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황룡그룹의 총재, 윤택수 회장의 집무실.
그는 돋보기안경을 쓴 채로 자신에게 올라온 서류 파일을 일일이 손으로 확인하고 사인했다.
시대가 발전하고 디지털 작업이 대중화된 시대였지만, 나이가 든 통에 여전히 업무 처리를 아날로그로 하고 있는 윤 회장이었다.
대단한 기업의 총재였지만, 그 역시 종이의 사각사각 넘김이 익숙한 나이였다.
“회장님, 이 기사를 보시죠.”
최 실장이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제는 자신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최고의 비서.
자신과는 달리, 변하는 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솜씨 좋은 부하직원.
눈치도 좋아, 일하는 중에는 어지간해선 방해하지 않는 그가 처음으로 자신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들어왔다.
지금은 기사를 볼 여유가 없다.
그룹에서 올라온 여러 안건 중,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 하는 일들을 살펴야 했기에.
“급한 기사라면 그대로 읊어주게. 아니라면 두고 가고.”
방해하지 말고 나가서 일을 보라는 의미였다.
그에게 황룡그룹의 일보다 급한 건 없으니.
그러나 최 실장은 의외로 나가지 않은 채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윤건하 도련님이 회장님의 자제분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청탁으로 데뷔했다는 억측까지 기사에 실린 걸 보니, 지극히 악의적입니다.”
“하긴, 그리 난리를 부렸으니 기사가 날 법도 하지.”
“하지만 뒷돈을 줬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주지 않았으니 떳떳하네.”
“아이돌에겐 이미지가 생명입니다. 회장님.”
“건하가 내 아들이 맞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난리가 날 정도의 기사인가?”
“황룡그룹의 총재인 윤 회장님의 아들이 아이돌이라면 기사가 될 만하죠.”
오늘따라 끈덕진 최 실장이었다.
의외로군.
눈치 없는 친구는 아니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말씀만 하시면….”
“두게.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니 말이야. 내 아들이라면 잘 헤쳐나갈 게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곧 다시 회사로 돌아오게 될 거다.
그리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스스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할 것이리라.
“얘기가 끝났으면 나가보게.”
“사실 들어오기 전에 이미 반박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일이 다 끝나고서야 알려준 겐가? 최 실장, 실망이 크네.”
“회장님께서 굳이 개입하지 않으실 거 같아 일이 끝나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이 끝났다고?”
생각보다 빠르군.
윤 회장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시간 만에 올라온 기사입니다.”
그렇게 빨리 대처했다는 건, 이미 대처할 방법을 궁리했다는 뜻이었다.
“말해보게. 그건 궁금하군.”
“…….”
최 실장이 말이 없다.
이 친구,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느릿느릿해졌어.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윤택수 회장의 아들은 맞지만 부정한 정황은 일절 없고, 오로지 노력만으로 자리를 따냈다는 내용의 반박 기사였다.
기사뿐이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자극적인 거짓은 담백한 진실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가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 기사에는 GH 엔터의 채널이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무려 열두 시간짜리 댄스 영상.
몇 년 전의 건하부터 지금 오늘 날의 건하까지.
건하가 춘 댄스 영상들의 클립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허, 이 녀석 보게.”
윤택수 회장은 잠시 펜을 내려놓고 아들의 발전을 웃으며 보았다.
아들의 성장을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엄하다고 해도, 윤택수 회장 역시 아버지였다.
“허허허. 재밌어. 아주, 재밌어. 이런 식으로 정면돌파를 하겠다? 미리 다 준비한 건가?”
그가 정말로 흥미를 느낀 건, 윤건하의 문제 해결 방법이었지만 말이다.
“여보, 건하도 이제 어른이 된 거 같소.”
윤 회장의 시선이 그의 집무실 책상에 올려진 액자에 향했다.
젊은 윤택수 회장과 그의 부인이자, 윤건하의 어머니인 정미숙 여자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윤 회장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건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 * *
윤건하가 재벌가 윤택수 회장의 아들이라는 기사가 연이어 나왔다.
윤건하가 아이돌이 되기 위해 GH 엔터에 찔러줬다는 둥, 황룡그룹이 금액을 지원했다는 여러 루머들도 나왔다.
그것들은 GH의 공식 인터뷰와 GH 엔터의 너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으로 잠재웠다.
중학생 때부터 매일 매일 춤 연습을 한 영상.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실력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아주 조금씩 발전했고, 후반부에선 그 실력이 놀랍게 발전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MAE의 아이돌 골든트랙의 담당인 양현우 실장의 인터뷰까지.
-건하요? 걔가 윤택수 회장 아들이라고요? 몰랐습니다. 애초에 그런 걸 밝히지도 않았어요. 멤버들 전원 몰랐습니다.
