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122화 (122/236)

<제122화>

황이서는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벌써 30분째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종민 씨, 저희도 최대한 도와드리고 싶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올해는 몬스터즈와 올리오스 위주로 투어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분명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번 투어에서는 저를….”

“올해엔 단독 콘서트를 열기 위해 지원을 드린다고 했지. 투어에 핵심으로 넣겠다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계약 위반입니다!”

이종민을 보는 황이서의 얼굴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용납할 수 없어요!”

“하아….”

벽에 대고 얘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천천히 돌아보도록 하죠. 3년 전, 저희 GH 엔터는 당시 소속사가 없는 종민 씨와 계약을 했습니다.”

“예. 그랬었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점도,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 3년 동안 매년 1번씩 앨범도 내셨습니다. 정규 앨범 두 개와 EP 앨범 하나로, 이 또한 계약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다만 예능을 비롯한 방송 출연도 계약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언제나 출현을 거부하시지 않습니까?”

“…….”

황이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올리오스가 투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불만이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올리오스는 데뷔 후 지금까지 활동에 가린 것이 없었고 덕분에 뚜렷한 성과도 나왔습니다.”

“…….”

“저희도 물론 종민 씨가 잘 되었으면 합니다. 종민 씨가 음악에 진심을 가지고 대하시기 때문에 다른 활동에 눈을 돌리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도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계약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은 거고요. 하지만 현 시점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해 봤을 때는, 그런 이유로 올리오스가 조금 더 위인 것도 사실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종민이 씨익씨익 거리며 분해했지만, 이 이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황이서는 제법 돌려서 말하고 있었지만, 말의 의미는 뚜렷했다. 출연을 가려먹은 결과, 이종민의 가능성은 올리오스의 가능성보다 낮았다. 그리고 가능성이 더 높은 곳에 투자하는 것이 기업이다.

이건 기업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종민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이렇게 따지러 온 건, 그 역시 그만큼 급하다는 뜻일 테지.

이제는 40줄을 훌쩍 넘겼다.

그럼에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데뷔 초에 불렀던 ‘숲길에서’뿐.

가수 활동의 끝이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이렇게 들이박은 걸 거다.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뿐.

“그래도 이종민 씨의 비중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최대한 좋은 스케쥴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황이서가 소속 가수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종민은 말이 없었다.

“그럼, 이번 투어의 큰 줄기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로 알면 되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갈 뿐이었다.

더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도 안 걸 거다.

밖으로 나가는 이종민의 뒷모습을 보며 황이서는 머리를 눌렀다.

‘가수팀한테 한소리 좀 해야겠네.’

소속 가수의 컨트롤을 제대로 못 해 불만이 쌓이게 하고, 이런 식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건 그들이 업무를 유기했단 뜻이니까.

“하아.”

이왕이면 소속된 가수들한테 최대한 다양하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다. 아무리 균등하게 하고 싶다지만, 더 잘하는 애들에게 시선이 가고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더 이익이 되니까.

기업은 자선 사업체가 아니다.

이익을 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들 악착같이 일하고 버티는 거고.

이종민 개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프로듀서님?”

올리오스 애들이 사무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아, 그게. 여쭤볼 게….”

“…봤구나?”

황이서는 우물쭈물하는 우주의 대답을 보고 단번에 간파해 냈다.

다섯 명은 일제히 몸을 움찔 하고는 쪼르르 안으로 들어와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었다.

“본 건 어쩔 수 없다만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마. 알았어?”

“프로듀서님, 방금 이종민 선배님께서….”

“너희가 신경 쓸 게 아냐.”

“하지만….”

우주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죄책감이라도 갖고 있는 걸까.

“이종민 선배님을 조금이라도 도와….”

“거기까지. 우주야, 거기까지만 말해. 거듭 말하지만 이건 너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황이서는 우주를 가리키며 경고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배려는 오히려 선배 가수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야.”

착한 마음씨를 갖는 건 좋은데, 이건 아니다.

올리오스에게도 이종민에게도 GH에도 좋지 않은 제안이다.

“절대로 상대를 동정하지 마.”

“예, 알겠습니다.”

우주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지만, 황이서는 한마디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종민이 그를 찾아온 것도 자신의 실력에 비해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에 분노해서 찾아온 거다.

실력에 맞는 인정을 받기 위해 찾아온 거지, 동정을 받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닐 거다.

“너희는 무대에서 어떻게 빛날지만 집중해.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투어 일정은 그대로 갈 거야. 그러니 연습 빡세게 하고.”

“네!”

힘차게 외친 올리오스 멤버들이 전부 밖으로 나갔다.

“…저렇게 착하기만 하면 안 되는데.”

황이서는 올리오스가 나간 자리를 보며 작게 되뇌었다.

* * *

‘칼같이 잘랐네.’

우주가 이종민 선배를 돕자는 얘기를 할 때 황이서의 반응을 봤다.

그는 절대 안 된다는 듯 우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자기가 곤란해질지언정, 소속 연예인을 이용해서 뭔가를 꾸밀 사람은 아니라는 걸.

황이서에게 소속 연예인은 동업자였다.

한순간 쓰고 사라질 소모품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종민에게도 단호하게 대한 것이다.

황이서의 뚜렷한 주관이 좋았다.

“그런데 왜 안 된다고 하신 걸까?”

우주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조금은 서운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선배님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이종민 선배님이 잘되면 소속사도 좋고, 우리는 든든한 선배님이 생겨서 더 좋은 거 아니야?”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물어보는 우주였다.

