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우리는 각자 구희성이 분석한 책자를 읽었다.
그냥 숙소에서 늘어지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낫겠다는 이유였다.
이왕 화보를 찍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사전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브랜드는 남성적인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하는 모델이 많네. 우리가 가능할까?”
“날카로운 느낌으로 남성미를 가미하는 브랜드도 많네.”
“이 사진들 되게 좋은데?”
우리는 화보를 분석한 구희성의 책자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최근 화보계의 트렌드와 이전의 분위기 등도 볼 수 있었다.
‘참고할 게 많아.’
솔직히 말해서,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한 번이라도 탑을 찍은 사람은 역시 뭔가 다르다.
그렇게 감탄하면서 얼마나 읽었을까.
“형들, 우리 왔어!”
우주와 정민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스케줄 끝내고 사무실에서 정민이 형이랑 같이 돌아왔…. 어? 이게 다 뭐야?”
두 사람은 거실에서 화보를 보며 열띤 분석을 하는 우리를 보며 눈을 키웠다.
“형들 뭐하고 있었어? 이 책들은 다 뭐고?”
우주의 질문에 성훈이 구희성과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구희성이 우리가 화보 촬영을 하는 걸 보기 위해 박한솔에게 우리를 추천했고, 그녀가 브랜드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까지.
“오! 좋다! 우리 하자! 그렇지 않아도 한 번 해봤잖아. 앨범 자켓도 찍어보고 했으니까.”
“그래서 이거 보고 있었구나.”
정민과 우주도 찬성.
이제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계속 화보를 보면서 분석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음….”
잠시 우리를 보던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좋은 아이디어?”
뭐지?
약간 불안해하면서도 동시에 우주라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거 같아 기대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 다섯이서 스티커 사진 찍는 거 어때?”
“어?”
스티커 사진?
“화보 연습한다는 느낌으로. 어때? 분석도 좋지만 그래도 우리가 직접 찍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 같아서.”
패션 화보와 스티커 사진은 분야가 아예 달랐다. 그걸 우주가 모를 리는 없을 거고.
‘혹시 다양한 촬영 기법을 경험하고 싶은 건가?’
그런 거라면 확실히 우주다운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일이라고만 생각하면서 화보에 접근하면 다른 아이돌이나 모델들이랑 똑같이 나올 거 같다고 생각해.”
“그럼 노는 느낌으로 스티커 사진을 찍어보자는 거야?”
“그렇지! 친구들끼리 모여서 노는 느낌으로! 어때?”
“일리가 있는 말이네.”
카메라에 찍히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게 대포 카메라든 아니면 일반 핸드폰 카메라든 말이다.
이제 아마 우리가 카메라에 어떻게 담기는지 모르는 멤버는 없을 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진에서 우리는 아이돌 올리오스로 비쳤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거야말로 우리의 아이덴티티니까.
하지만 아이돌이 아닌 우리로서 찍혔던 적이 있었나?
파파라치 컷에 몇 번 찍힌 게 전부였다.
“노는 느낌이라…. 좋은 거 같네.”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찬성.”
“좋은 아이디어야.”
호진과 정민이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지금까지 카메라에 절대로 찍히지 않았을 우리만의 분위기를 내는 거.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면서 우주가 말한 우리의 색을 찾을 수도 있고.”
신년을 맞이해서, 물론 올해가 온 지는 꽤 지났지만 파티 분위기를 내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숙소 근처에 ‘N컷 마당’이라고 무인 사진관이 있어. 거기 사람도 자주 안 오는 곳이라 가기 좋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어?”
“언젠가 우리끼리 한 번은 찍고 싶어서 미리 찾아봤지. 헤헤. 연습생 때도 지금도 바빠서 시간을 제대로 못 냈잖아.”
바빠서 우리끼리 시간을 제대로 보낸 적이 없는 게, 우주에게는 아쉽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우리끼리 한 번은 찍고 싶어서.’
화보에 도움이 될 거라는 것보다 이쪽이 더 진심처럼 느껴졌다.
