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110화 (110/236)

<제110화>

“연기 말입니까?”

“그래. 연기.”

“…….”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봐.

평소에는 소속사에서 자주 만나도 말 한마디 걸지 않던 구희성이 처음으로 말을 걸어서 한 말이, 연기할 생각이 없냐니.

이제 데뷔 1년 차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우리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말이다.

“아직은 생각 안 해봤습니다.”

결국 나온 건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생각, 안 해봤어?”

“예.”

“이상하네. 분명 프로듀서 형이 한 번쯤은 얘기했을 거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앨범이랑 활동에 집중해야죠.”

“음…. 너 이번에 데뷔한 거 맞지? 뭐 다른 곳에서 경력 속이고 데뷔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사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다던가.”

내 눈을 바라보며 하는 말에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서른이 넘었냐는 그 말.

마치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의 내게 말하는 거 같았다.

뭐랄까.

사람을 뚫어보는 그런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진짜 아는 건가?’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지만, 순간 같은 빙의자인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물론 방금 말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처럼 아이돌 육성 게임에 10억을 한순간에 지르는 미친놈이 그리 흔하지는 않지.

윤건하도 아니고 구희성에 빙의한 거라면.

‘100억은 질러야 했을걸?’

구희성이 빙의자라는 가능성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 얼굴 보고 30대라고 하면 조금 상처받는데요.”

“미안해. 내가 무례를 범했네. 그만큼 성숙한 분위기가 난다는 뜻이었어.”

변명하듯 말을 잇는 구희성.

구희성이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다.

“괜찮습니다. 아재 같다는 얘기를 종종 듣거든요.”

특히 우주가 유독 그런 얘기를 많이 했지.

“그렇구나.”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다시 가라앉은 침묵.

마치 이제 볼일 다 봤다는 듯 러닝머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게 끝인가.

구희성은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자기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연기할 생각이 없냐니.

‘이상하네.’

애초에 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건 세계 무대.

우리의 활동에 집중하기만 해도 난이도가 높은 목표였다.

거기에 연기를 한다고 시간을 잡아먹으면 원래 목표였던 세계 무대는 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임, <마이 아이돌>에서도 연기는 이후 활동의 재화를 벌기 위한 수금 용도로 많이 쓰였다.

아마 연기 자체가 아이돌 활동의 메인이 아니어서 그런 거겠지.

아이돌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일부러 연기돌이라고 불리는 아이돌 스타를 캐스팅하는 경우는 많지만, 그게 게임에서는 잘 표현이 되지 않았다.

‘연기로 해외 팬들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거라면 모를까.’

설사 그런 기회가 온다고 하더라도 위험 부담이 컸다.

내 연기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부르게 도전할 수는 없지.

지금 할 일에 집중하자.

선택과 집중.

그것이 내가 가져야 할 자세였다.

“후우, 후우.”

땀을 뻘뻘 흘리며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손잡이에 걸어둔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른 기구에 자리를 잡았는데.

‘시선이 느껴지네.’

등을 찌르는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구희성이 홱 돌려 눈을 피했다.

뭐지? 자꾸.

덤벨을 들고 이두 운동을 시작했다.

“쓰읍, 후우. 쓰읍, 후우.”

덤벨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힘줄과 근육이 꿈틀거렸다.

운동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시선이 느껴졌다.

구희성이 다른 기구에 앉아서 운동을 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진짜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렇게 보면 아무리 둔해도 알아채겠다.

운동을 마친 나는 덤벨을 내려놓으며 구희성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이번에도 눈을 피했다.

저러면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모를 줄 아는 건가.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무서운 걸 보았을 때 얼굴을 가리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고양이처럼 시선을 돌렸다.

“희성 선배.”

“…….”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거 압니다.”

“…보였어?”

“예.”

“다시 운동해. 이젠 안 볼게.”

“왜 자꾸 보고 계시는 겁니까?”

“안 봤어.”

“두 마디 전에 인정하시지 않았습니까.”

“…….”

