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어…. 이분은 누구세요?”
우리는 황이서 옆에서 핸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30대 중반은 되었을까.
“앞으로 투어 준비 과정과 투어하는 동안 이동 과정, 무대 뒤에서 보이는 모습 같은 것들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찍어줄 기재율 PD야.”
“반갑습니다. 이번에 올리오스 영상 제작을 맡게 된 영상제작팀 기재율 PD입니다. 지금 촬영 중이에요. 티저 느낌으로 뽑을 거거든요.”
“안녕하세요!”
동그란 안경을 쓴 그는 카메라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뭐랄까.
학생 때 공부를 잘했을 거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동그란 안경을 끼고 깔끔하게 자른 머리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영상제작팀.
뮤직비디오는 외주로 맡기는데 제작팀이 할 게 뭐가 있나 싶지만, 티저 영상과 우리의 PR 영상, 배우진들의 테스트 영상과 GH 엔터와 몬스터즈의 너튜브 영상 등.
나름대로 GH 내부에서도 제작하는 영상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 다양한 영상을 담당하는 게 영상제작팀.
기재율 PD가 그 영상제작팀 소속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나름대로 제 소개를 하자면 매년 몬스터즈의 해외 투어 때 찍은 영상의 편집을 제가 맡았습니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모두 그의 실력을 납득했다.
몬스터즈 해외 투어의 비하인드 영상과 브이로그는 늘 호평 일색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상에 멤버들의 케미가 드러나는 건 물론, 몬스터즈 멤버들이 해외의 각종 콘텐츠를 소소하게 즐기는 모습을 솔직 담백하게 편집하기 때문이었다.
특수한 영상 기술은 없지만, 적절한 영상의 호흡 분배와 지루해질 여지가 없는 콘텐츠의 활용 덕분에 매번 수백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몬스터즈의 인기에 편승한 영상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다른 PD가 담당하는 국내 브이로그 영상이 그가 만든 조회 수의 4분의 1도 안 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능력은 확실한 사람이지.’
영상을 찍어내는 센스와 재치, 그리고 편집 기술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저 그 영상 봤어요! 진짜 그 PD님이세요?”
“맞습니다. 하하.”
우주가 호들갑을 떨었다.
다른 멤버들도 영상을 본 듯 놀란 얼굴로 기 PD를 보았다.
“우와. 아니, 왜 저희한테 오신 거예요? 몬스터즈 선배님들이랑 안 하시고…?”
정민의 어벙한 표정을 보니, 정말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력이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댓글에 국내 투어 영상도 기 PD가 맡아달라는 댓글로 가득할 정도였다.
“아, 간단해요. 영상제작팀 후배들도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하니까요. 몬스터즈 국내 투어 영상은 해마다 영상팀에 새로 들어온 신입 PD가 맡고 있거든요.”
그런 사연이 있었나.
“몬스터즈와 함께 큰 무대를 경험해 보면서 시야를 넓힐 기회를 주는 게 저희 팀의 방침이라서요. 물론 시니어도 붙을 거고요.”
큰 무대를 경험한다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우리 역시 몬스터즈와 함께 GH 엔터의 연말 콘서트에 오르면서 한 번 더 느끼지 않았던가.
업계 탑에서 뛰는 사람들이 어떤 무대에서 뛰는지를.
“올리오스도 같이 해봐서 알죠?”
부정할 수 없었다.
“예.”
“그런 무대에서 주눅이 들면 더 크게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이 사람이 어떻게 후배를 교육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튼. 원래라면 올리오스도 신입 PD들을 보냈을 텐데, 그럼 전 올리오스랑 작업할 기회가 없는 거잖아요? 꼭 같이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욕심이 나셨다고요?”
