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 봄이 찾아왔다.
3월.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이제 슬슬 좀 더 얇게 입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날씨였다.
이 말은 즉.
“다음 주면 투어 시작이다.”
GH 엔터 투어가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었다.
이제 일주일.
사무실은 소란스러웠다.
직원들의 눈가에 점점 다크서클이 짙어졌고, 황이서가 사무실에 찾아오지 않는 날도 많아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바빠졌다.
투어에 맞춰 본격적으로 몸도 만들고, 컨디션 관리에, 투어용으로 편곡한 노래를 녹음하고 새롭게 안무도 연습했다.
심지어 이번 투어에 맞춰 구상한 이벤트와 무대 등장신을 위해 특별한 영상을 녹화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게 다녔다.
“이번에 리프트도 사용할 거라 동선을 많이 신경 써야 할 거다. 무대마다 연출 방식이 다를 거라 많이 바쁠 거다.”
공연에 오르는 것만이 일은 아니었다.
오르기 전에 무대를 어떻게 짜고, 어디서 어디까지 움직일 건지도 전부 다 계산되어야만 했다.
일전의 연말 콘서트 때야 우리가 참가하는 곡은 두 곡밖에 되지 않아 알아야 할 것이 적었지만, 이번엔 정반대였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네.’
황이서가 스케치한 무대의 설계도를 가리키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움직여야 하는지를 체크해 주기까지 했다.
입장과 퇴장을 포함한 무대 동선, 노래 방식, 우리 파트의 타이밍, 전부 MR로 치는지, 무대 뒤 음향은 어떤 식으로 들어가는지, 곡 사이에 멘트는 어떻게 칠 건지 등.
계획을 공유하고 타임라인을 짜는 것도 일이었다.
“이제 투어까지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실감이 되었다.
거기다가.
[돌발퀘스트: GH 투어 (1)]
[무대에서 S 랭크를 받으세요.]
[성공 시: 5 오픈 마일리지]
[돌발퀘스트: GH 투어 (2)]
[투어 중 무대에서 5번의 S 랭크를 받으세요.]
[성공 시: 12 오픈 마일리지]
[돌발퀘스트: GH 투어 (3)]
[투어 중 무대에서 8번의 S 랭크를 받으세요.]
[성공 시: 20 오픈 마일리지, 팬들의 관심도 상승]
퀘스트가 새로 떴다.
두 달간 총 8번 있는 GH 투어 무대에서 몇 번이나 S 랭크를 받느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방식이었다.
‘모든 무대에서 S등급의 퀄리티를 만들 수 있으면 저기 적힌 보상을 전부 받을 수 있어.’
투어도 중요한 포인트 수급 수단 중 하나였다.
무사히 끝이 나기만 한다면 유일하게 A급으로 올리지 못한 예능 스탯까지 올릴 수 있었다.
F급 스킬이자 내 성장의 족쇄인 ‘평범함’이 스탯의 상승으로 없앨 수 있는지, 이번 투어가 끝나면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없앨 수만 있으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생기는 거다.
투어를 앞둔 연습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면.
“성훈이 형, 괜찮아?”
우주의 질문에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괜찮아. 어제 잠을 많이 못 자서.”
“너무 무리하지 마. 지금 우리 무대 준비도 엄청 잘 됐으니까.”
“미안하다. 저번에 그렇게 말해 놓고선.”
성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했던 과거의 발언 때문이었을까.
성훈은 지금 누구보다 연습에 열정적으로 매진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자신을 조금씩 부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형, 목 관리 잘해야 해. 무대에선 형이 메인이니까.”
내 말에 성훈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알고 있어. 걱정은 안 해도 돼. 어제 조금 늦게 자서 피곤한 것뿐이야. 하루 푹 자면 나아질 거야.”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사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유성훈]
[나이: 22]
[노래: A+]
[춤: B+]
[외모: B+]
[예능: D+]
[스킬: 고집(A), 폭포수 같은 고음(A), 관중의 환호(S)]
성훈이 갖고 있는 스킬인 고집.
우직한 결단력과 본인의 목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는 있으나, 간혹 그 반발로 자기 몸을 해치는 스킬이었다.
분명 저 고집이 문제를 일으킬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면 어디서든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는 고집이 터진 걸 텐데.’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한 건, 더 좋은 무대를 생각하고 기획하느라 그런 걸 거다.
시작부터 이러면 정말 힘들 텐데.
3월 말이면 <명곡 배틀>의 녹화가 끝난다지만, 그때까지 가는 과정이 고될 거다.
“형, 정말 힘들면 말해. 자양강장제라도 뽑아서 줄게.”
성훈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한다면.
‘자양강장제라도 뽑아서 도와줘야지.’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최대의 도움이었다.
내가 말한 자양강장제는 <마이 아이돌>에서 체력을 보조해주는 쏠쏠한 스킬이었다.
필수까지는 아니지만, 체력이 약한 아이돌 한정으로는 1티어로 여겨지는 스킬.
[자양강장제(C)]
[효과: 체력을 올려줍니다. 쉽게 피로해지지 않습니다. 회복 속도가 빨라집니다.]
“알았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성훈이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름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뭐, 나중에 힘들어하면 말없이 넣어주면 되겠지.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습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갔다.
피곤한 하루의 끝.
다들 거실과 방에 축 늘어져 숨만 쉬었다.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면 이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겠지.
“으으…. 피곤해.”
우주가 우는 소리를 냈다.
멤버 전원이 그런 상태였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
너무 피곤하면 잠조차도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다들 진이 빠져서 축 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정 때문에 바쁘게 연습하고 돌아다니는데 몸 관리를 위해 식단까지 관리하고 있었다.
