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촬영일이 언제래?”
“3월 마지막 주 금요일.”
잠깐만.
“그때면 투어 중 아니야?”
“맞아.”
“형, 괜찮겠어? 투어 때문에 지방 내려갔다가 녹화 때문에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괜찮아. 그 정도 견딜 체력은 있으니까.”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일정을 지금까지 다들 견뎌왔잖아. 나만 편하게 지낼 수는 없지.”
성훈의 얼굴이 우주와 정민에게 향했다.
“우주랑 정민이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형이 돼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지. <명곡 배틀>에 나가는 건 분명 우리한테 좋은 일이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우주, 정민이와는 다른 문제이긴 했다.
무엇보다 장거리 이동이 적지 않을 거다. 장거리 이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괜찮으려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이러다 뭔 일 터질 거 같은데.
워낙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성훈이었다.
이번에 무리한 스케줄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녹화 날에만 가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응. 3월 초부터 사전 녹화가 있다고 했어. 편곡한 걸 연습하는 과정을 녹화할 거야.”
“한두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거네.”
“그렇지.”
성훈의 고생길이 눈에 보였다.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건, 스킬 뽑기로 얻었던 S급 스킬 ‘관중의 환호’를 유성훈에게 줬다는 사실이었다.
<명곡 배틀> 역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경연을 하는 프로그램.
‘관중의 환호’는 무대에서 빛을 발하는 특성이었다.
투어를 대비해서 얻었던 스킬인데, 이게 <명곡 배틀>에서도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적어도 무대에서 저는 일은 없겠지.’
남은 건 성훈이 스스로 컨디션 조절을 잘 하는 것.
“경연 전에 목 관리 잘 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
“알았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우리 메인 보컬의 목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한 마디 더했다.
나머지는 성훈의 몫.
걱정은 되지만, 그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었다.
가끔 정도가 과해져서 그렇지 자기 몸관리는 우리 중 누구보다 잘하는 친구였으니까.
“날계란이라도 사줄까? 모과차가 목에 좋다고 하던데. 꿀 타서 먹으면 괜찮을걸?”
“…아저씨.”
“왜? 나름대로 걱정돼서 해주는 말인데.”
사람의 정성에 아저씨라니.
비록 선택지가 살짝 올드하긴 하지만 말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전통 있는 방법들이라고.
사업가 시절, 유용하게 사용했던 비법들인데.
선조의 지혜를 알아봐주지 못하다니.
억울하네.
* * *
투어 준비는 차근차근 이어졌다.
홍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일정표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출연자 리스트와 일정은 변동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사실상 확정이었다.
추운 겨울이 거의 지나가고, 날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이제 수면 양말을 신지 않아도 발이 시리지 않을 정도는 됐다.
선선한 아침 공기에 잠에서 깨어나 방을 나서자, 거실에서 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꼴이 좀 그렇죠? 흐흐. 아침 일찍 일어났어요. 오늘 X-라이브에선 멤버들의 아침 먹방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X-라이브를 튼 우주가 핸드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하 우주하이라는 뜻.
-여기 숙소인가?
-이 시간에 방송을 다 하네ㅠㅠ
-7시면 우주 얼굴 보기 충분한 시간이지.
“어제 밤늦게까지 연습하다가 이제 일어났어요. 다들 연습에 한창이거든요.”
맞다.
오늘 X-라이브 있다고 했지?
우주가 아침 라이브를 한다고 들었다.
거기서 투어에 대한 간단한 스포일러를 한다고도 했다.
우리 첫 무대가 3월 중순 주말에 있는 부산 백스코라고 했으니.
아마 그걸 오픈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 아침 메뉴는 그래놀라 시리얼이랑 샐러드입니다.”
우주가 카메라로 오늘의 아침 식단을 보여줬다.
정말 맛없어 보이는 건강식.
브로콜리에 양배추, 피망, 사이사이 보이는 고구마까지.
우주가 동영상을 찍는 재능이 없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맛없어 보이는 메뉴였다.
그래도 의외로 먹을 만했다.
정민의 특제 드레싱을 뿌리면 샐러드는 꽤 괜찮았다.
그래놀라 시리얼이야 뭐 우유를 담아 마시면 먹을 만했다.
아쉬운 건 양이 형편없이 적다는 거지.
-너무 적게 먹는 거 아니예요?
-ㅠㅠ많이 먹어야 힘낼 텐데.
-역시 아이돌 식단 관리 엄청 빡세게 하는구나.
나는 그런 우주에게 다가갔다.
“라이브 중이야?”
“어, 건하 형 일어났어?”
“방금. 일찍 일어났네.”
“시청자분들한테 인사해. 오늘 우리 아침 먹방을 봐주실 분들이야.”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제 막 일어나서요. 얼굴을 다 드러내긴 조금 부끄럽네요. 하하핫.”
어색한 웃음과 함께 카메라 귀퉁이에 빼꼼 나왔다.
-윤하!
-쌩얼도 멋있어요.
-목소리 잠긴 거 봐ㅋㅋㅋ
-듣기 좋다. 왠지 졸린 건 기분 탓인가.
“금방 씻고 나올게요.”
서둘러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세수를 마치고 오자, 성훈과 호진도 일어나 비척비척 부엌에서 각자 아침을 꺼내고 있었다.
호진은 그래놀라를 우유 대신 요거트에 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우주가 놀라며 말했다.
“그거 정민이 형 거 아니야?”
“이거 내 거 맞을걸. 나도 요거트 냉장고에 넣었어.”
“그래?”
“그런데 그렇게 요거트에 말아 먹는 거 맛있어?”
“맛있어. 우유보다 소화도 잘되고.”
그리고 호진이 수저를 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우주가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형, 나도 한 입만.”
