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호진이 준비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가 선택한 노래는 미국에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잭 마리나의 팝송 ‘New & Go’였다.
신디사이저로 만든 톤 높은 멜로디와 굵은 베이스의 조합이 인상적인 노래였다.
댄스스포츠보단 팝댄스에 어울리는 춤이지만, 상관없다는 듯 과감한 노래 선택을 보였다.
호진이 파트너와 함께 음악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호진이 무대를 이끌면 댄서가 그의 춤을 받쳐줬다.
이번 무대를 위해 맞춰온 두 댄서의 호흡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졌다.
“호진이 형, 진짜 잘 춘다.”
옆자리에서 호진의 춤을 감상하던 우주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안호진]
[춤: S]
트레이닝 스킬로 올린 춤 스킬에 본인의 노력이 들어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호진이 춤을 추는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자리에 있던 팬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호진의 춤에 집중했다.
이 넓은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호진만을 바라보았다.
호진은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가장 돋보이는 스타였다.
큰 키에 기다란 팔과 다리, 손끝에 전해지는 힘과 그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유연함과 부드러움.
마치 한 마리 백로같이 우아하다가도, 초원을 달리는 흑마와 같은 거친 면모를 갖췄다.
호진이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던 이유는 그 옆에서 함께 추는 댄서의 덕도 있었다.
그녀는 호진이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그를 받쳐주는 것.
호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게 옆에서 그의 춤을 도왔다.
주인공이 있다면 그에 맞는 조연도 필요했으니.
댄스스포츠라지만, 엄연히 아이돌 체육대회.
무대에선 아이돌이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비록 그녀가 보다 경력이 많은 댄서라도, 이 무대에서만큼은 호진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리고 지금의 무대는 희생의 결과였다.
역시 능숙한 베테랑이어서일까.
두 사람의 호흡이 놀라울 정도로 딱딱 맞았다.
훌륭한 조연인 댄서에 의해 무대는 완성되었고, 주인공은 호진은 누구보다 빛났다.
춤을 추는 호진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짜 연습 많이 했구나.’
호진은 스포츠댄스 안무에 아이돌 선배들의 안무를 조금씩 섞었다.
라이언의 ‘Tell us’, 몬스터즈의 ‘Beast’, 고난이도 댄스로 유명한 가수 크랙의 대표곡 ‘Solo’까지.
난이도가 높은 곡들도 문제없이 소화했다.
현장에 있던 아이돌들은 이어지는 저 춤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고 있었다. 난이도가 높은 곡 하나만 해도 어려운데, 호진은 그런 곡들을 조금씩 섞어 연속해서 소화하고 있었다.
“쟤 진짜 잘한다. 누구야?”
“호진이라던데? 올리오스라고 최근에 잘 나가는 애들 있잖아.”
올리오스 멤버 말고도 다른 아이돌이 호진에게 주는 칭찬이 귀에 쏙쏙 박혔다.
“쟤가 우승하겠는데?”
“아직 2번이야. 세 팀 더 남았는데 조금 더 지켜봐야지 않겠어?”
“저 팀보다 잘할 애들 없을 거 같은데.”
다른 아이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애들이 많네.’
설레발은 필패라는 말이 있어서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지금까지 나온 팀 중에서 최고였다.
확신할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춤을 추는 호진을 대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잘하네.”
호진의 노래가 끝이 났다.
짝짝짝!
꺄아아악!
팬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사방에서 들렸다.
호진이 파트너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나는 보았다.
인사하는 호진의 손이 달달달 떨리는 걸.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이어졌다.
“훌륭한 춤이었어요. 파트너와 호흡이 돋보였습니다. 각자의 역할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게 보기 좋았어요.”
“춤의 다양성에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자신이 가진 강점을 제대로 표현했어요.”
“호진 씨의 몸에 숲의 야수와 요정이 함께 공존하는 거 같았어요.”
모두 호평 일색이었다.
앞의 댄스팀에겐 혹평을 남겼던 심사위원조차.
“좋았습니다. 기본기가 확실히 다져져 있는 게 느껴졌어요. 춤을 느끼는 재능이 느껴졌습니다.”
호평을 남겼다.