벌써 설레하는 우주의 모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잠시 접었다.
우주의 말대로 지금 사진을 찍는 건 즐기기 위함이니까.
“좋아. 나가자.”
나갈 채비를 마친 우리는 우주가 미리 알아봤다는 N컷 마당으로 향했다.
우주의 말대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골목이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찍히지 않을까 싶었던 불안이 싹 사라질 정도로 사람이 적었다.
“여기 한적하고 좋네.”
사람이 없었다.
불 꺼진 가게들 사이에 유일하게 혼자 자리 잡은 N컷 마당.
우리는 가만히 안을 보았다.
역시 사람은 없었다.
“빨리 들어가자.”
안은 조명으로 밝았다.
커다란 거울이 있었는데 거울 앞에는 가면부터 선글라스, 머리 위로 쓰는 인형 모자에 파티용 뽀글이 가발까지.
마치 파티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용품이 많았다.
“성훈이 형은 이 뺑뺑이 안경을 쓰는 게 어때?”
가장 신난 건 우주였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곳이 익숙하다는 듯 온갖 장식을 손에 들고 우리의 얼굴에 하나하나 씌웠다.
평소의 우리와는 상반된 이미지의 사진을 찍고 싶었던 건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성훈에게는 뺑뺑이 안경을, 따뜻한 이미지의 정민에게는 곰 인형 모자를, 말수가 적은 호진에게는 파티용 나팔 피리를 건넸다.
“크으, 좋다.”
하나하나 아이템을 씌우고 건네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건 덤이었다.
“나는?”
“건하 형은 음….”
내게는 뿔테 안경을 씌웠다.
“나는 왜 뿔테 안경이야?”
“뭔가 완벽한 이미지라서 조금이라도 촌스러워지지 않을까 했는데…. 안 되네. 얼굴이 사기야. 그래도 잘 어울려.”
우주가 혀를 내둘렀다.
“약간 대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과탑 느낌 나지 않아?”
정민이 호진과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대학교 다닌 적도 없으면서?
나도 안 다녔지만.
“다 들린다.”
“헛!”
“이것도 써!”
이번엔 뽀글뽀글한 파티용 가발까지 씌웠다.
“이러니 조금 망가진 느낌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너무 외모 몰아주기 당하면 안 되기는 해.”
“호진이도 잘생겼잖아.”
삐우!
마치 더는 안 된다는 듯 나팔 피리를 불며 적극적으로 막았다.
“그렇대.”
“너무하네.”
이건 리더 차별이다.
마지막으로 우주는 사자 인형의 모자를 썼다.
“어때? 조금 세 보이지 않아?”
나름대로 남성적인 느낌으로 선택한 모자일 텐데, 우주가 쓰니 묘하게 아기 사자 느낌이 났다.
뭐랄까.
아기 사자가 작은 앞발을 들면서 ‘크앙!’ 하고 울부짖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 하하하.”
차마 정민이도 말하지 못하자, 나는 우주의 어깨를 잡고 떠밀 듯이 사진기 안으로 들어갔다.
“자자, 찍으러 갑시다!”
우리는 모두 무인 카메라 앞에 섰다.
우주가 배경을 설정하고, 사진 모양을 설정했다.
“첫 4컷은 이렇게 컨셉으로 찍고, 다음 4컷은 장식 다 벗고 찍자.”
신난 우주가 방방 뛰며 말했다.
꼭 놀이동산에 온 아이 같이 즐거워했다.
무척 기대한 듯, 사진 찍는 내내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좋네.”
그 천진난만함에 성훈마저도 우주를 보며 웃을 정도였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고.
-찍습니다~.
사진이 찍혔다.
“모두 안으로 들어와.”
다섯 명이 모두 앵글 안으로 들어오게끔 몸을 욱여넣었다.
낑낑거리며 모인 우리는 카메라를 보았다.
찰칵! 찰칵! 찰칵!
최대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싶었지만, 앵글이 협소해 그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앵글에 잡힌 멤버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는 걸.
솔직해지자면 나도 그랬다.