선배를 돕겠다는 말, 그거 진심이었구나.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 우주다웠다.

“우주야.”

“응?”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게 오히려 소속사나 이종민 선배한테 부담으로 다가갈 수도 있어.”

“왜?”

“후배들의 자리를 경력이랑 이름값으로 뺏으려고 했다고 몰매를 맞을 수도 있지. 소속사는 그걸 방관했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건 우리가 말을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12년이 넘는 경력을 가진 선배님이 실제 데뷔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신인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걸 좋게 생각하실까? 대중은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음….”

우주는 어렵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렵다. 진짜 어려워. 좋은 의도로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그게 전부 좋게 전해질 수는 없는 거구나.”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니까.”

아마 우리의 도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일종의 농락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연예계는 실력주의의 정글이었다.

실력이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스타성이 밀린다면 가차 없이 버리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선뜻 받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랬기에, 타인을 돕는 건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우리를 밀어주고 믿어준 황 프로님의 선택이 맞았다는 걸 이번 투어에서 보여주는 거야.”

최고의 컨디션으로 투어를 맞이해야겠지.

그러니 더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았지?”

“응. 알았어.”

이종민 문제는 황이서가 알아서 처리할 거다.

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

* * *

시간은 흘렀고, 늦겨울이 지나 슬슬 봄의 새싹이 피어오르는 계절이 왔다.

이제 본격적인 투어의 시작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우리가 스포일러 라이브 방송을 연 뒤로 각 투어 일정별로 출연하는 스타들의 명단이 나오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홍보도 들어갔다.

유명 인터넷 예매 사이트에 우리와 몬스터즈 사진이 GH 투어라는 이름으로 크게 박혀 있었다.

말고도 여러 GH 엔터의 연예인들이 함께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유명한 가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까지 GH 투어를 몬스터즈 투어라고 말했던 이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없었다면?

이 메인 배너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몬스터즈 멤버들의 사진만 담겨 있었겠지.

‘이종민이 왜 그렇게 비참해했는지도 알 거 같고.’

다른 GH 엔터의 연예인들은 사실상 몬스터즈와 함께 오는 부속품 취급을 받았을 테니까.

아니, 더 심했을 수도 있다.

다른 연예인들 때문에 몬스터즈를 볼 시간이 줄었다며 짜증을 내는 반응도 분명 있었겠지.

소외당하는 연예인만큼 비참한 게 없다.

그게 저번 이종민이 황이서를 찾아온 이유였을 거다.

이번 투어에서 메인 자리를 받으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테니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일 테니까.

나는 이종민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보다 중요한 게 많지 않은가.

우리는 이번 투어에 사용할 MR 녹음을 위해 작업실을 찾았다.

기존 MR 파일도 있지만, 투어에 맞춰 약간의 편곡을 했다고 들었다.

그에 맞는 녹음을 새로 한다고 했다.

“우선 성훈 씨부터 녹음 들어갈게요.”

이번 편곡을 담당한 PD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훈이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기대되네요. 올리오스 라이브를 직접 듣는 건 처음이거든요.”

카메라를 든 기재율 PD는 설레는 표정이었다.

“악보는 아까 다 봤죠? 준비되면 말해주세요. 그럼 바로 비트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헤드셋을 쓰고 마이크 앞에 선 성훈이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에 <명곡 배틀>에도 나간다고 했죠?”

“네, 맞아요.”

“제일 바쁘겠네. 목 관리도 필요할 거고…. 흠, 스토리 나오는 거 같은데.”

중얼거리던 기 PD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떠오르시는 게 있나 보네요.”

“하하, 들었나요?”

“제가 귀가 좀 밝아서요.”

“특별한 건 아니고, 두 개의 다른 무대에서 보여주는 성훈 군의 모습을 잘 조합하면 멋진 그림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참, 건하 군은 성훈 군의 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성훈 형의 노래요?”

“예.”

“흠…. 잘 부른다고 생각해요. 고음도 높고 음역대도 넓은 데다가 팍 지르는 목소리가 듣기도 좋지 않나요? 이보다 좋은 메인 보컬은 없을 겁니다.”

“신뢰가 느껴지는 말이네요.”

“물론이죠.”

흥미로운 얼굴로 내 말을 듣던 기 PD가 입을 열었다.

“제가 2주 정도 올리오스를 따라다니면서 느낀 건데, 멤버 간에 유대감이 상당히 깊던데요?”

“그렇습니까?”

“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고, 거기다가 각자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게 눈에 띄더라고요. 성공한 이유를 알 거 같달까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상 잘 나올 거예요. TV 밖 아이돌의 비하인드 느낌으로 아주 잘 나왔거든요.”

사실 카메라가 돈다는 걸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

투어 준비에 바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재율 PD의 적응력이 대단했기에.

마치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눈에 띄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촬영을 했다.

그 덕분에 꾸미지 않은 솔직한 모습이 찍혔을 거다.

그때였다.

-♪~♬♩♬~.

부스에서 성훈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 동시에 귀를 뚫는 청아한 고음까지.

기 PD가 감탄하며 카메라를 들었다.

영상을 찍느라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성훈의 노래에 흠뻑 빠졌다는 걸.

잘 부르죠?

이 친구가 우리 메인 보컬입니다.

성훈의 노래가 끝날 즈음, 문이 열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우리는 모두 문을 바라봤다.

“어? 올리오스 후배들 있었네.”

작업실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종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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