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으으으.”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호진을 보았다.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이 낼법한 소리가 나왔다.
“스케줄이 없으니까 늘어지네. 연습시간이 끝났는데도 이제 오후 3시라니.”
“그러게.”
성훈은 그런 호진의 옆에서 책을 펼치고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말없이 읽었다.
이 상황에서도 책을 읽는 걸 보면 정말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연말과 연초에 몰려 있던 여러 행사도 끝이 나고, 일명 ‘비수기’가 올리오스에게도 찾아왔다.
여기저기 나갔던 예능 프로그램도 단발성이었고, 그렇다고 앨범 활동을 마쳤는데 음방에 나갈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스케줄이 텅 비었고 이렇게 정해진 연습시간이 끝나면 할 게 없어졌다.
추가 연습을 계속한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물론 모두가 이렇게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우주는 언제 온대?”
“아직 촬영 중이라네.”
이제는 막바지로 들어가는 우주카페의 녹화가 있는 우주는 여전히 바빴다.
기획 회의에도 참가하고, 바리스타 자격증도 나름대로 따겠다며 준비하고 있고, 거기에 녹화까지.
시즌 2가 거의 확정되는 상황이라, 더 몰두하는 중이었다.
‘우리 올리오스 활동을 쉴 때도 계속 노출이 돼야 하니까!’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던 우주가 떠올랐다.
아이돌 올리오스는 비수기에 들어갔지만, 예능돌 최우주는 여전히 활약 중이니까.
거기다 정민이도 지금은 숙소에 없었다.
다음 앨범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꽤나 자주 작업실로 출근했다.
연습이 끝나고 우리가 돌아갈 즈음, 정민이는 작업실을 들어갔다.
GH 엔터의 작곡가와 함께 이것저것 배운다고 했다.
카이도 스케줄이 빌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여유로울 때 미리 코드들을 짜두고 소스를 모아야 한다면서 바쁘게 일하더라.
‘마에스트로 스킬이 터질 때까지 열심히 해야지.’
그러나 지금 숙소에 있는 숙소 삼인방.
나 그리고 호진, 성훈은 당장 스케줄이 없어 숙소에서 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으으으.”
연습생 시절부터 데뷔, 그리고 지금까지.
휴가를 받은 적이야 있었지만, 그때는 비수기라는 느낌보다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쉬어두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쉬는 느낌이 제대로 들었는데.
“뭔가 허전하네.”
대자로 뻗은 채 천장에 보이는 벽지의 무늬를 세던 호진이 말했다.
“그러게.”
“활동이 없어서 여유로운 건 좋은데, 막상 아무것도 안 하니까 이상하다. 기분이.”
“이런 적이 없었지.”
“매일 쫓기듯이 연습만 했으니까.”
나와 호진이 말을 주고받고 있자, 책을 읽던 성훈이 우리를 힐끗 보았다.
애초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익숙한 듯 책장을 넘겼다.
책을 읽는 걸 좋아해서 그런 걸 거다.
“책 읽는 데 방해된다.”
“그렇게 혼자 책만 읽을 거야?”
내 말에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은 지식의 보고야.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지식과 일들이 여기에 다 담겨 있지. 내가 직접 갈 수 없다면, 이런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경험을 늘리고, 내 견문을 늘리는 게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 더 많은 도움이 될 게 분명해. 그리고 혹여나 우리가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시작됐다.
성훈의 일장연설.
뭔가 하나에 꽂히면 말도 안 되게 말이 많아진단 말이지.
책을 통해 견문을 넓힌다고 말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 성훈이 보고 있는 책은.
-책으로 보는 간단 미국 여행.
여행 책자였다.
“어디 여행 가려고?”
“직접 가지 못한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가야지.”
“…저번엔 되게 어려운 책 아니었어?”
“그건 다 읽었다.”
어려워 보이던 책이었는데 벌써 다 읽다니.
확실히 책 덕후야.
천장을 보며 끔뻑이던 호진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 셋이서 뭐라도 할까?”
“뭘?”
“음…. 어디 놀러 가는 건 어려울 거 같고, 그렇다고 뭔가 다른 걸 하면 분명 우주가 삐질 텐데.”
“지금까지 우린 모여서 연습실밖에 안 갔던 거 같은데, 연습 말고 다른 걸 해보자는 거지?”
“응. 지금 쉴 때만 할 수 있는 거 없을까?”
예전에 우주가 같이 하자고 제안했던 게 떠올랐다.
“스티커 사진 찍는 거 어때?”
“우주가 하자고 했던 그거?”
“응. 저번에 수능 끝나고 기념으로 할까 하려다가 사람들 몰려서 못했잖아.”
“나쁘지 않네.”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컨펌받지 못했다.
“아마 우리끼리 하면 우주가 잔뜩 삐질 거다. 안 그래도 자기 스케줄 비면 어떻게든 같이 찍자고 했던 거 같은데.”
성훈이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그건 맞네. 흠….”
뭐가 좋으려나.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평소에 놀아본 적이 있어야지.