구희성이 졸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연기에 어울리는 눈을 가지고 있길래 계속 봤어.”

“연기에 어울리는 눈…이요?”

“응.”

이건 또 무슨 말인지.

“힘 있고 깊이가 있는 눈동자를 갖고 있던데. 마스크도 좋고 목소리도 좋은 데다가 눈빛도 살아 있으니, 연기력만 갖추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야.”

힘 있고 깊이가 있는 눈동자라.

종종 들었던 말이다.

그건 사업가였던 시절에도 들었었다.

‘대표님의 그 눈을 믿어 보겠습니다. 투자하죠.’

‘믿음이 가네요. 같이 합시다.’

‘같이 가죠. 눈빛에 홀렸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영업을 하러 다닐 때마다,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맺으러 다닐 때마다, 투자 유치를 위해 다닐 때마다 들었던 말이었다.

목소리야 아이돌을 하는 지금이 최전성기가 아닌가 싶었다.

음색이 좋으려면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좋아야 하니까.

얼굴이야, 과금으로 계속 스탯을 찍은 덕분에 스스로 잘생겼다고 자부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자기가 재벌집 아들이라는 걸 숨길 정도라면 연기력도 받쳐준다는 거니까. 탐이 나는 거지.”

“…….”

“진짜 할 생각 없어?”

“없습니다.”

“그 재능을 버리는 건 아쉬운데.”

그와 동시에 눈앞에 창이 하나 떴다.

[돌발 퀘스트: 구희성의 제안 - 연기]

[연기자로 데뷔하세요.]

[성공 시: 25 오픈 마일리지]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적지 않은 마일리지가 보상으로 달렸다.

하지만 나는 No 버튼을 누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기서는 단호하게 나가는 게 맞았다.

왜냐면.

당장은 연기가 우리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았으니까.

그리고 윤 회장과의 약속도 있었다.

다음 앨범으로 음방 1등.

이걸 이루지 못한다면 다시 황룡그룹으로 돌아오라는 제안.

음악 방송 1등이 필요했다.

‘단순히 음방 1등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윤 회장을 놀라게 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큰 성과가 필요했다.

지금처럼 음원 차트 1등과 음방 1위를 다시 탈환하는 것.

그래야만 윤 회장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도 구희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은근히 끈질긴 타입이네.’

방금도 느끼지 않았는가.

아닌 척 계속 나를 보며 어필하던 구희성의 모습을.

‘생각보다 성가신 사람이네.’

“방금 성가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순간 구희성의 눈동자가 팟 하고 빛났다.

“귀신 같으시네요.”

“그런 얘기 종종 들어.”

“연기는 당장 생각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제 겨우 1년 차니까요.”

“그래? 그럼 연차가 쌓이면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고집 있네.

“그때 되면 흥미 떨어지실 텐데요.”

“아니야. 나 재능 있는 후배 키우는 거 좋아해.”

“…….”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갇힌 기분이었다.

“내 연락처, 모르지?”

“예.”

말을 마친 구희성이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찍어줘.”

“번호 말인가요?”

“응. 종종 도움이 되는 자료 보내줄게.”

“…알겠습니다.”

번호를 교환하면 왠지 모르게 귀찮아질 거 같았다.

그렇다고 소속사 선배, 그것도 아이돌들의 아이돌인 몬스터즈 구희성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

나는 내 번호를 찍었다.

“이겁니다.”

“고마워.”

그리고 처음으로 그에게 온 문자가.

-보다 나은 연기를 위한 지침서.

책 추천이었다.

“이거 좋은 책이야. 처음 시작할 때 나도 이걸로 배웠어. 지금은 선배님들께 많이 배우지만, 기본기 다지기에는 좋아.”

“감사합니다.”

이걸 읽게 되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아프네. 이제 운동하자.”

“그러죠.”

구희성은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다시금 운동에 집중했다.

운동이 끝날 때까지 구희성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운동하자는 말이 오늘 그와 한 마지막 대화였다.