“예. 각자 캐릭터가 확실한 데다가 화면빨도 아주 잘 받더라고요. 춤 선이 예뻐서 눈에 확 띄는 호진 군, 메인 보컬인 성훈 군은 지적이고 쿨한 모습에서 오는 매력이 눈에 띄고, 우주 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정민 군의 포근하고 복슬복슬한 매력도 유독 눈에 띄죠. 그리고.”
기 PD의 눈이 나에게 향했다.
“누구보다 화면빨을 잘 받는 비주얼 담당 건하 군도 있죠. 이렇게 캐릭터 확실한 다섯 명이면 카메라만 갖다 대도 뭐 하나 나오겠다 싶었던 거죠.”
그가 우리의 어떤 면을 보고 왔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각자의 매력을 살릴 방법은 나름대로 구상하고 있지만, 그건 대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진심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를 보는 눈빛에 열정이 가득했다.
“대본 같은 건 따로 준비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영상의 컨셉은 투어를 준비하는 2년 차 아이돌의 솔직담백한 모습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분들을 보여줄 거고요.”
대본은 없지만, 방송용으로 제공될 콘텐츠는 충분히 제공한다고 기 PD가 이어 말했다.
그의 말을 듣던 황이서가 끼어들었다.
“이번에 투어 다닐 때 나름대로 자유 시간도 갖고 싶고 그럴 거야. 일정상 많은 시간을 내주지는 못하지만….”
황이서가 우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우리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너튜브 촬영 스케줄이라는 핑계만 대면 근처에서 너희끼리 맛집 다닐 정도는 될 거다.”
“정말요?”
“그래. 바쁜 일정 속에서 그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일 거다. 물론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을 테니까 100% 자유 시간이라는 느낌은 덜 나겠지만.”
그나마 황이서도 우리를 배려해서 넣은 일정일 거다.
저번에 우주가 짜놓은 긴 맛집 리스트를 직접 보기도 했으니.
“그래도 겁먹지는 마. 투어나 방송 스케줄로 잠잘 시간도 없어지진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황이서는 할 말을 끝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간단한 방송 컨셉 공유 좀 하고 해산해. 그리고 기 PD는 애들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황 프로님.”
“믿고 맡기는 겁니다.”
“예.”
황이서가 자리에서 떠나자, 기 PD가 여전히 카메라를 손에 쥔 채로 물었다.
“혹시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번 방송 컨셉이 있습니까? 부담 없이 말해주세요.”
우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둔 게 있어요!”
우주가 맛집을 빼곡하게 메모한 핸드폰 메모장을 들며 외쳤다.
그걸 본 기 PD의 눈이 빛났다.
저건 연출자의 눈이었다.
“올리오스의 지역 맛집 기행. 나쁘지 않은 컨셉이에요. 흔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맛을 뽑아낼 수 있죠. 이거 괜찮네요. 리스트에 올라온 음식 메뉴도 뻔하지 않아서 좋고.”
브이로그도 예능 계열이라 그럴까.
우주가 유독 빛났다.
* * *
황이서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아이돌 2팀의 김문식 대리가 찾아왔다.
“프로듀서님.”
“어? 김 대리, 무슨 일이야?”
“김준환 PD님이 프로듀서님한테 연락하셨습니다.”
“김 PD님이?”
김준환 PD라면 유명 음악 경연 예능인 <명곡 배틀>이라는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메인 CP였다.
가수들이 과거의 명곡을 이용해 자신만의 색으로 재구성하는 예능 프로.
나름대로 고정 시청자도 탄탄하고, TV의 주 시청자층인 3050을 중심으로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라 안정적으로 좋은 시청률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올리오스를 캐스팅하고 싶대? 지금은 곤란한데.”
“아, 성훈이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훈이를? 걔만?”
“예.”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울렸다.
우우웅.
김준환 PD였다.
절친한 방송국 선배이지만.
같은 선배 PD였던 강윤석 PD와는 다르게 조금은 불편한 상대였다.
“예, PD님. 안녕하십니까.”
-어 황 프로, 잘 지냈어? 밥은 잘 잡솼고?