사업가일 때도 아이돌일 때도 노는 것보다는 일에 더 집중했던 나날이었다.
열심히 일하라고 하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지만, 열심히 놀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뭐가 좋을까.”
바닥에서 좌우로 뒹굴거리던 호진이 중얼거릴 때였다.
딩동!
벨이 울렸다.
“누구지?”
“뭐 시켰어?”
“아니.”
생각나는 후보는 이두현 매니저와 황이서 프로듀서, 이 두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내가 문으로 다가가며 말하자.
“나야.”
문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구희성이었다.
“어? 이거 희성 선배님 목소리 아닌가?”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자.
“안녕?”
한 손에는 종합 음료수 박스를, 다른 손에는 두루마리 휴지 묶음을 사 온 구희성이 서 있었다.
“구희성 선배님?”
이 양반이 왜?
어제 헬스장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또 연기 영업을 하려고 온 건가?
그거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어?
“혼자 있던 거 아니구나? 마침 잘 됐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집들이 겸 가볍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 말이 왜 영업직의 영업 멘트 같이 들리는 건지.
“첫 집 방문에는 이런 걸 선물로 사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구희성이 음료수 박스와 두루마리 휴지 묶음을 각각 들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집들이 선물 아닌가?
“인터넷에서 봤어. 지식인이 그러더라고. 받아.”
“감사합니다.”
“들어가도 돼?”
“들어오세요.”
“고마워.”
내가 허락하고 나서야 구희성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확실히 괴짜 같은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은 선했다.
숙소 안으로 들어온 구희성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제 봤다.
가방도 있었네.
“구희성 선배님이 왜 오신 거지?”
어리둥절한 호진과 성훈을 지나친 구희성이 거실에 앉았다.
“마실 거 드실래요?”
“괜찮아. 금방 얘기하고 나갈 거야.”
가방을 뒤적이던 구희성의 손에 두꺼운 책자가 들려져 나왔다.
너덜너덜한 종이뭉치였다.
얼마나 읽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해져 있었다.
“저번에 연기 얘기했던 거 기억나지?”
“예. 당장 하는 건 어렵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할 필요는 없어. 뭐가 우선인지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이건 화보 사진 같은데요?”
“맞아. 내가 모아놓은 책자들이야. 각 패션쇼와 화보집, 그리고 브랜드마다 어떤 컨셉을 선호하는지, 어떤 분위기를 주로 사용하는지 분석한 자료야. 너희한테 도움이 될 거 같아서 가지고 왔어.”
“이걸 왜 저희한테 주시는 거죠?”
가만히 나를 보던 구희성이 입을 열었다.
“모델 화보 찍을 생각은 없어?”
“화보요?”
“찍어본 적은 있지? 예전에 잡지 나온 거 보긴 했는데.”
“예, 봤습니다.”
나를 보는 눈이 진지했다.
연기를 하라고 권유했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그 눈을 마주 본 순간, 구희성은 아직 날 포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돌발 퀘스트: 구희성의 제안 - 모델]
[모델로 구희성의 인정을 받으세요.]
[성공 시: 15 오픈 마일리지]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이번에도 퀘스트가 다시 떴다.
연기 때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15 마일리지라면, 적지 않은 보상이었다.
하지만 저번에도 다짐했듯 당장은 아이돌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었다.
윤 회장과의 내기는 현재 진행형이니까.
그러나 내 마음을 모르는 구희성은 입을 바삐 움직였다.
“화보 모델과 배우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량이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나름대로 공통점은 갖고 있어.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과, 배우는 등장인물의 매력을, 모델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자신이 아닌 다른 걸 보여줘야 하는 거지.”
구희성이 말하는 걸 보던 호진이 속삭였다.
“나 희성 선배님이 이렇게 말하는 거 처음 봐.”
너도 비슷했단다.
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아무튼, 그래서 너희가 이 화보 모델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어. 앨범용이 아니라, 진짜 너희만의 화보를.”
“죄송합니다. 이건 할 수 없습니다.”
“아이돌 활동 때문이지? 고작 4개월밖에 안 된 애들이 벌써 다른 짓을 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귀신 같네.
한번 같은 길을 갔던 선배여서일까.
그는 내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멍해 보이는 얼굴 뒤로 상당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화보는 조금 달라. 앨범 활동이 뜸해지는 비수기에 팬들에게 너희를 노출할 수 있는 통로지. 전문 패션모델이 되라는 것도 아니야. 지금 물 들어왔는데 노를 저어야지. 안 그래?”
핵심을 집고 있었다.
앨범 활동이 뜸해지는 비수기.
구희성의 말대로 지금 우리는 비수기 기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나른한 늘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목표를 생각하면 절대 이 상황에서도 멍하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적당한 휴식은 윤활유가 되어 도움을 준다지만.
‘아직 우리는 갈 길이 멀어.’
아직은 브레이크를 밟을 때가 아니었다.
“선배 말은 화보를 통해 우리를 노출하라는 거군요.”