“물론 부족한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스텝을 조금 더 빠르게 했으면 좋겠다 싶었던 부분도 있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아이돌 그만하고 저랑 같이 스포츠댄스 노려보는 거 어떤가요?”
진지하게 영입을 고려하는 심사위원이었다.
최고의 호평이었다.
심사가 이어지고, 곧 점수가 떴다.
-38.9
40점 만점에 38.9점.
이전 팀이 36점을 맞은 걸 생각하면 압도적인 차이였다.
“와.”
이건 진짜 우승할지도 모르겠는데.
점수가 발표되고, 호진은 댄서와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가자. 축하해 줘야지.”
내 말에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호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고생하셨습니다.”
“호진 군이 정말 잘해줘서 놀랐어요. 진짜 1등 하겠는데요?”
우리는 댄서와 인사를 나누는 호진에게 달려갔다.
“호진아!”
“호진이 형! 진짜 잘했어!”
“아, 애들아.”
우리의 얼굴을 본 호진의 눈가에서 눈물이 맺혔다.
그 낯가리는 호진이 얼마나 떨렸을까.
“진짜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
“고생 많았다.”
후우우.
한숨을 퍽 내쉬는 호진의 손이 파르르르 떨고 있었다.
“고생 많았다.”
“진짜 잘했어!”
나는 호진의 손이 떨리는 걸 모른 척했다.
가끔은 못 본 척하는 것도 필요했다.
호진은 처음으로 혼자서 자신의 무대를 완성했다.
그 부끄러움이 많은 호진이 말이다.
지금은 성취감을 느끼는 게 더 중요했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네.”
“응. 아까 스텝 살짝 꼬일 뻔했는데, 진짜 잘 넘어갔어.”
눈을 질끈 감은 호진이 실실 웃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었다.
“이제 남은 세 팀이 춤을 추는 걸 지켜보면 되겠네.”
“응.”
“우승할 수 있을 거야. 너무 겁내지 마.”
우리는 호진의 등을 두드렸다.
댄스스포츠의 최고점을 받은 팀은 체육관에 놓인 단상에서 따로 대기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쉽지만, 우선 호진이를 보내기로 했다.
“우승하길 기도하고 있을게!”
우주가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우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댄스스포츠팀이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호진이 췄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아쉽네.”
“아, 실수했다.”
긴장한 탓에 실수까지 한 애도 있었다.
“아쉽네요. 춤에는 기교가 있었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침착해질 필요가 있겠네요.”
“좋은 부분은 있었습니다만, 개선점이 많이 필요하네요.”
심사위원들의 평도 박했다.
호진이 우승할 거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호진이 앉아 있는 단상을 보았다.
댄서와 함께 앉은 호진은 잔뜩 긴장한 듯 앉은 채로 차렷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릎을 딱 붙이고, 주먹을 양 무릎 위에 올린 채로 딱딱하게 굳어서 입술을 꽉 다문 모습은 누가 봐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저러다가 쓰러지겠다.”
호진이 쓰러지기 전에 댄스스포츠 경연도 끝이 났다.
우승은 만점에 가까운 38.9점을 받은 호진이었다.
2등이 36.9점이라는 걸 생각하면 압도적인 차이였다.
“축하해!”
우리는 금메달을 받은 호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올리오스는 아체대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에도 2부 프로그램인 씨름 결승전과 승마가 이어졌다.
우리가 참여하는 대회는 아니라 응원석에 앉아서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며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그렇게 열다섯 시간이 넘게 진행된 아체대 녹화가 끝이 났다.
끝에 다다라서는 지쳐서 몸이 축 늘어졌다.
“아침에 시작했는데 저녁에 끝났네.”
아체대의 악명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이돌은 물론 방송 스태프, 팬들까지 모두 힘들기로 유명한 프로그램.
“진 빠진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화장실로 가는 걸음걸이가 느릿느릿했다.
아체대의 일정은 다 끝났지만, 아직 우리 스케줄은 남아 있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우리를 응원해준 팬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으니까.
시간상, 짧은 팬미팅이라도 하자는 게 목표였다.
이번에 찾아온 팬들은 총 100명.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카페를 통째로 대관했다.
끝나고 찾아가서 짧은 이벤트라도 하려고 했는데….
“오, 건하 군! 여기에 있었네요.”
아체대의 메인 PD인 이영일 PD였다.
