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회의 겸 촬영을 마친 기 PD가 돌아가고.
“하아, 이제 2월도 거의 끝나가네.”
창밖을 보던 정민이 말했다.
추웠던 겨울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물론 여전히 한겨울의 쌀쌀함이 느껴졌지만, 가끔 햇빛이 잘 드는 낮이면 조금은 따뜻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휴식기 가진 지도 꽤 오래됐다. 벌써 한 달이나 됐어.”
1월 말부터 앨범 활동을 마무리짓고 쉬기 시작했으니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우주가 그런 정민의 말을 받았다.
“한 달이나 됐어? 하나도 쉰 거 같지 않은데.”
“중간중간에 일이 많았잖아. 화보도 찍어, 연초 축제 행사에도 나가, 감 잃지 않으려고 연습도 많이 했고.”
호진과 성훈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럼 다음 달 말부터 투어 들어가는 거구나.”
“그치. 그거 준비한다고 연습 들어가면 쉴 시간이 더 없어지겠네.”
“가끔은 쉬는 날이 있었으면 할 때가 있긴 하지.”
“하하하, 이렇게 비수기 말고 한창 활동할 때 하루 정도는 쉬고 싶다는 생각 막 들지 않아?”
“맞아맞아. 우리 앨범 때 있잖아. 마지막 일정 앞두고 있을 때, 스케줄 하루만 일찍 끝내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니까?”
연습실 바닥에 대자로 뻗은 우주가 한숨을 퍽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행복한 고민이긴 하다.”
우주의 말에 나는 그를 돌아봤다.
“왜?”
“우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데뷔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었잖아. 첫 앨범 성공할까? 혹시 실패해서 묻히는 거 아닐까? 이런 고민들.”
“그랬지.”
데뷔 전에는 걱정으로 밤잠도 설쳤던 우주였다.
우주만 그랬나?
황이서 프로듀서도 최강훈 대표도 조금 틀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는 게 보였다.
모두가 올리오스 하나만을 바라보며 같은 걱정을 했던 시기가 있었지.
“그때 우리를 생각하면 엄청 발전한 거잖아.”
“그랬지.”
이제는 벌써 소속사 투어에 메인으로 참가하기도 하니까.
투어 외에도 단독 콘서트도 기획하고 있는 걸 보니, 성적이 좋다면 본격적으로 단독 투어를 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렇게 감상적이야.”
“아니, 그냥. 생각해 보니까 아까 기 PD님이랑 했던 이런 진지한 얘기를 잘 안 했잖아. 나는 형들 고민도 처음 알았고.”
기 PD가 우리와 친해지기 위해 했던 문답이 감성적인 우주에게 어떤 울림을 준 모양이었다.
“아직도 나는 예전에 건하 형이 해준 말이 생각나.”
“어떤 거?”
“그거 있잖아. 내가 부담감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잘하고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지라고 했던 말.”
“아.”
우주의 과거를 보고 그의 내면에 있는 고민을 마주 봤을 때였다.
우리 팀의 큰 한 축을 담당하는 우주가 불안감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였기에 다들 모여서 피드백 시간을 가졌지.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팀이라서 도와준다는 말을 했던 건하 형의 모습이 아직도 안 잊혀.”
“오, 건하가 그런 말도 했었어?”
정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우주가 센치해졌네.”
“그냥. 나도 이렇게 힘든데, 건하 형은 얼마나 부담감이 큰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아버지 말이야. 워낙 유명인이시잖아. 그런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겠다는 말이 가슴에 팍 꽂혔어.”
“아.”
사회적으로 유명인인 윤택수 회장의 이름값에 해가 되지 않겠다는 내 말이, 우주의 가슴을 울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찍어누르는 부담감 때문에 힘들어했던 아이였으니, 공감이 되었겠지.
“왜 그러지? 갑자기. 하하, 끝물에 겨울 타나?”
“싱숭생숭할 때지. 이제 투어도 눈앞에 보이고, 바쁠 게 보이니까.”
나는 우주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그런데 우주야. 기재율 PD님한테 말한 거 전부 다 진실은 아니야.”
“엉?”
“아버지의 이름값에 먹칠하지 않겠다는 부담감은 사실 없었어.”
“정…말?”
“그래.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그가 내 아버지라는 걸 실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의 인맥이 당장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가 부담을 갖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예전부터 말했잖아. 나는 우리가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고.”
실력에 대한 확신이었다.
전부 멤버들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패하질 않는데 이름값에 먹칠할 일이 뭐가 있어. 안 그래?”
“그러네.”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런데 우주야.”
“응?”
“내 걱정해 줘서 고맙다. 나 걱정해 주는 건 너밖에 없는 거 같아.”
“당연하지! 헤헤.”
다시 웃음을 되찾은 우주의 어깨를 주물러줬다.
우주가 혹 다시금 자신감을 잃은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나 보다.
“역시 재벌집 외동아들.”
“태생부터가 달라.”
정민과 호진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때였다.
“성훈이 있니?”
황이서 프로듀서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잠깐 와 볼래?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성훈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습실을 나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뭐 따로 들어온 일이라도 있나?”
“따라가 볼래?”