“그렇지. 물론 광고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냐고 생각할 수 있어. 그래서 가지고 왔지.”
이번에는 새로운 책자를 꺼냈다.
“한솔 누나한테 물어보니 너희 잘한다고 하던데.”
박한솔.
우리 의 앨범 자켓을 맡아줬던 오리진 픽쳐스의 대표 사진 작가이자, 디자이너.
그분한테도 물어봤구나.
“그 누나가 너희를 생각하면서 리스트업한 업체야. 미리 받아왔지.”
“박한솔 디자이너님이요?”
“그래. 그 누나도 너희랑 같이하려고 안달이 났던데? 너희 활동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거 같던데.”
구희성은 나이에 답지 않게 완숙한 영업 능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 내게, 정확히는 올리오스에게 뭐가 필요한지 체크하고 그에 맞는 제안을 들고 찾아왔다는 것.
타고난 영업맨이었다.
박한솔 디자이너가 리스트업한 브랜드는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알법한 유명한 브랜드였다.
“물론 삼사 년 뒤에 너희가 자리를 잡으면 언젠가 나와 같이 카메라 앞에 설 수 있겠지?”
구희성이 눈을 반짝였다.
저게 본 목적일 거다.
당장은 어려우니, 내 역량을 파악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은 걸 테지.
비수기, 우리의 활동이 뜸해지면 아무리 반응이 좋았다고 해도 잊힐 수 있다.
아무리 우주가 예능에서 고군분투를 한다지만, 자칫 잘못하면 올리오스가 아닌 최우주만 돋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우주가 개인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우리도 계속 미디어에 노출되어야 했다.
‘나쁠 건 없어.’
올리오스에게도 내게도.
마음을 정한 나는 멤버들을 보았다.
“어때?”
“우리에겐 좋은 제안이지. 뭐든 해서 어떻게든 인지도를 올려야 하니까.”
“나도 성훈이 형 생각에 동의해. 선배님이 이렇게 추천하신 것도 이유가 있을 테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희성이다.
몬스터즈로 성공한 데다가 이제는 배우로 자리를 잡은 연기돌.
보는 눈이 남다른 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나를 좋게 봤다라.
당장 연기를 하진 못하더라도 그의 조언을 따라서 나쁠 건 없을 거다.
나는 이 세계에 빙의된 이후 한 번도 잊지 않았던 목적을 떠올렸다.
‘진엔딩.’
이 게임의 진엔딩을 보는 것.
물론 진엔딩을 본다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젠 나름대로 이 세계에 적응도 했고.’
원래 윤건하의 기억이 흐릿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만큼 이 세계의 경험이 재밌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끝을 보고 싶었다.
왜?
대체 왜 나를 이런 세계에 빠지게 했는지 궁금했으니까.
그저 10억을 투자했다는 이유 하나로 이 세계로 부른 걸 아닐 테니까.
진엔딩을 보면 내가 왜 이 세계에 빙의했는지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물어볼 거다.
자신의 기억을 전부 갖고 도망친 이 세계의 윤건하에게.
왜 나를 부른 거냐고.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고.
진엔딩을 보기 위해 도움이 된다면.
모델도 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나는 ‘Yes’ 버튼을 눌렀다.
[돌발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저희야 좋은데, 이런 식으로 캐스팅하는 거 괜찮은가요? 나름 업계에도 거기에서 통용되는 룰과 프로세스가 있을 텐데요.”
“괜찮아. 이미 한솔 누나한테 얘기는 해뒀어. 물론 너희가 거절하면 없는 일이 되는 거지만 말이야. 기획 컨셉은 한솔 누나가 각 브랜드에 다 어필할 거야. 서로 의견만 맞는다면 캐스팅은 금방이지.”
벌써 거기까지 얘기하고 온 건가.
생각보다 행동력이 있네.
괜히 업계 탑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프로듀서님이랑 얘기하고 연락드릴게요.”
“천천히 얘기해 줘. 아, 그리고 현장에 나도 갈 거야. 그냥 구경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찾아오는 목적이 눈에 보였다.
본인의 선택이 맞았는지 확인하고 싶은 걸 거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구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간다.”
“벌써 가시게요?”
“응. 내 볼일은 다 봤어. 아, 이건 내 시사회 티켓이야. 2월 말에 개봉할 거야. 예고편 봤어? 혹시 스케줄 괜찮으면 와.”
구희성이 시사회 티켓을 무려 6장이나 줬다.
“매니저 것까지.”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
그는 왔을 때처럼 바람처럼 떠났다.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모델, 좋을 거 같은데. 심지어 오리진 픽쳐스랑 같이 하는 거면 전혀 나쁠 게 없어.”
“그런데 선배님도 노력을 엄청 많이 하셨구나. 책자가 거의 찢어질 거 같아.”
빼곡한 메모와 직접 그린 포즈까지.
이 모든 게 다 노력의 흔적이었다.
“천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성공할 수밖에 없지.”
조용히 되뇌던 호진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이제 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