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106화 (106/236)

<제106화>

“무슨 일이야?”

복도로 따라가자, 호진이 통장을 내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 돈, 너 줄게. 아직 다 갚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지금을 시작으로 천천히 갚아갈게. 계좌번호 알려주면 바로 보내줄 거고, 이후에도 정산이 나오는 대로….”

이 성실한 녀석이 처음으로 정산받은 240만 원을 내게 주려는 거다.

“됐어.”

“어?”

“채무 관계를 확실히 하는 모습이 보기는 좋은데. 이 돈을 갚는 건 지금이 아니야.”

나는 호진의 통장을 그의 손에 다시 건넸다.

“하지만….”

“원래 첫 월급이랑 첫 정산금은 자기랑 가족을 위해 쓰는 게 국룰이야. 마음은 잘 알겠는데.”

나는 호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줬다.

이 몸으로는 동갑이지만, 원래 내 나이를 생각하면 한참은 동생이었다.

그런 놈이 빚진 걸 갚겠다고 덤비는 게 대견하고 귀여웠다.

“쉬는 날에 어머니께 맛있는 거 사드려. 아니면 동생 퇴원 기념으로 선물을 사주거나.”

“건하야.”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우리는 무조건 성공한다고. 머지않아서 얼마든지 더 벌 수 있어. 그때부터 갚아도 충분해.”

“그래도 조금은 줘야 하는 게….”

“아예 받지 않는 게 불편하면 말이야. 너 지갑에 천 원 있어?”

“있는데.”

주섬주섬 지갑을 연 호진이 꼬깃꼬깃한 천원을 꺼냈다.

“이걸로 이번 달 받을 돈 퉁쳐.”

그 천 원을 주머니에 넣은 나는 호진의 등을 토닥였다.

“애들이 우리 찾겠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지.”

나는 눈가가 새빨개지는 호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함께 걸었다.

* * *

“올리오스 팀! 이쪽으로 오실게요!”

우리는 아체대가 열리는 거대 실내 체육관에 도착했다.

4천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체육관.

체육관 입구에는 벌써 팬들로 가득했다.

아이돌 팬들에게 이미지가 안 좋다고는 하더라도, 아이돌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어쩔 수 없이 팬들이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어? 저기 우리 팬들 아니야?”

우주가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팬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의 얼굴이 새겨진 판넬과 올리오스가 적힌 팻말, 저번 팬미팅에서 보았던 익숙한 응원봉까지.

낯이 익은 팬들도 있었다.

“많이 오셨네.”

“와…. 우리 진짜 열심히 해야겠는데.”

“열심히는 해도 무리는 하지 마.”

마음 같아서는 대기하고 있는 팬들에게 손이라도 흔들고 싶었지만, 인솔하는 스태프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 괜히 팬들이랑 마주치지 마세요. 잘못하다가 행사 전체가 딜레이 됩니다.”

“아, 네….”

단호한 스태프의 말에 우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스태프의 마음은 이해했다.

현장 관리를 하는데, 엄격한 규율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괜히 문제를 일으킬 일 자체를 차단하는 거다.

“팬들이랑 만날 기회는 많으니까.”

시무룩한 우주를 위로하며 우리는 안으로 향했다.

체육관 안에는 미리 도착한 아이돌 선배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일, 이, 삼, All we once!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입니다!”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

골든트랙의 이진우였다.

‘골든트랙도 왔네.’

하긴, MAE라도 소속사였다.

방송국에서 까라면 까야겠지.

물론 MAE도 그들의 탑급 아이돌은 참가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나름의 스케줄을 핑계로 피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우리가 서로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저번 윤택수 회장과 내 기사에 관해 한마디 올린 이진우였다.

-노력으로 따낼지 몰라도 절대로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애는 아닙니다.

양현우와 함께 진행했던 기사 인터뷰.

솔직히 좋은 얘기를 해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다.

도움을 받았으면.

“저번 인터뷰는 고맙다.”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예의였다.

“고마우면 다음 앨범도 이 갈고 내라.”

이진우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작년엔 우리가 졌지만, 올해는 우리가 상 다 타갈 거니까 각오해.”

“우리가 이 갈고 내면 이기기 힘들 텐데?”

내 말에 이진우가 나를 노려봤다.

눈에서 살기가 느껴지는데.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어떻게든 실력으로 너희를 이길 거다. 그래서 작년에 너희한테 신인상을 준 심사위원들한테 그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줄 거야.”

“그래서 인터뷰 한 거냐?”

“당연하지. 네가 별 시답잖은 이유로 활동을 못 하는 건 바라지 않아.”

“황룡그룹 외동아들 건이 시답잖은 이유야?”

“그게 뭐라고. 재벌집 아들이면 아이돌 활동할 때 점수라도 더 얹어주냐?”

“그건 아니지.”

“그럼 볼품없는 이유지.”

이거, 생각보다 강단 있는 놈이네.