-가장 일찍 연습실에 나오고 가장 늦게까지 남았어요. 자신에게 엄한 스타일이죠. 본인이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몇 배는 더 노력했어요.
윤건하가 MAE에서 연습생을 하던 내내 티를 내지 않았다는 얘기가 신빙성을 더했다.
그리고 그 인터뷰의 힘을 더해준 건.
-건하 걔 연습벌레였어요. 실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물론 연습한 것에 비해서 실력이 많이 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계속 연습했어요.
골든트랙의 리더, 이진우의 인터뷰였다.
-솔직히 바보 같기도 했었죠. 제가 보기엔 가망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MAE 엔터의 거의 모든 테스트에서 꼴찌였어요.
실력이 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죠. 그런데 말이죠. 절대로 다른 사람 탓은 하지 않았어요. 비겁한 수도 쓰지 않았어요.
자기 능력 부족이었다면서 연습에 더 매진했던 애였어요. 절대,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쓰는 놈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 저희랑 같은 팀으로 데뷔했겠죠.
그의 마지막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데뷔를 못 했으면 못 했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애는 아닙니다.
전 소속사였던 MAE 엔터의 실장과 같이 연습생 기간을 함께 했던 아이돌 멤버의 인터뷰.
건하에게 걸렸던 수많은 억측을 잠재우긴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당 루머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자기가 윤택수 회장 아들이라는 걸 숨긴 거야?
-끈기가 대단하다. 영상 초반에 추는 거 보면 진짜 엉망이던데. 지금이랑 비교하면….
-저 정도 노력이면 그것도 재능이다;
-대체 얼마나 연습한 거임?
-나만 이거 입 맞춘 것처럼 느껴짐? 황룡그룹에서 언론에 돈 푸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건 너무 억측이잖아. 본인이 노력해서 연습생이 된 건데.
┖그렇게 돈 풀어서 막을 거면 애초에 기사가 안 나왔겠지ㅋㅋㅋ
대부분은 긍정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여론이 어느 정도 잡히자 윤택수 회장도 혈연 관계를 인정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연습생과 데뷔 과정에서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후우. 한시름 놓았네.”
황이서 프로듀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이 사진을 기자한테 받았을 때 심장이 얼마나 철렁하던지.
이제 보면 별거 아닌 사진이다.
인정하고 깔끔하게 돌파하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게 하필 몬스터즈 컴백 시기에 절묘하게 들어맞았다는 것.
바쁜 상황에서, 몬스터즈에 회사의 역량을 전부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갑작스러운 이슈.
혹여나 두 그룹에 해가 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을 다 했다.
낼 땐 내더라도 어떻게든 기사가 나오는 시기를 늦춰야만 했다.
그러나 그 빌어먹을 기자놈이 더러운 제안을 입에 올리는 순간, 머리통이 돌아버렸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래서 그냥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애초에 이럴 때를 대비해 기사들도 준비해뒀다.
건하가 얼마나 성실한지.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노력했다는 것.
중학생 때부터 어떻게든 연예인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는 것 등.
많은 기사를 뿌렸다.
치열한 공방전을 할 거라 예상했다.
자신들이 기사를 올리면 다른 루머가 터지는 그런 식의 진흙탕 싸움.
그러나 생각 외로 깔끔하게 끝났다.
“진짜 난 놈이라니까.”
건하의 갤러리에 빼곡하게 자리 잡았던 수많은 댄스 연습 영상들.
거의 매일 찍은 영상, 일주일에 하나씩 새로운 춤을 배우고 또 추는 영상들.
이런 상황을 본인이 예상하고 녹화한 건 아닐 거다.
그러나 자신이 그만큼 노력했음을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서, MAE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자신의 자존감을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서 녹화한 걸 거다.
그리고 그 노력의 흔적이 지금 윤건하 본인과 GH 엔터에 찾아왔을지 모르는 위기를 넘기도록 도와줬다.
“걱정한 것보단 무사히 잘 넘겼네.”
소속 아이돌을, 연습생을 접대부로 쓰지 않겠다.
그건 최강훈 대표와 황이서 프로듀서가 처음 이 GH 엔터를 세울 때 정한 철칙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닥쳐도 자신들을 믿고 청춘을 바친 애들에게 몹쓸 짓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기획사의 사람이기 이전에 어른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접대를 요구했던 최상록 기자의 요청을 거절했던 거다.
“하아. 힘들다.”
상대가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받아줬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홍보팀의 한석원 팀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황룡그룹에서 연락 왔습니다. 건하 건으로 프로듀서님이랑 얘기하고 싶다던데요?”
“내 번호를 안 올렸던가요?”
“기자들 통해서 저희 쪽 번호 알아 온 거 같습니다.”
“돌려주세요.”
“옙!”