호진이 우주를 멀뚱하게 바라봤다.
“먹고 싶어?”
“응, 얼마나 맛있길래 저렇게 매번 챙겨 먹나 싶어서.”
“…알았어. 대신 조금만 먹어.”
“그럼 그럼. 알았어!”
우주가 요거트에 담긴 그래놀라를 한 숟갈 퍼먹었다.
“오? 괜찮네? 여러분들 이거 진짜 괜찮아요. 와, 맛있다. 솔직히 맛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요거트에 시리얼 타 먹는 거 제품으로도 있어요.
-맞아. 마트에서도 팔고 편의점에서도 팔아요.
“진짜요? 이거 팔아요? 형, 그거 보고 먹은 거야?”
“응….”
“나만 몰랐어? 으으.”
우주가 메모장에 새롭게 뭔가를 적었다.
-그래놀라 요거트.
-짱 맛있었음!
“요즘 제가 이렇게 메모를 하고 다니거든요.”
우주가 시청자들을 향해 메모를 보여줬다.
지역별 맛집이 빼곡하게 적힌 메모장이었다.
“나중에 성공하면 지역 여기저기 다니면서 맛집 탐방 다닐 거예요. 거기에 제 사인 남기는 게 버킷리스트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구에 맛집 많아요. 중화 비빔밥이랑 막창 거리에서 파는 곱창 막창이 기가 막혀요.
-광주에도 맛집 많아요. 나주 목포에 제가 아는 맛집 알려드릴게요.
-우주 형, 부산에 오시면 풀코스로 대접해 드릴게요!
…….
시청자들이 지역의 맛집을 끊임없이 얘기했다.
“아, 부산! 얘기 나온 김에 말하는 건데, 저희 조만간 부산 내려가요.”
-부산에는 왜요?
-휴가인가요?
-설마.
“눈치채신 분들도 계신 거 같은데, 저희 올리오스가 부산에 갑니다. 이유는….”
장난꾸러기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움직이던 우주가 씨익 웃었다.
“비밀이에요! 아실 분들은 아실 거라 믿어요!”
‘방송 잘하네.’
호진이를 통해서 음식 버킷리스트를 말하고, 자연스럽게 지역 맛집을 어필하면서 부산이라는 키워드를 보자마자, 그대로 받아치는 기술.
진짜 흐름이 막힘이 없었다.
우주의 카메라가 우리에게 향했다.
“부산에서 봐요.”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호진이를 따라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말아먹던 성훈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흔들었다.
“아침 맛있게 드세요. 아침을 먹어야 건강을 챙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숟가락을 먹었다.
“참, 너는 뭐에 말아먹을래?”
성훈이 요거트와 우유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훈이 형, 그 요거트 진짜 정민이 거 아니야?”
“…무심결에.”
“정민이가 일어나면 한소리 하겠네.”
“크흠, 이미 먹기 시작한 거 같이 먹자.”
“공범 만들려고?”
“둘이서 맞으면 덜 아플걸?”
이 와중에도 성훈은 플레인 요거트에 듬뿍 담은 그래놀라를 한 숟가락 펐다.
“그게 무슨 말이야? 덜 아프다니?”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거트네? 성훈이 형 요거트 안 먹었던 거 같던데.”
“…먹는 거 보니 맛있어 보여서.”
“아, 그래?”
싸늘한 목소리.
오히려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게 더 무섭게 느껴졌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정민이 눈을 비비며 성훈을 보았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성훈이 형이 건드릴 줄은 몰랐는데.”
“크흠, 호진이랑 우주가 먹는 거 보니 맛있어 보여서.”
“…….”
말없이 잠시 성훈을 보던 정민이 한숨을 퍽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말하고 먹어.”
“미안하다.”
보던 내가 체할 것 같았다.
“쿨럭! 크흐흠!”
사레가 들린 듯 성훈이 기침을 하며 정민의 눈을 피했다.
“미리 사둔 게 더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짜 화냈을 거야.”
평소에 웃는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다고 했던가.
깜짝 놀랐다.
정민이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거, 생각 이상으로 무섭구나.
냉장고에서 새로운 요거트를 꺼내 한 숟가락 뜬 정민의 얼굴에 다시 화사한 햇살이 피어올랐다.
“맛있다. 후우.”
정민이 거는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 * *
투어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를 담은 아침 X-라이브가 끝이 나고, 우리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이제 본격적인 투어 시작까지 2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야지.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사무실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아, 그게요. 방금 이종민 씨가 화를 내면서 프로듀서님 사무실에 들어갔어요.”
“이종민 선배님이요?”
“예.”
이종민.
올해로 데뷔 12년 차인 중견 가수.
폭발력 있는 고음으로 유명한 가수였다.
대표작은 ‘숲길에서’라는 곡으로, 음원 차트 TOP10에서 왔다 갔다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눈에 띄는 히트작 없이, 안정적인 팬층을 형성해 색채가 뚜렷한 앨범을 꾸준히 내던 가수였다.
3년 전에 소속사가 없던 그가 GH 엔터와 계약을 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겉으로는 큰 갈등 없이 잘 지내왔다고 들었는데.
“이유는 아세요?”
“그게, 이번 투어 때문인 거 같아요.”
“투어?”
직원이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길 꺼려했다.
아.
대충 짐작이 되는데.
투어.
나를 보며 말을 머뭇거리는 직원.
오랫동안 빛을 받지 못한 가수.
이번 투어에 몬스터즈와 함께 올리오스가 쌍두마차로 올라가는 걸 아니꼽게 보시는 거 같은데.
내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독한 실력주의인 세상에, 결과의 부당함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저 안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오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매번 이런 식이잖아요! 프로듀서님! 왜 저는 늘 뒷전입니까!? 네?”
사무실 안에서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