멤버들의 눈에 호기심이 샘솟았다.
“궁금하긴 하네.”
* * *
“어쩐 일이십니까?”
“앉아. 마실 거 좀 줄까?”
“물이면 괜찮습니다.”
“알았다.”
성훈은 의자에 앉자마자 한숨을 퍽 내쉬는 황이서를 봤다.
무슨 일이지?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분은 아닌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예능 프로그램에서 너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제의가 왔어.”
“정말입니까? 단독으로요?”
“그래.”
“어디입니까?”
예능 프로그램 단독 출연.
사실 성훈은 그리 기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무뚝뚝하고 말도 별로 없으며, 예능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다큐에 가깝지.
그런 자신에게 예능 캐스팅이라니.
어느 프로그램이지?
솔직히 내심 기대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M-TV의 <쇼미 프루브>.
R&B, 발라드, 힙합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며 경연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하나는 WBC의 유명 경연 프로그램 <명곡 배틀>이었다.
마찬가지로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지만 <명곡 배틀>은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왔다면 이 둘 중 하나일 거 같은데.’
우주처럼 예능에서 자기를 뽐낼 자신은 없지만, 가창력에 나름 자신이 있는 성훈이었다.
“<명곡 배틀>.”
황이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방송 녹화 날짜는 3월 마지막 주 금요일. 그런데 <명곡 배틀>은 너도 알다시피 사전 녹음이랑 편곡 일정이 있어서 사실상 3월 초부터 3주 정도는 사전 작업이 필요해.”
“그 말은.”
“투어 일정이랑 겹친다는 거지.”
황이서가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웠는지는 알 거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투어 일정으로 빡빡한데, 녹음을 위해 서울을 왔다 갔다 할 생각을 한다면.
‘살인적인 일정일 거야.’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겠지.
“원래라면 그냥 거절했을 거야. 애초에 이렇게 급하게 일정을 줬다는 건, 기존 멤버 라인업에 문제가 생겨서 땜빵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니까.”
황이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그냥 바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네 의사를 최우선으로 삼고 싶어서 먼저 물어보는 거다. 네가 원한다면 출연하겠다고 답하겠지만, 하게 되면 많이 힘들 거야.”
“…프로듀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나는 거절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쇼미 프루브>면 모를까 <명곡 배틀>은 아직 일러. 시기도 안 좋고.”
“그렇죠.”
올리오스의 현재 타겟층과 다르다는 건 성훈도 알고 있었다.
“만약에 이거 받아들이면 너 쓰러질지도 모른다.”
황이서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는 안 했으면 한다.”
“…그런데 이거 거절하면 다음이 있습니까?”
“그래. 있을 거다.”
“확실한 건 아니군요.”
“뭐든 미래를 확언할 수는 없지.”
“…….”
성훈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했다.
‘이 팀에서 내 역할은 뭐지?’
조금 근본적인 고민이었다.
올리오스의 맏형, 메인 보컬, 조금은 무뚝뚝한 원리원칙 주의자, 군기반장.
그게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였다.
‘나로 뭔가가 돋보였던 적은 있었나?’
모르겠다.
무대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성훈이었기에, 늘 최선을 다했다.
그뿐이었다.
음 이탈 같은 실수를 최소화 하고, 동료들의 실수를 커버하는 것. 그리고 무대에서 최대한 빛나는 것.
그게 성훈이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우주가 말했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그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멤버들은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며 빛났다.
정민이는 자작곡을 만들어 점점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기 시작했고, 우주는 예능 쪽에서의 활약으로 올리오스를 알렸다.
건하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방면에서 존재감을 과시했고, 호진이는 이번 아체대에서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나는?’
딱히 없었다.
무대에서는 다 같이 빛나는 법.
메인 보컬이기에 조금 더 주목을 받는 건 있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곤란했다.
‘무대에서만 보여주는 건 부족해.’
조금 더 다양한 곳에서 색다른 모습의 유성훈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곧 올리오스의 발전을 위한 일이 아닐까?
나는 이 팀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성훈은 한숨을 퍽 내쉬었다.
“해보고 싶습니다.”
“…진심이야?”
“예.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저 혼자만 제자리 걸음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황이서가 성훈의 눈을 한참을 노려보았다.
진심을 파악하기 위한 그만의 버릇이었다.
“한 번 하겠다고 하면 무를 수 없어. 정말 괜찮겠어?”
“예.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멤버들도 지옥 같은 일정 속에서 버틴 거니까요.”
“…….”
성훈의 눈을 마주 보던 황이서가 눈을 감았다.
“알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히 말했나 싶다. 네가 오케이 할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잠은 줄이면 되니까요.”
“두현이 시켜서 네 전담마크 하게 할 거니까, 이동 중엔 무조건 푹 쉬어. 컨디션 조절이 제일 중요해.”
“알겠습니다.”
한숨을 내쉰 황이서는 수화기를 들었다.
“가도 좋아. 할 얘기는 다 끝났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잘 부탁한다.”
“예.”
성훈은 담백한 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 앞에는.
“형, 프로듀서님이 무슨 일로 부르신 거야?”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명곡 배틀>에서 나를 섭외하고 싶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