“안녕하십니까.”
“첫 아체대 녹화는 어땠어요. 불편하지는 않았고?”
“재밌었습니다.”
“하하, 다행이네. 나는 우리 건하 군의 편의를 봐주고 싶었는데, 노골적으로 아이돌을 편애하면 나나 건하 군이나 모두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이영일 PD가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속셈이 보인다.
아닌 척 말을 돌리지만, 그 말에는 어떻게든 내 편의를 봐주고 싶었다는 의도가 뻔히 묻어났다.
“올리오스 팀이 금메달을 두 개나 땄더라고. 축하해요. 이렇게 내가 칭찬이 많은 편은 아닌데 말이죠. 하하하.”
“감사합니다.”
칭찬하면서 내게 다가오는 이영일 PD.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가.
사람이 잘 찾지 않는 화장실이다.
녹화 내내 나를 찾지 않던 이영일 PD였다.
인기척이 아예 없는 곳에 간다면 분명 나를 따라올 거라고 생각해 일부러 그를 이곳으로 유인했다.
사람이 없는 체육관 별관의 화장실.
역시나 이곳을 찾자마자 쫓아오는 모습이란.
너무 속이 뻔히 보이잖아.
절대 먼저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지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다.
“회장님은 잘 계시고?”
“회장님…. 아, 윤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기사 봤다. 회장님께서 마음고생이 많았겠어.”
“하하, 그렇죠. 못난 아들이었으니까요.”
딱히 숨길 생각도 없다.
어차피 이제 세상 사람들 다 아는데 숨겨서 뭐하겠어.
“크흠흠.”
아닌 척하려고 하지만 눈동자에 욕망이 솟구친다.
“힘든 거 있으면 형한테 얘기해.”
언제 봤다고 형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장단에 맞춰줄까?
지금 이 PD는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직접 얘기하면 티가 나니,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내게 전하고 싶은 모습이 드러났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방송국 쪽은 다 잡고 있다고.”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우리 방송국 예능 PD들이랑 컨택 하고 싶으면 언제나 말만 해. 내가 다 연결해 줄 수 있어.”
그의 어깨가 올라간다.
-윤 회장은 대놓고 널 도와주지 못하지만, 나는 가능해.
라는 그의 생각이 대놓고 드러났다.
“물론 대가를 바라는 건 아니고. 우리 올리오스의 잠재력이 보여서 그런 거야. 나 이런 말 허투루 하는 사람 아니다?”
“그렇습니까?”
“올리오스도 이제 본격적으로 메이저 판에서 놀아야지. 정규 앨범 성적이 좋았다지만, 반짝인기는 금방 사그라들기 마련이야.”
나를 보며 떠드는 이 PD의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했다.
조금은 역겨웠다.
어떻게든 나를 이용하려는 이 PD의 눈빛을 바라보는 건 그리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노골적이었다.
“높은 곳을 바라보고 싶은 건 사실입니다만, 외부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뭐?”
순간, 이 PD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펴졌다.
“아버지와 약속했거든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본래 아이돌이 가져야 할 방식만으로 1등을 차지하기로.”
“그럼 곤란한데.”
이영일 PD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졌다.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아닐 테지.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받는 기브 앤 테이크 관계를 원했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당신 같은 저급한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
내가 이용했으면 이용했지.
그래서 이영일 PD도 이용할 생각이다.
내가 자신에게 큰 선물을 줄 수 있는 상대라고 오해하고 있는 동안엔 최대한 빼먹어야지.
“하지만 말입니다, PD님.”
“……?”
“저는 받은 도움을 잊지는 않아요. 그게 제 신념이거든요.”
새끼손가락을 들며 좌우로 흔들자, 이 PD의 얼굴이 다시금 밝아졌다.
“그래. 받은 걸 모른 체하는 것만큼 양심 없는 게 없지.”
껄껄 웃은 이영일 PD가 주머니에 손을 쏘옥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손에는 그의 명함이 들려 있었다.
“연락 줘. 언제든 내 전화기는 열려 있어.”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끌끌거리며 웃는 그의 웃음은 구멍이 뚫린 욕망의 항아리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 그 명함 잘 챙기고.”
윙크하며 멀어지는 이영일 PD의 뒷모습을 보며, 저 인간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