라이언한테 제대로 깨져서 실전의 무서움을 깨달은 걸까?

아니면 우리한테 지고 떨어진 게 충격이었던 건가.

후자의 이유가 강해 보였다.

“그럼 아체대에서도 질 생각은 없겠네.”

“당연하지. 무조건 올리오스는 무조건 이긴다는 게 우리 계획이다.”

이를 제대로 갈고 온 모양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제대로 승부해 보자.”

나는 그런 이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전의 좋고 싫은 기억은 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경기하자는 의미였다.

“그래. 이왕이면 다른 팀으로 만났으면 좋겠네.”

이진우가 그런 내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의 승부욕, 이런 건가.

나 역시 악력으로는 남부럽지 않았다.

우리는 손등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세게 손을 맞잡았지만, 마주 보는 얼굴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돌도 많았다.

남돌 선배는 물론 걸그룹도 상당수가 이미 옹기종기 모여 스태프의 안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100명이 조금 넘는 아이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자, 잠시만 주목 좀 할게요!”

아체대의 메인 PD, 이영일 PD가 외쳤다.

그 한 마디에 떠들썩하던 아이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여러모로 악명이 높은 PD였다.

과거 음방 출신 PD로, 현재 음악 방송 PD들이 부리는 상당수의 패악질은 모두 이 사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끗발도 있어서 연예계 아이돌은 물론 기획사 실장들도 이영일 PD 앞에서 찍소리도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3년째 아이돌 체육대회의 메인 PD를 맡고 있는데, 그 3년간 아체대의 시청률이 올라간 덕에 내년에는 데스크 쪽으로 올라간다는 얘기가 도는 PD였다.

그간 그의 패악질을 아는 아이돌도, 모르는 아이돌도 이 PD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팬들이 들어오기 전에 대진표를 미리 뽑을 겁니다! 괜히 시간 딜레이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알겠어?”

다소 강압적인 말투.

반존대가 설렌다고 하지만, 이런 식의 반존대는 사절이다.

듣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지는, 빈정거림이 섞인 능글거린 말투였다.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인성이 느껴졌다.

“대답!”

“네, 알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제 슛 들어갈 테니까, 정욱 씨 잘 부탁합니다.”

현장 MC를 맡은 MC 김정욱이 마이크를 잡았다.

“자, 안녕하세요. 아이돌 체육대회, 아체대의 MC를 맡은 김정욱입니다.”

간단한 대회 소개가 끝나고, 김정욱이 신호를 보냈다.

그룹의 리더들이 우물쭈물하며 올라갔다.

나도 일어났다.

이진우도 함께였다.

크리키 식스의 리더 레녹도 올라왔다.

말고도 각 그룹의 리더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그룹이 아닌, 개인으로 참가한 사람들은 본인이 올라왔다.

제비뽑기를 위해 올라갔는데, 이영일 PD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이유가 뭔가 싶었는데, 금방 깨달았다.

-윤택수 회장의 외동아들 윤건하.

이 타이틀 때문일 거다.

혹여나 내게 잘 보이면, 윤택수 회장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거 같았다.

그게 허망한 타이틀이라는 걸 깨달으면 달라지겠지.

‘그전까지는 이용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어필할 생각은 없었다.

이영일 PD도 마찬가지일 거다.

카메라가 도는데 대놓고 청탁을 할 생각은 없겠지.

한다면 방송 카메라가 없는 은밀한 곳에서 말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의 밀담이라면 나도 좋아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제비를 뽑았다.

대진표를 나누는 제비뽑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종목별로 불투명한 상자에 번호가 적힌 공이 있었고, 그 공을 뽑는 게 기본 방식이었다.

생각보다 참가팀이 많아, 뽑는 도중에 팬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육상에 나가는 건 나 혼자, 우리는 크리키 식스와 같은 조에 뽑혔다.

이진우의 골든트랙은 결승에서나 만나겠네.

풋살은 우리 올리오스와 3년 차 선배인 비스티키즈와 함께하게 됐다.

정민이랑 우주 그리고 성훈이 풋살 멤버로 참여했다,

“좋습니다. 사전에 팀마다 체육복을 배부했을 겁니다. 이제 탈의실로 가셔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와주세요.”

탈의실로 가자, 음악 방송 대기실에서 종종 만났던 선배들도 있었다.

“올리오스? 너희 잘하더라. 아체대에서도 잘할 수 있지?”

“잘 부탁해. 너희가 육상이랑 풋살, 거기에 씨름까지 나간다면서?”

“예! 댄스스포츠에도 나갑니다.”

이번 아체대에는 총 아홉 종목이 구성되어 있었다.

육상, 양궁, 씨름, 릴레이 달리기, E 스포츠, 풋살, 농구, 승마, 댄스스포츠.

이렇게 총 아홉 종목 중, 우리 올리오스가 참가하는 종목은 총 네 개.

육상에는 내가 풋살엔 정민과 우주, 성훈이 댄스스포츠에는 호진이 그리고 씨름엔 나와 성훈이 나가기로 했다.