한 팀장이 나가고 곧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업무용 전화 특유의 무미건조한 벨소리.
황이서는 전화를 받았다.
“예, GH 엔터의 아이돌 1팀 실장 겸 프로듀서, 황이서 프로듀서입니다.”
-반갑소. 황룡그룹의 윤택수 회장이오.
“아, 건하 아버님이시군요.”
-하하하, 건하 아버님이라. 그런 표현은 오랜만에 듣는군.
“어쩐 일이십니까. 건하 건은 덕분에 잘 마무리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건하 고놈이 기발한 영상을 올렸던 건 봤소.
“보셨군요.”
-그런 걸 얘기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오.
10초 정도 이어지는 침묵.
그러나 황이서는 그 어느 때보다 그 10초가 길게만 느껴졌다.
-건하에게 들었으리라 믿겠소.
“다음 앨범으로 음악 방송 1등을 하지 못하면 다시 황룡그룹으로 돌아가는 조건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본인에게 들었습니다.”
-세계 최고를 노리겠다고도 말했지. 그것도 들었소?
“예.”
설마 1등을 하지 말라는 얘기일까.
자기 아들을 다시 황룡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그룹 총수의 결연한 말을 듣는 거 아닐까?
그런 제안이라면 거절할 생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프로듀서 인생 제일 어려운 거절이라 생각해,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프로듀서에게 직접 듣고 싶소. 황 프로가 봤을 땐 올리오스가 1등을 할 수 있을 거라 보시오?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자신에게 하는 윤택수 회장의 질문.
이건 기업의 총수로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묻는 질문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렇소.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이유는?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희 채널에 올린 영상.”
-노력이 건하의 무기라고 보는 거요?
“노력보단 준비성이죠.”
-준비성? 노력과 뭐가 다른 거지?
“건하는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입니다. 침착함, 뛰어난 외모, 노력, 자신감,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남긴 여러 기록도 있죠. 이 모든 것이 건하가 자기를 성공하게 만드는 여러 요소입니다.”
황이서는 처음 건하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의 무기가 외모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윤건하.
5년간 실패한 경험과 깨달음으로 만든 자신감이 무기라고 말했던 윤건하.
들어오자마자 멤버들과 하나가 되고, 다른 애들보다 뛰어난 발전을 보인 그였다.
MAE에서 떨어진 실패자가 올리오스와 하나가 돼서 최고의 아이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윤건하가 가진 준비성이었다.
MAE에서 겪은 실패로 배운 그의 무기.
“건하가 처음에 절 만나고 한 얘기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했소?
“자기는 얼굴 말고 장점이 없다고.”
-내 얼굴을 빼다 박긴 했지.
“그러나 실패로 배운 게 있다고,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건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죠.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으니까요.”
-자네의 이목을 사로잡은 거군.
“예, 그건 최 대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알았다.
얘는 될 놈이라는 걸.
-그런가.
무뚝뚝한 윤 회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에게 영업을 다녔던 황이서는 느꼈다.
그 목소리 사이에서 들리는 미세한 웃음기를.
-그래봤자, 아직 애지. 패기만 넘치는 아이 말이오. 안 그렇소?
“단순히 패기만 가진 어린아이는 아닙니다. 이미 건하는 결과를 보여줬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처음과는 달리 목소리에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졌다.
아들을 대견해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지금이 기회다.’
황이서는 여기서 미리 못을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장님, 저는 엔터테인먼트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프로듀서입니다. 늘 성공과 실패를 맞추진 못하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얘들이라면 성공할 수 있다고. 그러니….”
숨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건하가 1등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말은 하지 마십쇼.”
-그게 뭔 소리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윤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 프로가 오해한 거 같소. 나는 건하의 앞길을 막을 생각이 없네. 약속대로 1등을 한다면, 지원해 줘야지. 그게 약속 아니겠는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까?”
-재밌는 분이시군. 마음은 이해하오. 나 역시 건하가 나를 따라서 일을 했으면 하니까. 하지만 사람마다 본인의 재능이 다른 법이니 어쩔 수 있겠소?
다시 이성을 찾은 듯 윤 회장의 목소리가 다시금 무거워졌다.
그러나 황이서는 이미 느꼈다.
윤 회장이 은근히 자신의 아들을 아끼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걸 들키기 싫어한다는 걸.
“죄송합니다.”
-됐소. 다른 사람이 봤으면 그렇게 오해할 만하지. 누가 봐도 지금의 올리오스보단 황룡그룹이 더 클 테니 말이야.
황이서는 윤 회장이 진심으로 올리오스가 지금보다 커지기를 바란다는 걸 느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전화를 끊으려던 윤 회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연락했다는 건 건하에겐 비밀로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
황이서가 생각한 윤 회장이었다.