“적당히 먹었습니다. PD님은요?”
-나야 잘 먹었지. 얘기는 들었어?
“방금 보고 받았습니다.”
-어때? 나쁘지 않지? 메인 보컬 띄우면서 그룹 인지도도 올리고 말이야. 공중파 예능에서 실력 뽐내면 잘 알려질 거야.
“방송 녹화는 언젭니까?”
-이것저것 방송 스케줄 계산하면 3월 마지막 주 금요일. 우리 녹화 금요일인 건 알지? 편곡하고 이것저것 할 거 생각하면 3월 초부터는 작업 들어가야 하거든. 어때? 괜찮아?
이거 곤란한데.
3월 초면 당장 2주 후였다.
그렇지 않아도 투어 준비 때문에 슬슬 정신없어질 시기였다.
편곡이야 방송국에서 해준다고 해도.
성훈의 일정이 될까?
“좋은 제안인 건 압니다만…. 그 시기에 저희가 투어가 있어서요.”
-아, 그래?
“예. 의사는 물어 보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지금 한창 바쁠 때라서 말이죠.”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 나오면 가왕 자리는 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하하하. 죄송합니다, 선배님.”
황이서가 자기 선에서 거절한 이유는 단순히 스케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은 지금 팬층을 공략하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해.’
<명곡 배틀>이 좋은 프로인 건 맞지만, 최근 들어 아이돌의 주 소비층인 1030세대가 자주 보는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다양한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자신들의 주력 타겟에게 확실히 어필하고 나서 따라오는 부가 요소 정도여야만 했다.
그래서 김 PD가 부담스러운 거다.
‘몬스터즈면 몰라.’
올리오스 멤버들은 아직 곤란했다.
-아쉽구먼. 정말 아쉬워. 그림 예쁘게 뽑힐 거 같은데 말이야. 한번 물어라도 보고 대답 줘. 이왕이면 빠르게 줬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수고하고.
그래도 물어는 봐야겠지.
“더 정신이 없어지겠어.”
앞으로 바빠질 걸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기 PD와의 대화는 꽤나 집요하고 혹독했다.
“우선 멤버들에 대해 제가 좀 더 알아야 할 거 같아서요.”
“우주 군이 생각하는 맛집 중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
“정민 군, 작업할 때 듣는 노래라던가 자기만의 루틴이 있나요?”
“호진 군은 춤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성훈 군은 부모님이 군인 출신이네요? 혹시 그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과 사소한 버릇도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뭐랄까.
최대한 우리와 자연스럽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사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카메라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거겠지.’
보다 자연스러운 영상을 위한 그만의 노하우일 거다.
‘영상이 잘 나가는 이유가 있네.’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무슨 컨셉이 좋을지, 우리의 호불호가 어떤 게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했다.
아마 한동안 이렇게 따라다니지 않을까 싶었다.
“건하 군은 워낙 말이 많아서 유명한 얘기부터 하고 싶은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훌륭하신 아버지를 둔 소감을 조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오프 더 레코드인가요?”
“원한다면요.”
“음, 방송에는 쓰지 말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실 잘 모른다.
아직은 그가 내 아버지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으니까.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단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윤건하가 느꼈던 부담감.
아버지가 윤택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기대가 스스로 불안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 아이돌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부담감이 있죠.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 그게 가장 먼저 든 생각입니다.”
“그게 다인가요?”
“예.”
잠시 나를 응시한 기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대답이네요. 이건 요청대로 방송에는 쓰지 않겠습니다.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었는데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카메라를 접은 기 PD가 회의를 끝마쳤다.
“2~3일에 한 번씩은 이런 식으로 올리오스에 대해서 조금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괜찮은 영상이 있으면 오프닝으로 써도 좋을 거 같네요. 그럼 고생 많았어요.”
아무래도 준비부터 꽤나 험난한 투어가 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