한진성은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안 나갈 수는 없지.

신인인 이상 최대한 열심히 해야지 않겠어?

“후우, 떨린다. 잘할 수 있겠지?”

“너무 부담 갖지 마. 떨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좋게 봐줄 거야.”

“응.”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우주와 정민을 다독였다.

개막 선서가 끝나면 바로 풋살부터 시작이라,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니, 복도에 블랑 엔터의 롤링걸즈가 있었다.

그녀들도 이번 아체대에 참가했다.

“건하 후배!”

홍하나였다.

말 많고, 칭찬에 약한 5년 차 아이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올리오스랑 같은 팀이네. 잘 부탁할게!”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화이팅이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갔다.

“벌써 자리가 거의 다 찼네.”

멤버들과 함께 체육관 강당으로 나가자, 객석을 가득 메운 팬들이 보였다.

와아아아!

그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이 나올 때마다 환호를 질렀다.

그럴 때마다 아이돌들은 손을 흔들며 그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어? 저기 우리 원스 팬들이다!”

우주가 관객석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원스 팬클럽이 우리의 판넬을 들고 흔드는 중이었다.

원스.

우리 올리오스의 팬클럽 이름이었다.

올리오스의 어원이었던 ‘All we once’의 마지막 단어 ‘Once’를 따서 만들었다고 했다.

이름이 간결한 것이 과하지도 않아 부르기도 편하고 입에 착착 감겼다.

“다들 일찍 들어왔구나!”

우리가 손을 흔들자, 그녀들 역시 환호로 답했다.

멀리 대포 카메라가 우리를 찍는 게 보였다.

나는 카메라를 향해 손하트를 만들어 보냈다.

제대로 찍혔겠지?

체육복을 입은 아이돌 모두가 강당에 모였다.

“올리오스!”

뒤늦게 도착한 이진규가 우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희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다. 하하하!”

몬스터즈 멤버 간의 가위바위보를 져서 선서를 하러 오게 된 이진규.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리 편해 보이진 않았다.

“아, 선배님.”

“너희 나한테는 벽 두는 거냐? 진성이만 형이고, 나만 선배야?”

“진규 형.”

“그래. 하하하! 아무튼, 선서하러 올라가기 전에 너희한테 응원 좀 해주려고 왔다.”

“저기 저희 팬들 있는데, 손 한 번 흔들어 주세요.”

나는 원스가 모여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그 말에 이진규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같이 웃으며 손하트를 만드는 사진이 분명 찍혔을 거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다칠 거 같으면, 확 져버려.”

낮게 속삭이던 이진규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GH 엔터의 남돌 선배들은 다들 글러먹었다.

암울한 GH 엔터는 올리오스가 이끌어야겠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진규가 아이돌 출신 유명 보컬인 신시아와 함께 선서를 하러 올라갔다.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간 이진규는 단상 위에서만큼은 진지한 얼굴로 선서에 임했다.

그렇게 아체대를 시작했다.

* * *

“으으, 이길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비스티키즈와 한 팀이 되어 풋살에 참여했던 정민과 우주, 성훈은 아쉽게 패배했다.

결과는 3대2 석패.

상대가 좋지 않았다.

연예계에서 축구를 잘하기로 유명한 류지환과 제임스가 속한 팀이었다.

강력한 우승후보 팀.

그런 팀을 상대로 우주의 헤딩이 운 좋게 골문 안으로 들어가 선취점을 먹었다.

상대적 약팀의 유쾌한 반란이 시작되나 싶었지만, 전반 마무리할 즈음과 터진 류지환과 제임스의 골이 연달아 터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후반전에 서로 한 골씩 넣었지만, 끝내 역전하지 못했다.

한 골 차 아쉬운 패배라 더 실망한 모습이었다.

“고생 많았어. 진짜 잘하더라.”

비스티키즈 선배가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패배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 남겨줄래? 나중에 같이 술 한잔하자.”

아체대가 아이돌 인맥 관리하기 좋다는 장점도 있다던데.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짧지만 한 팀이 된 선후배들끼리 연락처를 넘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제 단거리 육상이네.”

“내 차례지.”

나는 몸을 풀었다.

-60m 단거리 육상 예선 1경기가 시작합니다. 해당 인원들은 전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형, 힘내. 형은 무조건 우승해줘! 우리의 복수를 해줘!”

“류지환 선배는 육상 안 나가는데?”

“그냥 이겨줘.”

내 승리로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고 싶은지, 우주의 응원은 필사적이었다.

“알았어. 최선을 다해볼게.”

나는 팀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장 라인에 섰다.

그리고 내 옆에 선 크리키 식스의 리더 레녹.

“야, 윤건하.”

레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나를 노려보던 레녹이 눈에 불을 켜며 소곤거렸다.

“음악 방송에서 1등 좀 했다고 나대지 마. 자식아.”

얜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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