‘신기하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싫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찰거머리처럼 붙는데도 묘하게 정이 가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단순히 외모가 잘 생겨서가 아니라,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가 선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하는 말도 악의가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는 게 느껴져서 그런 듯했다.

‘게임에서도 이런 느낌이었지.’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운동을 마친 나는 샤워실로 들어가 땀에 젖은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역시 운동 후에 따뜻한 물로 하는 샤워로 하루를 깨우는 게 좋다니까.

“아, 좋다.”

* * *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한진성은 기지개를 켜며 찌뿌드드한 몸을 풀었다.

얼마 만에 집에 오는 거냐.

복귀 앨범을 낸 후로 2주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몬스터즈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보단 호텔을 사용했다.

정말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이번 앨범도 잘 됐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오늘은 몬스터즈 활동이 아닌, 개별 활동을 위해 흩어졌다.

이진규는 개인 광고를 찍기 위해 스튜디오로 향했고.

최도현은 발라드의 황태자인 최수혁 선배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기 위해 갔으며.

카이는 히든 래퍼라는 새로 런칭한 힙합 예능의 심사위원을 맡았다면서, M-tv로 갔었다.

유일하게 스케줄이 없었던 구희성은 오늘 내내 사무실에 있었다고 했다.

한진성은 지상파 예능의 게스트로 단독 출연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터라 빨리 씻고 잘 생각으로 가득했다.

벌써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한 거실 불을 켰고.

“리더, 왔어?”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한진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구희성을 발견했다.

“으아아악!”

전혀 예상치 못한 동료의 등장에 한진성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야! 깜짝 놀랐잖아!”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던가.”

“타이밍을 놓쳤어.”

구희성이라면 그럴 거라 납득한 한진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 타이밍 놓쳐서 뒷북을 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내가 비밀번호 알려줬었나?”

“응, 예전에 네 생일이 비밀번호라고 말해줬었지.”

“하아.”

이제는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불은 왜 끄고 있었던 건데?”

“그냥, 나 때문에 불을 켜면 기다리는 동안 전기세 아깝잖아.”

“그래서. 우리 집엔 왜 온 거야?”

“건하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

그 말에 한진성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장난을 치려고 온 게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연기를 시키려고?”

“잘 알고 있네.”

“네가 어떠냐고 물어봤던 후배들 다 연기하러 갔으니, 모를 리 없지.”

“역시 리더야.”

“건하 걔가 연기할 상이야?”

“응. 재능 있어.”

“…….”

“리더가 그 친구 잘 아는 거 같아서 말이야. 혹시 그 친구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어.”

“전화로 하면 되잖아.”

“얼굴 보고 물어봐야 정감 있지.”

종잡을 수 없는 멤버였다. 벌써 몇 년째 함께하는 동료였지만,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처럼.

“연기를 시키기엔 이르지 않아? 성적이 좋다지만, 완전히 자리 잡은 것도 아닌데.”

“알아. 그래서 천천히 접근해 보려고. 역시 선물 공세가 좋지 않을까 싶어.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흠, 그런 방식이 통할 애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런가? 리더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뭐가 좋을까?”

평소와 다르게 구희성의 말수가 많았다.

그만큼 건하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겠지.

어떻게든 연기를 시켜보려는 구희성의 모습에 한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자기만 알던 보물의 가치를 다른 사람도 느꼈다는 것에 오는 희열이었다.

자신이 먼저 알았다는 고양감.

그게 지금 미소의 근원이었다.

“연기로 바로 꼬시는 것보단 화보 모델 같은 것부터 시켜보는 게 낫지 않겠어? 한 단계씩 공략하는 거지.”

“나쁘지 않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돌이 연기까지 할 여유는 없을 테니까.”

구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리더야. 고마워, 도움이 됐어.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자리에 벌떡 일어난 구희성은 볼일을 다 마쳤다는 듯 저벅저벅 거침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연기라.”

외모는 되는데, 진짜 되려나?

구희성이 좋게 봤다면, 싹은 있다는 거다.

‘당장은 힘들 텐데.’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건하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아이니, 잘 선택하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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