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잘 흘러가고 있었다.
늦어지는 것도 없었다.
정치권에서 오간 회담이나, 그들이 보내주기로 한 공문서가 늦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쟁사에 비해 황룡그룹의 여러 계열사가 밀리는 것도 아니고.
‘회장님께서 언짢으실 이유가 전혀 없는데.’
황룡그룹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올해 상반기의 매출은 작년과 비교하면 20%나 성장했고, 해외 성적도 해외 굴지의 기업들과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뭐가 문제신 걸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딱히 결론은 나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고 계신가 봅니다.”
최 실장은 감히 윤 회장에게 물었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회장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의 표정이 다소 밝았기에, 감히 무례를 저질렀다.
“기다리고 있냐고? 물론이지. 몇 달이나 기다리고 있었네.”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흠….”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윤택수 회장이 최 실장을 힐끗 보았다.
최 실장은 조금 긴장했다.
무엇일까.
윤 회장님을 몇 달이나 기다리게 만드는 건.
‘황 건설이 중동 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추가 사업의 안건을 기다리시는 건가?’
‘아니면 최근 의료업계에서 있었던 이슈에 대한 대응?’
‘그게 아니라면 이번 분기 황룡전자의 매출 부진?’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 회장의 얼굴을 본 순간, 최 실장은 묻지 말걸 하는 후회를 했다.
윤 회장이 최측근인 최 실장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 별거 아닌 일이었다면, 자신의 무능을 제 입으로 증명한 꼴이었다.
회장의 비서가 그마저도 모른다는 뜻 아닌가.
‘나도 나이를 먹었나.’
이런 실수를 하다니.
“흐음.”
한숨을 내쉰 윤 회장이 입을 열었다.
“올리오스 다음 앨범을 기다리고 있다네.”
“예?”
“아직도 안 나와. 윤건하 이놈, 분명히 나랑 내기까지 했으면서 이렇게 늦장을 부리다니. 내 사무실에 찾아가서 한마디 해야지, 안 되겠어.”
“올리…오스 앨범 말씀이십니까?”
“그래. 벌써 5월이 다 되어가는데 다음 앨범이 안 나오고 있잖으냐. 싱글 앨범이든 EP 앨범이든 뭐라도 하나 내야지. 에잉, 쯔쯧.”
윤택수 회장이 혀를 찼다.
그 모습에 최 실장은 남몰래 가슴을 쓸었다.
회장님의 가정사였다면, 자신이 모를 법도 했다.
윤 회장이나 윤건하 모두 자기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걸 보면 두 사람이 영락없는 부자지간이긴 했다.
“저번에 거신 내기 때문이시지요?”
“그래. 그놈이 1등을 하겠다고 자신 있어 하길래 받아줬더니, 아직도 소식이 없다니….”
최 실장은 웃으며 윤 회장의 테이블 뒤편에 걸린 커다란 액자를 보았다.
회장실 정중앙,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올리오스의 첫 정규 앨범, 의 앨범 자켓이 걸려 있었다.
아들이 자랑스러우신 모양이었다.
“곧 나올 겁니다.”
“그래야 할 거야. 더 많이 늦으면 그땐 진짜 찾아가서 한 소리 할 생각이거든.”
툴툴거리던 윤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다음 스케줄은 어디지?”
“황룡전자 사옥에서 임원 회의가 곧 있을 예정입니다.”
“가지. 다들 기다리고 있겠군.”
윤 회장의 뒤를 따르며 최 실장은 생각했다.
철혈이라고 불리는 윤택수 회장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