쓰는 건 있는데 들어오는 게 없으니, 힘이 날 리가.
그래서 평소보다 더 늘어진 상태였다.
성훈이는 더할 테고.
‘뭐라도 몰래 사서 먹일까?’
마스크 쓰고 몰래 갔다 오면 어떻게든 될 텐데.
매니저인 두현이도 우리를 믿어서 굳이 감시는 하지 않았다.
‘지금 갔다 오면 될 거 같은데.’
그때였다.
딩동!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지?”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애들아! 형 왔어!”
몬스터즈 한진성의 목소리였다.
“진성이 형이다!”
“무슨 일이시지? 몬스터즈 선배님들도 바쁘실 때 아닌가?”
그나마 기운이 남은 내가 가장 먼저 나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한진성의 양손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진성이 형, 그거 뭐예요?”
“간식. 너희 식단 관리한다고 쫄쫄 굶고 있을 거 같아서 근처에서 사 왔지.”
한진성이 사 온 건 치킨이었다.
양념 한 마리, 후라이드 한 마리 총 두 마리의 치킨.
치킨 냄새가 순식간에 숙소를 가득 채웠다.
맛있는 냄새에 멤버들의 얼굴이 하나둘 문으로 향했다.
마치 땅속에 숨어 있던 두더지들이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말이다.
본능적으로 치킨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애들의 눈이 한진성의 손에 들린 치킨에 향했다.
“우와, 치킨이다.”
“형, 고마워요!”
“이거 먹어도 되나요? 당장 다음 주가 투어인데.”
“이럴 때 많이 먹어야 해. 너희 그러다가 진짜 쓰러진다?”
호진의 걱정스러운 말에 한진성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마 먼저 겪어본 적이 있으니 지금 우리가 어떤 게 힘든지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거지.
“이서 형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먹자. 남자 다섯이서 이거 먹는다고 티 안 나.”
진성이 안으로 들어오자 우주가 테이블을 세팅하고, 호진이가 그릇을 가지고 왔다. 걱정하던 성훈도 컵을 들고 왔고, 나와 진성은 치킨 상자를 열었다.
오랜만에 맡는 치킨 냄새는 기가 막혔다.
“와.”
우주가 예능식 리액션을 멈추질 못했다.
“우주 표정 보니까, 지금 치킨 인서트 따야겠네.”
내 말에 진성이 크게 웃었다.
“너희 방송인 다 됐구나? 하하하하!”
이거 먹었다가 아랫배에 군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잠시 접어뒀다.
우리는 각자 치킨 조각을 하나씩 들고 먹었다.
진성은 저녁을 먹고 왔다면서 거절했다.
“너희 먹으라고 갖고 온 거야. 얼마 되지는 않지만.”
“충분하죠!”
“탄산은 제로로 가지고 오긴 했는데…. 많이 먹어도 될지 모르겠네.”
“넵!”
우리가 먹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진성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투어는 이번이 처음이지?”
“네.”
“많이 힘들 거야. 처음이라 체력에도 무리가 많이 갈 거고. 특히 성훈이는 죽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 거다.”
장난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 사뭇 진지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동안엔 다른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자. 안 그러면 못 버틸 수도 있어. 우리도 처음에 투어 다녔을 때, 진짜 차에서 기절하듯 잠들었거든.”
선배의 경험이 담긴 조언.
그 한마디 한마디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아, 그리고 기 PD님이랑 같이 하지? 너희 투어 과정 영상 찍는 거 말이야.”
“네. 같이 찍어요.”
“기 PD님이라면 차에도 카메라를 설치할 거야. 자는 건 좋지만 거기서 괜한 얘기는 하지 마. 입을 조심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저희 말 하나하나가 전부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것도요.”
성훈의 대답에 진성이 웃었다.
“그런 게 찍혀도 기 PD님이 몰래 넣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지.”
“투어는 아이돌 활동의 꽃이라는데, 혹시 저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
입에 닭 다리를 한가득 넣은 우주가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특별한 건 없어. 그냥 버티는 거지.”
“…….”
무척이나 현실적인 조언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체력이 될 때까지 버티다 보면 쉴 수 있는 거야. 어쩔 수 없어. 너희는 스타야. 무대 위에서 빛나는 스타. 팬들은 너희를 보러 왔고, 너희는 팬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니까.”
“그렇죠.”
“하지만 동시에 너희 몸도 살펴야지. 너희가 다치면 누구보다 상처받을 사람도 팬이니까.”
한진성의 말엔 뼈가 있었다.
팬들은 우리가 다치면 우리보다 더 상처를 입을 사람들이라는 것.
“명심할게요.”
내 말에 진성이 등을 두드렸다.
“너희가 못 할 거라는 걱정은 안 해.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할까 봐 그게 걱정이야.”
한발 먼저 앞서 나간 선배의 진지한 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성훈의 얼굴이 유독 진지해졌다.
“자, 진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왠지 신입사원들 노는 데 끼어든 부장님 같네. 하하하!”
다시 분위기를 환기하는 한진성의 말을 우주가 받아쳤다.
“선배님, 몬스터즈는 이번 무대에서 이벤트 같은 거 준비하셨나요? 프로듀서님이 잘 안 알려 주시더라고요.”
“이벤트? 준비하긴 했는데, 비밀이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치킨 회식을 마쳤다.
* * *
“부산에 있는 팬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보여줄 준비는 됐지?”
조수석에 탄 황이서가 우리를 보며 외쳤다.
“넵!”
“자신감 좋네. 하하핫! 애들아, 이번 투어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로듀서님!”
우리는 차를 타고 첫 투어가 있는 부산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