스티커 사진을 찍는 이 순간만큼은 복잡한 걸 잠시 잊고 사진 자체에만 집중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사진이 아니었으니까.
우리끼리만 공유하는 하나의 추억이었으니까.
‘이런 기억이 없었거든.’
사업가의 삶은 항상 고독했다.
내 옆에 이런 기억을 공유할 사람은 없었다.
친구보다는 성공을 좇는 삶을 살았던 나다.
그래서였을까.
‘재밌네.’
그냥 같은 또래와 뭔가를 함께 한다는 게 즐거웠다.
정말 오랜만에 스물한 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잘 나왔다. 다들 마스크가 되니까 진짜 멋지게 찍혔는걸?”
사진을 본 우주가 말했다.
정중앙에 사자 인형의 모자를 쓴 우주를 중심으로 뺑뺑이 안경을 쓴 채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성훈이 왼쪽 아래에.
곰 인형 모자를 쓴 채로 사근사근한 미소를 짓는 정민이 성훈의 위에.
나팔 피리를 뿌- 하고 불며 V를 그리는 호진이 우주의 오른쪽 아래에.
뿔테 안경에 뽀글이 가발을 쓴 내가 호진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꼭 아기 사자를 호위하는 네 명의 개성 넘치는 괴짜들 같은 그림이었다.
우리는 가장 잘 나온 사진 4컷을 골라 현상했다.
“자, 그럼 이제 장식 벗고 찍자!”
다음 사진은 꽤나 멋지게 나왔다.
다들 평상복을 입은 채로 해맑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스무 살 대학생들이 모여 찍은 느낌이 들었다.
“잘 찍혔네.”
앞서 찍은 컨셉 사진과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확실히 다들 잘생겨서 그런가.
“찍는 맛이 난다.”
“그럼 하나 더 찍을까?”
“그러다 여기서 밤 지새겠다.”
의지를 불태우는 우주를 말리며 스티커 촬영을 마쳤다.
“끄으으! 좋았다.”
만족한 듯 우주가 기지개를 켜면서 외쳤다.
“시간도 남았는데 집에 돌아가서 다 같이 영화 볼까? 아까 구희성 선배님이 연기 얘기하니까 보고 싶어졌어.”
호진의 제안이었다.
이렇게 스티커 사진도 찍었으니, 오늘 하루는 놀자판으로 마무리하자는 느낌이었다.
“구희성 선배님이 예전에 연기하신 거 어때? 데뷔작인 <사랑한 그놈>.”
“그거 나쁘지 않겠다.”
정민의 말에 우주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묘하게 괴짜 같은 구희성이 영화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좋네.”
숙소로 돌아간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사랑한 그놈>을 시청했다.
오는 길에 카라멜 팝콘을 사고, 구희성이 가지고 온 과일 음료를 한 병씩 들었다.
‘진짜 잘하네.’
나도 모르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엄청 잘했다.
맹한 모습만 보다가 연기 속 진지한 모습을 보니.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그 새끼가 나보다 못한 게 뭔데!
조연이었다.
여주를 사랑하지만, 이뤄지지 못하는 주연급 조연.
화면 속 구희성이 내뱉는 절절한 대사와 연기엔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사랑했다. 그놈보다 더….
별거 아닌 대사였지만, 연기력 때문일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들더라.
영화가 끝이 났다.
“장난 아니었지?”
구희성이 선물로 가지고 온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던 호진이 감탄하며 외쳤다.
“우리도 나중에 저런 연예인이 되자.”
몬스터즈 선배 같은 연예인이 된다.
우리는 다시 한번 목표를 다짐하며 구희성의 다른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늘어지게 쉰 하루였다.
* * *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오리진 픽처스의 사진 작가 박한솔 디자이너가 손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짓에 화면이 켜지며, 프레젠테이션이 눈에 들어왔다.
-올리오스&N-스포츠.
N-스포츠의 화보 작업을 한다고?
진심이야?
“국내 최대의 스포츠 브랜드 N-스포츠에서 화보 작업과 국내 사진 광고를 함께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